34화
“너 언제까지 나 쫓아다닐 거야. 이럴 시간에 일각이라도 수련해.”
저녁을 먹은 뒤, 몸에 남은 땀 냄새를 없애려 욕간으로 가려는데 연진이 저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암탉을 따라다니는 병아리도 아니고 이게 뭐람.
해월은 병아리와 연진의 모습을 비교하여 상상해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연진은 꽤나 냉정하게 생긴 병아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병아리는 아주 단호하고 논리정연했다.
“아까 넘어지실 뻔했잖아요. 혹시 모르니 곁에 있을 겁니다.”
조금 전,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던 해월이 조금 휘청거렸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것이었다.
해월은 제자의 유별난 걱정이 황당했다.
“내 부축이라면 꼬맹이들 시키면 되지 뭘 굳이 네가 해.”
“귀찮다고 저녁상과 그 애들을 같이 물리신 건 기억 안 나십니까.”
사실이 그랬다. 해월은 괜히 향단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그녀와 원복을 같이 내보냈었다. 어차피 저녁 시간이라 그들이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져. 게다가 아주 유난이야 너. 됐고 나 냄새나서 씻을 거야, 설마 욕간 까지 따라 올 생각은 아니겠지?”
연진의 얼굴엔 왜 아니겠냐는 말이 쓰여있었다.
“하아….”
해월은 극성스러운 제자의 태도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
해월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욕간에 발을 들였다. 물론 연진도 함께였다. 해월은 우직한 자세로 제게서 뒤돌아 서 있는 연진을 향해 피식 웃었다.
옷을 벗을 때도 한 번을 안 보더니, 아직도 저렇게 있는 모습이 뭐랄까… 지나치게 정직해서 우습달까.
사내끼리인데 알몸 좀 보는 게 뭐 대수라고. 심지어 벗고 있는 건 저 혼자뿐인데, 다 입은 연진이 부끄러워하니 어이가 없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설마 남의 알몸 보는 게 부끄러워 그래?”
“…아닙니다.”
“흉터도 다 봤으면서 뭘 새삼스레 내외하고 그러냐.”
“내외한 적 없습니다.”
“그래, 그래.”
내외하지 않았다면서 줄곧 등지고 있는 꼴이 참 대조적이었다.
해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자 바람이 공기를 휘감으며 연진의 소맷자락이 해월의 쪽으로 이끌렸다.
끌려간 소매 탓에 얼결에 해월과 눈을 마주친 연진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야 뭘 그리 부끄러워해. 따지고 보면 내가 더 부끄러워해야 되는 거 아니냐. 난 다 벗었고 넌 다 입었는데?”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긴 개뿔… 됐고, 얼른 안 보면 이번엔 네 옷 홀랑 다 벗길 줄 알아.”
해월이 으름장을 늘어놓자 연진은 마지못해 시선을 내린 채 해월 쪽으로 얼굴 방향을 돌렸다.
그나마도 나름의 발전이었던 지라 해월은 목욕간에 팔을 걸고 큭큭 웃었다.
“미친놈을 하던지, 웃기는 놈을 하던지 둘 중 하나만 해라.”
“…….”
“하아… 좋다.”
해월은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는 노곤함을 풀었다. 이렇게 안온하니 잠시간은 모든 걸 잊을 수 있겠지.
뭐라도 좋으니 이 상념을 떨치고 싶었다. 생각의 연쇄를 끊고 그저 웃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리 가까이 좀 와봐.”
“…이렇게 말입니까.”
뜬금없는 부탁이었지만 연진은 군말 없이 해월의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해월은 싱긋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더 가까이.”
어느덧 서로의 숨결이 뺨에 닿는 거리에 이르자 해월은 얼핏 농염한 눈으로 연진을 쳐다보았다.
연진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려 하자 해월이 그의 팔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힘에 연진은 중심을 잃고 목욕간에 빠지게 되었다.
풍덩.
“윽, 사부!”
온통 물에 젖은 연진을 본 해월이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넌 역시 웃기는 놈이야.”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연진은 이내 입을 닫았다. 자신을 놀리고 호탕하게 웃는 해월이 너무나도 즐거워 보여서.
연진을 욕간에 빠뜨리는 장난을 칠 때까지는 몰랐다. 상체에 있는 지난 세월의 상흔들이 고스란히 드러난 덕에 연진에게 타박받게 될 줄은.
“이깟 흉터가 뭐 대수라고 유난이야.”
“유난 아닙니다.”
“너 진짜 내가 과한 걱정하는 거 줄이라고 몇 번을 얘기하냐.”
“이런 상처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연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해월을 데려간 뒤 익숙한 듯 약재를 꺼냈다.
해월은 옷고름을 풀어 팔만 걸쳐질 정도로 내렸다.
연진은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약재를 떠 등에 난 흉터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 차가워.”
약재의 차가운 감촉 탓에 해월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괜히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피부에 닿는 단단한 손가락이 부드러운 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이건 상처가 꽤 오래되어 보입니다.”
“아 그거? 몇 년 됐더라… 아무튼 옛날에 마물을 퇴치하다가 입은 상처라서 쉽게 낫지도 않고 흉도 안 사라져.”
꽤 강한 요괴였던 터라 고전 끝에 상처를 입고 정화에 성공했던 기억이 있다.
“많이 아팠겠군요.”
“뭐 아프긴 했지만, 이 일 하다 보면 흔히 겪는 거니까.”
해월은 고저 없이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생사를 넘나들었다는 얘기를 아주 간단히 해서일까. 연진은 더욱 시름이 깊어진 얼굴이 되었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그 작은 변화를 감지한 해월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몸에 있는 흉들은 오래되기도 했고, 인간이 아닌 것에게 입은 상처가 대부분이라 이런 약으로는 쉽게 안 나아.”
“…소용없다 해도 이건 기분상의 문제입니다. 지워지지 않는 흉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치료조차 하지 않는 건… 조금 서글프지 않습니까.”
서글프다. 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더라. 아니, 제대로 느껴본 적이 있긴 했던가.
해월은 지금껏 슬프다는 감정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느끼는 것은 언제나 아쉬움이었을 뿐.
처음 고향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유도 아쉬움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건 아쉬움이 아니라….’
서글픔이었던가.
***
연진의 영력이 날이 갈수록 성장하여 해월은 뿌듯한 마음을 느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일이 이렇게 보람차구나.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고향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가르친 아이가 있었다. 하나 그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건 확실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연진은 잘 배우는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모양인지 질문을 자주 했다.
“사부처럼 술법을 쓸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아, 풍술?”
풍술은 해월의 주특기였다.
그런데 이 술법의 기원은 백난국이 아니라 지금은 멸망하여 사라진 타국이었다.
망국의 술법이라는 이유로 고운 시선을 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 이 술법을 다룰 줄 아는 자는 해월과 선학경을 제하고 전무 하다 보아도 될 수준이었다.
덧붙여 전쟁과 살육을 수없이 반복한 이 나라는 대외적으로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기에 이런 술법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었다.
때문에 영하는 치유술과 제사를 위주로 영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해월은 영하가 아닌 일개 퇴마사인지라 개의치 않고 술법을 사용했다.
“흠… 배워두면 좋기야 하겠지만. 넌 어차피 귀족이니까 굳이 배울 필요는 없어. 치유술 정도면 충분해.”
“…그렇습니까.”
해월의 답을 들은 연진은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큰 강아지와도 비슷한 터라 해월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내가 있는 동안 그걸 다 배울 수는 없으니 우선은 치유술만 배우자. 그것만 배워도 이미 상당한 실력자라는 거니까.”
“예… 한데 치유술은 정말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까.”
“웬만한 약재보다는 효과가 좋지만 그렇다고 만병을 통치하는 건 아니지. 그래도 술자에 따라 경이로운 수준의 회복력을 낼 수 있다는 건 알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치유술을 사용하는 건 술자의 생명력을 양도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치명상을 치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듣기론 잘려 나간 신체도 원상태로 되돌릴 수도 있다 하던데요.”
연진은 언젠가 서책에서 보았던 것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신체의 어느 부위냐. 혹은 술자의 능력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긴 한데… 아마 그럴 거야.”
그 정도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려면 술자부터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느 시대의 누군가는 그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저는 치유술을 더욱 집중하여 배우고 싶습니다.”
연진이 결의에 찬 듯 말했다.
“상관이야 없지만… 왜 혹시 의원 차리는 게 소원이야?”
“아뇨.”
“그럼?”
“사부의 흉터를 제가 치료해주고 싶어서요.”
그 명료한 답을 듣는 찰나, 해월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가늠이 안 되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 부러 웃음 짓고 농을 했다.
“어이구, 벌써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도련님? 기특하네. 말이라도 고마워라.”
해월은 연진의 양 뺨을 잡고 살짝 꼬집으며 아이를 다루듯 대했다. 이에 그는 인상을 구겼다.
“그냥 하는 말 아닙니다. 마물 때문에 입었다는 그 상처. 약으로 치유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네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웬만한 영하도 고치기 힘든 거라 안 돼. 물론 내가 그간 치료를 안 한 건 돈이 없어서였지만.”
흉터 같은 거 애초에 별 신경도 안 쓰였지만, 치료를 안 한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강력한 마물에게 입었던 상처이니만큼 그에 상응하는 영력을 가진 사람이 치료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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