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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30화 (30/124)
  • 30화

    본래 습득력이 좋은 것인지, 재능이 뛰어난 편인지, 아님 둘 다인 것인지. 연진은 영력을 배우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솔직히 이 정도로 금방 수양을 쌓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터라 해월은 당황스러웠다.

    벌써 영안이 트인 것은 물론이고, 영력을 방출하는 것도 터득한 연진을 보며 뿌듯한 것도 잠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떠오르자 해월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혹여나 이 감정을 들킬까 봐 얼른 표정을 갈무리한 후 손을 뻗어 연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잘했어.”

    “잘 된 건가요?”

    방금 목표물을 향해 영력을 방출한 연진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해월에게 되물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걸까. 해월은 그의 어깨를 토닥여 믿음을 전했다.

    “그보다 너 이제 큰일 났다. 영안이 한 번 트였으니 다시 닫히기는 어려울 테고. 한주 땅은 그나마 깨끗해서 다행이지만, 다른 곳 가면 마물한테 엄청 시달릴걸?”

    “큰일이라면 진작 벌어졌는걸요.”

    연진은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순간부터 줄곧 나락을 품고 살아왔으니 또 다른 나락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연진은 해월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묘한 기분을 느낀 해월은 입을 열었다.

    “무슨 큰일? 언제 벌어졌는데?”

    해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석요가 연진을 불러 겁박이라도 했나 싶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붙어있는 데다, 혹여나 떨어지는 찰나에도 계속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해월의 얼굴에 걱정 반, 두려움 반의 감정이 비추어졌다. 이에 연진은 피식 웃으며 해월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얼굴을 가까이하니 그들 사이에는 숨결 하나 지나갈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진득한 눈 맞춤이었다.

    “저에게 사부가 큰일이 아니면 대체 무어가 큰일입니까?”

    “…지금 내가 큰일이라는 거야?”

    연진은 지금 해월을 보고 ‘큰일’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 내가 무슨 큰일이냐. 나는 그냥….”

    반박하려던 해월은 이내 말문이 막혔다. 연진의 입장에서는 큰 변화를 제공한 사람이기에 큰일로 치부되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을 잇지 못하는 해월의 머리를 연진이 살짝 쓰다듬었다. 그의 짧은 머리카락이 손길을 따라 움직여 조금 부스스해졌다.

    난데없는 손길에 해월은 딱딱하게 굳었다.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준 적이 없는 터라 어색했다.

    게다가 보통 이런 행위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그들의 관계가 여타 사제관계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엄연히 질서란 것이 있는데, 지금 연진의 행동을 무어라 설명한단 말인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머리 쓰다듬습니다.”

    그의 답변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너무 당당한 터라 해월은 도리어 할 말을 잃었다.

    “뭐 어떻습니까, 닳는 것도 아닌데.”

    해월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었다. 연진의 소소한 복수이자 담백한 응수였다. 괜히 분한 마음에 연진의 이마에 꿀밤이라도 때려주려던 해월은 화들짝 놀랐다.

    평소와 같이 손을 뻗었는데 묘하게 높이가 맞지 않는 것이다.

    해월은 위아래로 연진을 훑어보며 그 이유를 확신했다.

    “너… 키 좀 큰 것 같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야. 확실히 컸어.”

    해월은 손날을 세워 눈높이를 표현했다.

    원래 두 사람의 신장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쪽이 조금 더 커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눈높이가 비슷하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하나 싶었다.

    객관적으로 차이를 확인한 연진 역시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사부가 조금 작게 보이네요. 요즘 좀 달라 보였던 게 이것 때문인가.”

    “…귀신 보기도 전에 귀신 되고 싶어서 작정한 거야?”

    키에 대해 민감한 해월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연진은 내친김에 남은 복수를 다 할 생각인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부는 대체 언제부터 이리 작았습니까. 얼굴도 작고, 손도….”

    “아, 그놈의 작단 얘기 좀 그만해!”

    해월의 흰 뺨 위로 슬며시 홍조가 번져 나갔다. 잇꽃과도 닮은 붉은 색이었다.

    해월은 짜증 어린 얼굴로 휙 돌아섰다. 그 모습에 연진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어딜 가십니까.”

    “몰라, 따라오지 마.”

    “간식 상이라도 올리라고 할까요?”

    해월은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살짝 혹했기 때문에 짜증은 배가되었다.

    “됐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먹을 거면 다 되는 줄 아냐.”

    그때였다. 연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좋아하잖아요. 왜 싫은 척합니까.”

    가리키는 대상이 불분명한 말이었던지라 해월은 걸음을 뚝 멈추고 뒤따라오던 연진을 쳐다보았다.

    저도 정확히 무엇 때문에 멈춰 섰는지 지 몰라서 순간 멍해졌다.

    ‘내가 왜 멈춘 거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연진의 말에 반응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대체 어느 부분이 거슬렸던 걸까.

    제 행동임에도 이유를 알지 못하니 우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연진이 해월의 얼굴 앞에서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짧은 파열음에 해월은 흠칫 놀라며 눈동자 크기를 늘렸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연진이 제게로 고개 숙인 순간이었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검지로 그의 이마를 툭 쳤다.

    “아.”

    그의 잇새에서 짧은 감탄사가 나왔다. 가볍게 친 것이지만 살짝 영력을 담았던 터라 머리가 꽤 아플 것이다. 해월은 쌤통이라는 듯 눈빛을 흘겨 주었다. 그러게 누가 맞먹으려 들래.

    연진은 씩씩하게 걸어가는 해월을 쳐다보았다. 뒷모습만 보아도 표정이 눈에 그려질 정도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이었다.

    “하여간… 성격 진짜 이상해.”

    이상한 사람의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자신은 더더욱 이상했다.

    ***

    보통의 귀족 가문은 본관을 각 지방에 두고 있으나, 세월이 지나 거의 황궁 근처에 터를 잡게 되어 본관과 별관의 구분이 애매하게 변했다.

    그 명칭의 본래 의미는 흐려지고 사실상 가문의 주인인 가주가 머무는 곳을 본관으로 취급하였다.

    별관의 수는 그 가문의 세도를 상징하는데, 한주 강 씨는 전대 가주 시절만 했어도 강직한 무인 가문으로 유서가 깊어 국경 근처에 별관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강석요는 가주의 자리에 오르자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하여 도처에 두고 있던 모든 가택을 처분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무예에 뜻을 두고 가문에서 수학하고자 하는 문하생들은 점차 사라지고, 황제에게도 신임을 잃어 변방의 귀족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향단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강씨 가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린 소녀에게 딸린 식구가 일곱이었다. 그 많은 이들을 감당하려면 고작 하인의 녹봉 가지고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향단은 셈이 빠르고 영리했다.

    가주의 측근이 어린 소녀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를 그녀라고 모르지 않았다.

    신분도 출신도 변변치 않기에 혹여 사라진다 해도 뒤탈이 없는 자, 그러면서도 모든 의심에서 우선적으로 배제될 수 있는 자.

    가난하여 돈이 궁하고, 어리고, 여인인 향단이 제격이었다.

    향단은 별관에서 밀명을 받았다.

    내용인즉슨, ‘도련님의 식사에 미약을 타서 서서히 죽게 하라’였다.

    향단과 연진은 그전까지 일면식도 없었다. 그 덕에 그녀는 죄의식이 적었고, 그래서 일이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두어 달 전부터 연진의 스승을 자처하고 있다는 퇴마사가 보통 기민한 수준이 아닌 것이다.

    늘상 웃는 얼굴에 장난스럽게 굴지만, 향단은 이미 겪어보았다.

    입매는 한없이 호선을 그리고 있으나 눈만큼은 겨울처럼 냉랭하여 아무 감정 없이 저를 죽일 것 같았던 해월의 모습을.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은 커져만 갔다. 게다가 오늘은 강석요 가주의 심복인 정 씨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날이었다.

    향단은 은밀하게 저택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정 씨를 마주했다.

    “상황은 어떠냐.”

    “송구합니다만… 좋지 않습니다.”

    “뭐? 명을 한 지가 언젠데 왜 아직도 뜸을 들이는 게야. 가주님이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계신다.”

    강석요는 무슨 이유에선지 갑작스레 연진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정 씨는 의아함을 내보이기보단 일을 진행시키기를 택했다. 그리하여 향단을 별채에 잠복시키는 것까지는 어찌저찌 성공한 듯했는데 그 이후로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빈틈이 없습니다. 그 퇴마사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키고 있으니 무얼 할 수가 없어요.”

    “적을 무너뜨릴 때는 상대의 약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만 별 도움 되는 사실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퇴마사가 조금 허약하다는 것 빼고는….”

    이대로 가면 제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향단은 황급히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덧붙였다.

    “되었으니 이레 안으로 해결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어찌 될지는 네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정 씨가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향단은 제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얼른 답을 했다. 돈을 얻기 위해서는 이 계획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향단이 허리를 숙이자 정 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 역시 의심을 사기전에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헉…!”

    골목 끝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장, 장로님…!”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강씨 가문의 노온이었다.

    노온은 사색이 된 향단과 달리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시전을 거닐다 우연히 널 보고 우리 가문 하인이 어딜 그리 쏜살같이 가나 했는데… 이리 대담한 짓을 하는 줄은 몰랐구나.”

    “…무엇을 보셨는지는 모르오나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향단의 떨리는 숨결이 목소리에 배어 나왔다.

    “쯧쯧.”

    노온이 대뜸 혀를 찼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향단은 초조한 속내를 감추려 애를 썼다.

    “내 너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거늘 제 발이 저려서 토설하는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노온은 오랜 세월을 살았다. 젊을 적엔 전쟁에도 참전했을 정도로 강인한 여인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 어린 향단의 동요가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제야 향단은 제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강석요도 참… 아무리 영민하다 해도 아이는 아이이거늘. 철저하지 못하다는 걸 어찌 모를까. 어리석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먼.”

    향단은 그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장로 중 가장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노온이니만큼, 방금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의미한다. 그것은 노온도, 향단도 알고 있었다.

    노온은 굳은 얼굴로 뒷짐을 진 채 향단에게 다가섰다. 그것만으로 향단에겐 충분히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서 더 두려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 순간을 무마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한 의중 역시 노온은 간파하고 있었다. 해서 노온은 제 발로 들어온 어린양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눈감아주겠다.”

    어린 소녀가 거부하기 어려운 단호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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