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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32화 (32/124)
  • 32화

    “…늙다 보면 의심만 많아져서 탈이야. 부탁하는 처지에 이런 말 하기는 부끄럽지만, 난 퇴마사 선생이 믿음직하지 않네.”

    노온의 진솔한 말에 해월도 똑같이 진솔하게 응수했다.

    “의심은 통찰에 있어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전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의심. 그것은 해월도 늘상 하는 것이었다.

    해월은 언제나 재고, 따지고, 판단하는 일만 해왔다. 그렇게 마음을 죽이고, 날 벼른 칼날처럼 예리한 태도로 세상을 살았다.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엔 이 집안에서 재화나 좀 챙겨서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 애의 스승을 하고 싶다고 했던 건 그냥 심심풀이였고요. 장로께서 바로 보신 겁니다. 저는 제 이득을 챙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지나치게 솔직한 탓일까. 장로의 주름진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해월은 노온의 의중을 신경 쓰지 않고 하고픈 말을 했다. 어쩌면 자백과도 닮은 행위였다.

    “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 텐데 어째서 돕고자 하는 것이오?”

    노온의 의심은 해월의 진솔한 답변에도 한 번에 풀리지 않았다.

    “퇴마사 선생께서 외지인이라지만 이 집안 돌아가는 꼴은 대충 알 것이오. 지금 이 가문은 존폐의 위기에 놓였소. 이 고비를 못 넘기면 한주 강 씨는 완전히 망할 거요.”

    “아무렴 잘 알고 있습니다. 장로께서 온전히 저를 믿어주시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

    “하지만 그 애를 아끼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만 볼 수 없습니다.”

    해월의 눈에 확신의 이채가 서렸다.

    그 눈을 마주한 노온 역시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두 달쯤 더 지나면 저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해드릴 테니 장로께선 제가 부탁드리는 것을 해주시면 됩니다.”

    “정녕 그 짧은 새에 해낼 수 있겠소? 무엇보다 그 애는 제 숙부에게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했다오. 어찌 염려되지 않겠소.”

    지금껏 내색은 안 했으나 노온은 연진이 늘 신경 쓰였다. 자신의 일신을 위해 외면해버렸던 아이가. 그 아이가 장성하고 맑은 눈빛을 잃어가는 걸 알면서도, 가문 내의 다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무시했었다.

    해월은 노온의 심정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것도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전부 해낼 겁니다.”

    해월은 어떤 일을 의뢰받고 해결하는 일에는 이골이 났다. 그는 여유로움을 얼굴 만면에 띄웠다.

    그동안 여러 일을 보고, 듣고, 겪으면서 실패를 예견해본 적은 거의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반드시 성공해낼 것이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미를 남길 수 있겠지.’

    그것이 해월의 목표였다. 어쩌면 이번 생의 마지막이 될 목표.

    ***

    “검 끝이 턱 끝과 비슷한 높이에 있도록 기울이고 부드럽게 그러쥐어. 그래야 휘두르기 쉬우니까. 안 떨어뜨린답시고 너무 세게 쥐면 움직임이 둔해질 수 있으니 조심하고.”

    해월은 시범을 보였다. 가볍게 자세를 취한 것만으로도 확실히 많이 해본 자 특유의 능숙함과 여유가 묻어났다.

    연진도 그를 따라 목검을 잡아보며 자세를 잡았다.

    “좀 더 허리를 세우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는 연진의 팔과 허리를 툭툭 치며 부러 긴장을 풀도록 했다. 와중에 연진은 궁금한 것부터 해결하려 들었다. 대련하자며 목검 두 자루를 들고 저를 찾아온 해월을 보았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이었다.

    “한데 사부.”

    “왜?”

    “이 목검… 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어디서 나긴. 이 집 무기 창고에서 훔쳐 왔지. 설마 내가 나무 깎아 만들어왔을까 봐?”

    해월은 언제나 연진을 새로운 방식으로 황당하게 만들어 주었다. 적어도 따분하지는 않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그런 생각마저 일은 연진은 드디어 제가 물들어버렸구나 싶어서 헛숨이 나올 뻔했다.

    해월은 조금의 민망함도 없이 주장했다.

    “근데 따지고 보면 훔친 건 아니지. 넌 이 집 도련님이고 여기 있는 것들의 주인은 너인데. 주인이 제 물건 쓴다고 해서 훔쳤다고 할 순 없잖아.”

    “…그런 것으로 하죠.”

    둘은 검을 들고 넓은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검을 쥔 채 마주 섰다.

    들어와 보라는 듯이 고개를 한 번 까딱이자 연진은 해월에게로 달려들었다. 목검이 맞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별채를 울렸다.

    ‘오호.’

    그저 내려치는 기술뿐이었지만 힘 자체가 강해서 그런지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로 쉽게 제압할 수 있기도 했다.

    연진의 옆구리 쪽으로 자세를 수그려 파고든 해월이 손목 부근을 가볍게 쳤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손목에 맥이 탁 풀려, 연진은 그만 목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니까. 빈틈이 생기잖아.”

    가벼운 어투였지만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가 무예를 허투루 배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울렁임을 느낀 연진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좋아.”

    검과 검이 연신 부딪혔다. 이번에 연진은 해월이 제게 했던 것처럼 손목 부분을 공격하려 했다. 검을 쥔 자가 검을 놓치는 순간에 느끼는 무력감을 방금 배워서 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수련으로 저도 나름대로 몸이 재빨라졌고, 해월을 이기진 못해도 어느 정도 상대는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 생각은 곧이어 흩어지고 말았다.

    해월이 모든 공격을 쉽게 피하고 결국에는 검을 비틀어 연진의 허점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또다시 연진의 패배였다. 해월이 힘을 조절하였기에 어디 크게 아픈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씁쓸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잘했어.”

    귓가에 들리는 진심 어린 격려에 연진은 내렸던 시선을 다시 올렸다.

    “어우, 힘들어.”

    어깨를 돌리며 근육을 풀어낸 해월이 싱긋 웃었다. 힘들다는 말과 달리 그의 상태는 멀끔했다.

    “너 진심으로 달려드니까 진짜 당해내기 힘들다.”

    “…빈말입니까.”

    “아니. 너한테 빈말해서 뭐 하게. 금전 한 푼이라도 나오면 하겠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연진이 진심으로 맞붙어오자 반사적으로 영력을 극도로 체화해서 이긴 것뿐이지 맨몸이었다면 결과가 어찌 될지 몰랐다.

    “수고했어.”

    해월은 살짝 멍해진 연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목검을 챙겨서 별채 밖으로 나갔다.

    ***

    이곳에서 연진을 구하고자 마음먹은 뒤로 떠오른 생각은 많았으나 생각 중 최고는 바로 이것이었다.

    ‘금전 하나 안 나오는 일을 이리 열심히 하게 될 줄은 몰랐군.’

    장로에겐 미안한 일이나 작금의 해월은 연진의 안위가 중요할 뿐 한주 강 씨의 존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가문이 있어야 연진의 체면도 서는 것이겠지만, 여차하면 가문보다 연진을 살리는 일에 집중할 것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지난날 원복이 말하길. 작금의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선대 가주의 유지가 연진에게 있다고 한다. 해월에겐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강석요를 몰아내고 연진을 가주로 추대하려면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패다.

    해월은 연진으로부터 선대의 유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꺼리는 듯하여 일부러 묻지 않기도 하였다.

    ‘만일 유지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그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데, 문제는 저의 우직한 제자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였다. 해월은 그렇게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 후로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부.”

    연진이 해월을 부르며 그의 곁에 앉았다. 해월은 살짝 놀라 커진 눈을 한 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진은 그를 따라 하듯 먼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자에는 계속 이리 앉아 계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언제 앉아만 있었냐. 아침에도 수련했잖아.”

    연진의 성장세가 워낙 빠른 터라 여러모로 보람찼다. 그것과는 별개로 종일 사색하는 탓에 골이 아프지만.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여기 계시잖아요.”

    연진은 해월이 자주 이곳에 앉아 사색에 빠진다는 걸 알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걸까 늘 궁금하기도 했다.

    “그건 또 언제 봤어.”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연진은 참 사실만을 말하는데 도가 튼 사람 같았다. 이렇게 바른말만 하는데 그동안의 불합리한 일들은 대체 무슨 수로 감당했던 걸까.

    “저는 사부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늘 궁금합니다.”

    “너도 떠돌이 생활해보면 알아. 이래저래 고민할 일이 참 많거든.”

    해월은 대충 답을 했다. 여기서 네 숙부에게 대항할 방법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바쁘단 얘기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다행히 연진은 별다른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연진은 문득 해월의 어둑한 눈가를 보고는 걱정스레 제안했다.

    “조금 피곤해 보입니다. 오수에 드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해월은 아까부터 눈가를 몇 번 비볐다. 그런다고 피곤이 가실 리는 없었다. 이때까지 자각하지 못했으나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원래부터 그리 깊은 잠을 자는 편이 아닌데다, 요새는 신경이 곤두서있는 탓에 잠을 거르기 일쑤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피곤하긴 하네.”

    그렇다고 오수에 들 수는 없었다. 오후에는 연진에게 다른 것들을 가르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인 단계인데 여기서 수련시키는 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그런 고집을 알아챈 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던 해월의 손을 잡았다.

    “왜?”

    “지금 주무십시오. 저녁상이 나올 때쯤 깨워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조금 피곤한 것 가지고 뭘.”

    “안 됩니다. 요새 밤잠에 잘 안 드신다는 것 이미 알고 있으니 어서 주무십시오.”

    “…넌 가만 보면 참 예민한 편인 것 같아.”

    어떨 때는 둔하고 어떨 때는 기민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제자였다.

    “난 괜찮아. 잠 며칠 못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

    실제로 해월은 나흘 동안 단 한숨도 자지 않은 적이 있다. 심지어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도 치료받지 않은 채 열흘을 버텼었다.

    타고난 체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 그저 악으로 버틴 것이지만. 어쨌든 그런 경험을 하고 난 뒤로 이 정도 피곤함은 별것 아닌 일이 되었다.

    연진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병납니다. 의술 배웠다면서 잠을 거르는 것이 몸에 얼마나 안 좋은지 모릅니까.”

    “아, 또 노인네 잔소리… 괜찮다니까 글쎄. 너 내가 과하게 걱정하는 성격 고치라고 했잖아.”

    “잔소리 아니고 과한 걱정도 아닙니다.”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 너 그 성격으로 어떻게 참고 살았냐.”

    해월은 투박한 어투로 그간 품어왔던 질문을 던졌다. 순간 아차 싶었으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해월은 말을 주워 담는 재주가 없기에 우물쭈물 망설였다.

    연진이 태연자약한 태도로 말했다.

    “참을만해서 참은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참기 어렵군요.”

    무엇을, 이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마주한 눈빛이 왜인지 모르게 짙다는 생각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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