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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31화 (31/124)
  • 31화

    ‘그 퇴마사를 은밀히 불러내 나와 만나게 해다오. 하면 이 일은 내 선에서 눈감아주마.’

    노온의 말을 떠올린 향단은 마른침을 삼켰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팔뚝을 문지르며 담장 옆을 서성였다.

    어제 그 말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노온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자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향단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 쉬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

    “하아….”

    한숨을 내 쉬는 그녀의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다 땅 꺼지겠네.”

    담장 위에서 향단을 내려다보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해월이었다.

    “귀, 귀빈…!”

    “무슨 고민이 있길래 그리 한숨 짓는 걸까.”

    해월은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하며 가볍게 담장을 넘어 향단의 앞에 섰다.

    향단은 본능적으로 겁을 먹고 자세를 수그렸다.

    그 잔떨림을 본 해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언가 낌새를 느꼈을 때 짓는 해월의 습관이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구나.”

    “…아닙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래? 내 보기엔 맞는 것 같은데.”

    해월은 향단의 변명에 느긋하게 응수했다. 그는 향단을 봐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무엇이 됐든 이루고자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면, 뒤탈이 없는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해월의 행동 방식이었다.

    솔직히 아직 어린 소녀한테 이런 일이 닥친 것에 대한 개인적인 안타까움은 있다.

    그런 뜻에서 지금은 약간의 겁박이 필요했다. 조용히 관망하기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금 너희 도련님은 방에서 서책을 읽고 있고, 원복이는 다른 심부름이 있어서 잠시 나간 상태야.”

    굳이 연진과 원복의 동태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저의를 몰라서 향단은 입을 다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하는 것이 맞지 않겠어? 이런 때는 흔하지 않다는 거 너도 잘 알 텐데.”

    회유라면 회유이고, 겁박이라면 겁박이었다. 기왕이면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해월은 향단이 제 말에 넘어오기를 바랐다.

    “저는….”

    향단은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여기서 어떤 언동을 취한들 향단 자신에겐 손해였다. 득실을 가늠해보자면 전부 실인 선택지뿐이다.

    그런 선택의 갈림길에 수도 없이 서 본 해월은 입꼬리를 늘렸다. 그 섬뜩한 미소가 향단을 더욱 두렵게 했다.

    “향단아. 난 너처럼 영민하고 제 잇속을 잘 챙기는 아이가 좋아. 하지만 답답하게 구는 건 싫어.”

    “…….”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안 그렇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이 선 말들을 포장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연진을 해치는 선택을 했다는 것, 설령 그것이 타의에 의한 것이라도 해월은 용서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기에 관망하고만 있었는데, 최근 향단이 바깥심부름을 자주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지난날 시전에 심부름이 있다고 나갔을 때, 강석요 가주의 끄나풀이라도 만났나 보구나.”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일개 하인이 바깥에 나갈 핑계는 그뿐이었고, 그 목적은 강석요에 관련되었을 게 뻔했다.

    “오, 오해입니다, 귀빈.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향단을 보고 해월은 속으로 한숨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렴.”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평소처럼 찬장에 찻잎이 다 떨어졌다 하여 그걸 사러….”

    “하, 얘가 말이 안 통하네.”

    “헉…!”

    순간, 향단은 그 자리에서 석고처럼 굳었다.

    해월이 풍술로 파장을 날려 향단의 머리칼이 조금 잘려 나간 탓이다. 그저 몇 가닥 잘려 나갔을 뿐이지만 어린아이에게 경각심을 주기엔 충분했다.

    ‘미안하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 해서 어쩔 수 없구나.’

    어린아이가 벌써 이리 험한 일에 말려들어서야 되겠는가. 겁을 줘서라도 멈출 필요성이 있다.

    해월은 죄 없는 사람에겐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향단은 죄를 지었다. 연진을 해하는 일에 가담했다는 죄를.

    사시나무 떨듯 떠는 향단을 향해 해월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 목소리는 가시가 박힌 비단 같았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시간이 많이 없어. 그러니 빨리 말해줬음 좋겠는데.”

    “…예.”

    폭력은 이처럼 많은 일들을 쉽게 해결해주곤 한다.

    ***

    푸른 잎들이 우거지고 태양이 강렬한 빛을 내며 땅을 데웠다.

    해월은 연진이 그림을 그려준 부채로 부채질을 하며 느릿한 걸음으로 저택의 한 건물에 들어섰다.

    이곳까지 오는 걸음 하는 동안 몇 명의 하인들을 마주쳤다. 물론 중간부터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왔지만.

    이제 해월의 존재는 저택에 있는 이들에게 제법 익숙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에게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해월은 그 시선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길게 볼 사이도 아니니까.

    실제로 말 한마디 제대로 섞어본 적 없다. 그리고 해월은 그런 시선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향단이 이실직고한 덕에 노온이 저택에서 꽤나 비밀스러운 장소로 자신을 불렀음을 알게 되었으니.

    무슨 이야길 꺼내려나. 기대하는 마음도 들었다.

    “계십니까.”

    “들어오시오.”

    노온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해월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는 동시에 그는 찬찬히 내부를 살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은 단정하고 검소한 꾸밈새를 자랑했다. 화려하게 장식해놓은 밖의 다른 건물과는 색다른 것이었다.

    “난 눈 따가운 장신구들은 딱 질색이라오.”

    “아, 그러시군요.”

    방안에 앉아있는 그녀는 늙은 여인임에도 체격이 다부졌다. 과연 무인가문의 장로다운 기색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 차를 내지 못하는 점은 양해 부탁드리오. 냉수라도 준비할 것을 이 늙은이가 생각이 짧았소.”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그저 대화만 나누는 것이 편합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려.”

    노온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해월을 자신의 맞은편에 앉도록 했다.

    해월은 노온과 천천히 말문을 트고 본론으로 이야기를 이끌 시간이 없었다. 자신은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이곳을 떠날 테니까. 그 짧은 시간에 빨리 일을 해결하려면 이리 허비하는 찰나의 순간조차 아까웠다.

    “향단이에게 들었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셨다고요.”

    “하하, 젊은이라 그런지 본론부터 얘기하는구려. 미안하지만 이 늙은이 속도 좀 맞춰주게나. 나이가 들면 말을 빨리하는 것도 힘에 부치거든.”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솔직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월은 딱히 말을 꾸미지 않았다.

    그 모습에 노온의 눈에 흥미로운 기색이 생겨났다. 범상치 않은 자를 만났을 때 짓는 특유의 눈빛이었다.

    “이제 보니 퇴마사 선생은 보통 담대한 게 아니구먼. 다 늙은 사람 앞에서 겁낼 게 뭐 있겠냐만…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어.”

    “송구합니다만 제가 귀족가의 장로와 독대한다고 떨릴 만큼 곱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노온은 그 말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연륜으로 알아챘다.

    “아닐세.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구먼.”

    “그리 봐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싱긋 웃으며 답하자 노온의 흐릿한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하면 조속히 본론부터 말하겠소. 내 퇴마사 선생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 이리 만나자고 했소.”

    “무슨 부탁을 말입니까.”

    “실은… 강석요가 연진을 해치려 획책을 꾸미는 듯하여 이리 만남을 청한 게요.”

    “그것이라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참 생각이 짧고 식견이 좁은 자인 것 같습니다.”

    “이미 알고 있단 말이오? 듣기론 무예 실력도 뛰어나다 하던데 어째서….”

    “어째서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가주를 위협하지 않느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라면 거둬주시지요.”

    해월의 말에 노온은 할 말을 잃었다. 반면 해월은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강석요 가주와 장로님. 그리고 진이도 다들 귀족으로 살아와 우리네 삶을 모르시겠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함부로 대했다간 저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연좌제라는 것이 있지요.”

    태연자약한, 그러나 뼈가 있는 설명이었다.

    노온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 앞에서 연좌제를 운운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저와 같은 미천한 이들의 목숨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 아끼게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제가 외지인이라지만, 백난국 팔대 세가의 가주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거나 살해한다면 고향인 단곡 사람들까지 처벌받을 수 있다.

    백난국에서 하극상에 대한 처벌은 엄한 편이었다. 아무리 해월이라도 몸을 아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강석요가 머무는 별관으로 향해 그 목에 칼을 꽂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본디 이런 싸움은 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퇴마사 선생의 본의는 알겠소. 내가 너무 앞서갔구먼.”

    “아닙니다. 오히려 제 처지를 이해해주시니 감읍합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노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지금껏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아이가 나아가길 바라오. 이대로 제 숙부에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소.”

    “아무리 강석요라도 조카를 함부로 죽였다간 도의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은밀한 방법을 쓸 겁니다. 아직은 뚜렷한 움직임이 없는 상태고요.”

    노온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입에 올렸다.

    “연진을 도울 마음은 있는 게요?”

    “당연하죠.”

    해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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