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33화 (33/124)

33화

매일 보던 연진의 까만 눈동자가 이상하게도 조금 달리 보였다.

그때, 순식간에 팔이 잡히고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연진이 저를 어깨에 들쳐멘 것이다.

해월은 그의 어깨에 배를 댄 채 버둥댔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격한 움직임에도 연진은 꿈쩍하지 않았다. 완력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몰라서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었다.

“곧 죽어도 제 말을 듣지 않으실 듯 보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거 안 내려놔? 야!”

해월이 발버둥 치고 윽박질러도 연진은 개의치 않고 해월을 방으로 옮겼다.

곧이어 연진의 어깨에 매달려있던 해월의 발이 이부자리에 닿았다. 해월은 뾰로통한 얼굴로 연진을 째려보았다.

“…넌 날 스승으로 생각하긴 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그 말을 하는 해월의 얼굴에 어쩐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가뜩이나 피곤했는데 언성까지 높여서 더 피곤했다.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극진히 모시는 거지요.”

연진은 아랑곳 않고 이불을 해월의 목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누가 보면 추위에 떠는 어린아이를 살피는 듯 보일 정도로 지극하고 정성 어린 움직임이었다.

“이게 극진히 모시는 거냐? 들쳐 메고 옮겨놓는 게?”

해월이 비꼬듯 물었다.

“잠시 눈 좀 붙이세요. 잠깐이라도 자는 것이 기력 회복에 좋을 겁니다.”

연진은 해월의 말을 아주 가뿐하게 무시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언제부터 관계가 이렇게 된 건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느샌가 제가 늘 연진에게 지게 되는 듯했다. 처음엔 반대였던 것 같은데. 아마 이것은 정이 들어서겠지. 그만큼 제 마음이 약해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해월은 이마를 짚은 채 길게 한숨 쉬었다.

“하아….”

고집을 부리긴 했지만 피곤한 게 사실이라 쉬고 싶었다. 하지만 피곤한 것과는 달리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 많은 저의 제자를 위해 자는 시늉 정도는 해주어야 할 듯하여 어쩔 수 없이 몸에서 힘을 풀었다.

연진은 그의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해월이 눈을 흘겼다.

“…넌 네 방으로 안 가?”

“주무시는 거 보고 갈 겁니다. 이렇게 안 하면 제가 나가자마자 일어나실 거잖아요.”

“…안 그럴 테니까 나가줘라. 부담스러워.”

철두철미한 연진의 행동 방식에 해월은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안 됩니다.”

해월의 눈에 연진은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는 새처럼 보였다.

원래는 조금 더 무신경하고 냉정한 귀공자에 가깝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주 노인 하나를 모시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꽉 막힌 노인네.’

해월은 연진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 턱이 없는 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안 묻었어.”

“그럼 왜….”

“재수 없어서 쳐다봤다.”

조금도 돌려 말하지 않은, 본심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

“됐고 나 잘 거니까 이제 말 걸 지마.”

해월은 눈을 감고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그리고 피곤함에 시달리며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

머리가 지끈거리다 보니 정신이 몽롱했다. 그 때문에 눈을 감은 것만으로도 모든 감각이 흐려지고 몸이 붕 뜨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이상한 감각 속에서 해월의 앞에 펼쳐진 것은 암흑이었다.

칠흑과도 같은, 빛 한 점 없는 암흑. 그 속에서 해월은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내가 언제 잠들었었지…?’

답 없는 질문들이 속에서 울려 퍼졌다. 해월은 본능적으로 그 인영을 향해 나아갔다.

흐릿했던 인영이 가까워지고 비로소 형체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건….’

해월이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 정도에 놀랄 정도로 담력이 작지 않았다. 이내 해월은 무미건조한 표정이 되었다.

원래는 꿈을 잘 안 꾸고, 꾼다 해도 꿈이라는 것을 자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참 별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무리 저라도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묘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머리가 이중으로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해월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돌렸다. 외면하는 자세를 취하고 나서야 어린 해월이 스물다섯의 해월에게 말을 건넸다.

“왜 나를 피해?”

“…피하긴 뭘 피했다고.”

“계속 피하고 있잖아.”

“뭐…?”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께름칙한데 질문이 예사롭지 않아 괜히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살다 살다 별 이상한 꿈을 다 꾸는군….”

“이게 그냥 꿈일 거라고 생각해? 어째서일까 나는 너인데.”

혹시 한주에 오기 전에 저도 모르는 사이 귀신이라도 들러붙었나 싶어 순식간에 온몸에 긴장이 일었다.

태자귀(어린아이 귀신)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다.

‘태자귀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나타나… 그런데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어.’

게다가 귀신이 들러붙은 것 하나 눈치 못 챌 정도로 해월은 하수가 아니었다. 그런 해월의 생각을 알았는지 어린 해월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나 귀신 아니야. 말했잖아 나는 너라고. 어차피 한 번은 마주해야 할 텐데 자꾸 날 피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대체 무슨 소리야. 이건 그냥 꿈이야. 내 무의식이 기억 속 무언가를 구현해낸 것에 불과해.”

해월은 이성적으로 상황을 통찰했다. 이건 단순한 꿈에 불과하다.

너무 피곤해서 꾸는 그런 안 좋은 꿈.

그에 반해 어린 해월은 천연덕스러웠다. 아주 소름 돋을 정도로.

“그렇게 피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평화로운 찰나에 취해 나를 잊으려 해도 무용한 짓이야.”

“…….”

“이제 그만 받아들여. 네가….”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라는 걸.’

이어지는 뒷말을 듣는 순간, 해월의 머릿속에 있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아니야!”

소리치는 동시에 턱과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그건 아마도 그간 외면해왔던 것을 억지로 끄집어낸 탓일 것이다. 해월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린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난 그런 게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거지? 피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어. 너는 이미….”

“입 다물어!”

***

해월의 만면이 식은땀으로 젖어 얼룩졌다.

덜덜 떨리는 손이 몇 차례 허공을 가르고 헤매길 반복했다.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을 천장이 구원인 것처럼 그렇게 손을 뻗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깨어날 수가 없었다.

‘도와줘…!’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한 채 이대로 숨이 멎는가 싶던 찰나.

어디선가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신의 쪽으로 누군가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부!”

누구의 목소리더라.

“사부! 눈 떠보십시오!”

‘아… 진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찰나 시야가 환해지고 순간적으로 숨이 트였다. 갑자기 폐부에 가득 차는 공기 탓에 호흡이 지나치게 가빠졌다.

“헉! 콜록!”

연진은 그런 해월을 반쯤 일으켜 자신에게 기대게 한 뒤 등을 두들겨주었다. 해월은 연진의 옷자락을 그러쥐며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어, 조금.”

“무슨 악몽을 꾸셨길래 이럽니까.”

해월은 대답하지 않고 연진의 뺨에서 손을 떼고 지끈거리는 제 이마로 가져갔다.

다행히 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열 만큼이나 정신을 쏙 빼놓는 악몽이었다. 어린 모습의 자신이 충고하는 꿈이라니.

너무 우스워서 되레 웃음이 안 나왔다.

“땀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연진은 제 옷소매로 해월의 땀을 닦아내려 했으나 해월이 조금 더 빨랐다. 해월은 괜찮다는 손동작을 하며 제자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 귀한 비단옷으로 뭘 하려는 거야.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넌 너무 네 옷을 막 다루는 것 같아. 암만 옷 귀한 줄 몰라도 비단으로 땀 닦는 건 도련님이나 하셔.”

옷값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땀 닦을 용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해월은 자신 때문에 연진이 손해 보는 일이 없길 바랐다. 설령 이런 작은 배려 하나일지라도.

이에 연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저라고 비단옷이 귀한 줄 모르겠습니까. 저도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생활을 한 지는 그다지 오래 안 되었는걸요.”

“…뭐?”

“숙부님께선 제게 이 별채만 내어주셨을 뿐, 다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숙부님이 가주가 되신 후 하인들도 전부 바뀌어서 제가 있는 줄도 몰랐던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별채를 내어준 것도,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을 감은 곳이라 재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 넌… 어떻게 살았던 거야.”

해월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제가 지금 그때보다 나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다 현원 소씨 가주님 덕분입니다.”

“현원 소씨 가주? 그분이라면….”

백난국의 팔대 세가 중 하나인 현원 소씨. 황가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은 가문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황가의 적들을 제거한다 하여 백난국의 몽검(蒙劍)이라는 별칭까지 있다.

“언젠가 세가의 가주님들이 저희 저택에 모였을 때, 그분께서 숙부님께 면박을 주시곤 저를 옹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귀족다운 예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예, 이 일은 거의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른 이들은 숙부님이 변덕으로 제게 잘해주는 줄 알지만… 실은 현원 소씨 가주님의 도움이었죠.”

그 일이 있고 난 뒤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연진은 항상 현원 소 씨 가주 소천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나름 잘된 일이네.”

“…예?”

“강력한 가문의 가주가 하는 말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너희 숙부는 안달이 낫겠지. 그러니 네가 귀신 때문에 정신을 놓았다는 소문을 퍼뜨린 거고.”

그 소문이 없었더라면 저는 연진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내가 널 만났잖아. 네 숙부는 개차반 같은 놈이지만, 그래도 고마운 점은 있네.”

“…큭.”

해월의 적나라한 표현에 연진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그 이유를 묻자 연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간신히 답했다.

“흠, 그때 힘들었던 순간들이 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왠지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여긴 제가 우스워서 웃었습니다.”

“미친놈… 나는 웃어도 너는 웃으면 안 되지.”

모르긴 몰라도 온갖 굴욕과 설움을 겪었을 텐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왜 이리 웃음이 날까.”

연진 역시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즐겁고 웃음이 나는지 저조차도 몰랐다.

“…네 숙부가 영 거짓 소문을 퍼뜨린 건 아닌 것 같다.”

저의 제자는 어딘가 미친 것 같았다. 제가 한 미친놈 소리가 어디가 좋은지 연진은 연신 웃어댔다.

“하하.”

“그래, 복이라도 들어오게 웃어라 웃어.”

해월은 이제 포기한 심정으로 함께 따라 웃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