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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9화 (29/124)

29화

빛이 조금 어둑한 새벽.

요즘 여러모로 변화하고 있어서인지 피곤함이 짙게 몰려왔는데 그와 달리 잠은 별로 오지 않았다.

결국, 새벽의 공기가 코끝을 건드리기도 전에 기상한 해월은 가만히 앉아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기도 잠시 곧이어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고 밖에 나오자 여름의 미지근한 온기가 전신을 감쌌다.

이제 해가 뜨면 제법 더운 날씨가 되었다. 완전한 여름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찌는 듯한 더위가 이어질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푹푹 찌는 백난국의 한여름을 떠올린 해월은 벌써 지친 얼굴이 되었다.

잠을 못 이룬 자 특유의 졸린 표정이기도 했다.

‘여름이라….’

모든 땅이 푸른 빛으로 덮이고 매미가 천지를 울릴 듯 울고 나면 여름이 끝나겠지.

그럼 이 생활 역시 끝날 것이다. 이렇게 따뜻한 시간이 언제였냐는 듯 사라질 터다.

가을이 오고 겨울을 지나 또다시 봄.

모든 것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속절없이 흐려지고, 사라지고, 잊힐 것이다. 시간이란 그렇다. 아무리 강렬한 기억도 시간 앞에서는 무뎌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다. 해월은 무의식적으로 연진의 방 쪽을 바라보았다.

해월은 방문 너머에 있을 그를 생각했다.

너를 가문의 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렇게 네가 자유로워진다면. 더 이상 내가 너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 될까.

‘부질없어.’

유수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 저는 연진에게서 흐려지고 곧 무의미해질 것이다.

해월은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이내 눈을 감고 짧게 심호흡했다.

“하아….”

혼자만 깨어 있는 것 같은 새벽은 이래서 위험하다. 쓸데없는 마음이 드니까.

해월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무심할 수 있었던… 연진을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항상 마음속 어딘가가 이상하게 꼬여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릴 적부터 남들이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으니까.

오랜 시간 배우고 훈련하여 겨우 그 감정을 익혔을 뿐. 결코 남과 자신이 비슷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불현듯 어린 날에 학경이 했던 말이 떠오른 해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심성은 괴이하니 늘 숨기고 조심하며 살아라. 그게 네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야.’

그 말에 따르고자 부단히도 노력해 왔는데 지금 제 곁엔 무엇이 있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겨우 깨달음을 얻고 고향을 떠나고자 마음먹었음에도 또다시 얽매인 채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텅 빈 손으로 걷고 있는 건 나였어.’

해월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연진의 방문을 열었다. 조금 열린 틈 사이로 소리 없이 들어간 해월은 자고 있는 연진을 쳐다보았다.

도련님은 도련님인지 잘 때조차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는 게 왠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들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시체를 눕혀놨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얌전한 모습이었다.

숙부와 사촌 형의 박대에도 정직한 품성과 예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마도 연진의 본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월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두운 새벽에 보아도 군더더기 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연진과 혼인할 처자는 참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너는 알까.’

느릿한 움직임으로 연진의 뺨을 한 번 쓸어주었다. 부드러운 피부결의 감촉에 손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가여운 도련님에 대한 연민과 흥미, 선학경의 가르침 탓에 타인의 불행을 손쉽게 외면하지 못하게 된 제 성정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에는 그 생각이 달라졌다.

‘그냥 너라서 그런가 봐.’

생김새도 성격도 다르지만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래서 가깝게 여겨졌다.

곤히 잠든 것처럼 보이던 연진이 손을 뻗어 해월의 손목을 잡았다.

“……!”

화들짝 놀란 해월은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커졌다. 그가 깨어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다.

연진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해월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들어와서 무얼 하나 했더니… 이런 음흉한 짓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음, 음흉한 짓이라니!”

솔직히 행동만 놓고 보자면 음흉한 행동이 맞긴 한 터라 해월은 말을 더듬었다. 해월의 격한 반응에 싱거운 웃음을 흘린 연진은 몸을 반쯤 일으켜 그를 마주 보았다.

“어찌 이 시간에 여기 계세요. 혹여 잠이 안 오십니까.”

아직 깨기엔 이른 새벽이었다. 연진은 곧바로 해월의 걱정부터 했다.

그 순간 해월은 알아챘다. 연진이 자신을 신경 써주고 걱정해주는 그 감정을 어느샌가 바라고 있었다는 걸.

가슴 속 어딘가가 술렁였다. 차마 연진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부끄러움인가.

“…응, 잠이 안 와.”

어차피 상관없었다. 잠 못 이루는 새벽은 많았다. 이 또한 익숙한 일이지. 그런데도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저보다 한참은 어린 연진에게.

스승답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향해오는 다정한 눈과 목소리를 원해서, 그리하게 되었다.

어쩐지 제 손목을 잡은 연진의 손힘이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새벽이 안겨준 몽롱한 감각 탓일까. 괜히 묘한 기분이 들어 해월은 재빨리 사과부터 했다.

“미안, 내가 깨웠지.”

“괜찮습니다. 원래 잠에 깊이 못 드는 편이라서요. 사부도 그런 편입니까.”

“자주는 아니고 가끔씩.”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한데 왜 제게로 오셨습니까.”

“그냥 잘 자고 있나 확인도 할 겸….”

매일 보는 사이에 차마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할 순 없어서 해월은 말을 아꼈다. 더 이상 연장자의 체면을 구기기는 싫었다.

자존심을 크게 챙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이 경우는 특수하지 않은가.

해월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연진은 피곤이 묻어있는 그의 눈가를 보곤 타이르듯 말했다.

“그럼 도로 가서 주무세요. 잠을 많이 자야 키가 크지 않겠습니까.”

“뭐? 야!”

해월은 인상을 구기며 빽 소리를 질렀다. 화난 병아리처럼 열을 내는 해월을 물끄러미 보던 연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본 해월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절로 나왔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나 놀리면 그렇게 재밌냐.”

“사부도 절 놀리는 게 재밌으시다면서요. 저는 놀리면 아니 됩니까.”

여기서 더 뭐라고 하자니 적반하장이 되는 것 같아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됐다, 그래. 어쨌든 깨워서 미안하고 이만 갈 테니 너도 어서 자.”

해월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연진의 이마를 검지로 한 번 톡 쳤다. 연진은 나서려던 해월을 향해 말했다.

“거짓말.”

“…….”

“어차피 나가서 안 주무실 거 다 압니다.”

“…내가 귀신도 속인 적 있는 사람인데 너 하나를 못 속이네.”

해월은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농담이었으나 뼈가 있는 말이었다. 원복이 향단을 좋아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둔감했으면서, 이럴 땐 의외로 기민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야말로 귀신 보기 전에 얼른 자. 영력을 잘못 다루면 괜히 영안만 트여서 귀신한테 시달리게 되는 거 알지?”

“겁주셔도 소용없습니다. 귀신보다 산 사람이 훨씬 무서우니까요.”

해월도 이에 수긍했다.

“뭐, 정확히는 산 사람에 가까운 귀신이 더 무섭지.”

“산 사람에 가까운 귀신이요?”

“일전에도 얘기한 적 있었잖아. 대부분의 귀신은 음험하긴 해도 멀쩡한 인간한테는 특별한 해악을 못 끼쳐. 근데 삶에 대한 집념이나 원념이 강한 귀신은… 꽤 재미없는 꼴을 보게 되지.”

‘재미없다’라는 표현은 곧 ‘참혹하다’라는 의미였다.

본래 삿된 것들이 그러했다. 사람이 아님에도 산 사람보다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들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였다.

“끔찍하게 죽은 경우라면 더욱더 그렇고. 웬만해선 볼 일 없겠지만 겁 좀 먹어야 할걸? 나중에 보게 되면 무서워서 숨도 못 쉴 거야.”

“그렇게 겁주시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연진은 그의 말이 과장되었다 단정 짓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연진은 한 번도 한주 땅 밖의 상황을 본 적 없으니 말이다.

거듭된 전쟁으로 온갖 원념이 깃든 이 땅은 더는 산 사람의 것이라 부르기 어려웠다. 신궁의 정화를 받거나 어떠한 방법으로든 조치하지 못한다면 끊임없는 고역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백성들의 삶이었다.

“잡담은 이쯤하고 얼른 자자. 난 마당에서 산책이나 할 테니까 괘념치 말고.”

***

원복의 시름은 전보다 깊어졌다. 왜냐하면 바로 눈앞에서 해월이 사과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놀린 건 미안했어. 내가 사과할게.”

어리다 하여 모르지 않았다. 원복은 해월의 친절하고 장난스러운 태도에서 묘한 벽을 느꼈다. 적어도 그의 본모습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계속 삐진 눈치라서 사과했는데 왜 이리 떨떠름한 얼굴일까.”

“…예상 못 했으니까 그러지요. 귀빈께선 신경도 안 쓰셨잖아요.”

부모님의 일로 해월에게 감사했던 것과 별개였다.

“아무튼 내가 미안했어. 어린아이의 연심이라 해서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 건데.”

“…괜찮습니다.”

“그럼 사과받아주는 걸로 알고 난 이만 네 도련님한테 간다.”

원복은 별채 안쪽으로 멀어지는 그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어쩐지,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더니 도련님이 시킨 게 분명하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쉽긴 했지만 원복은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마당을 쓸러 갔다. 마당에는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향단이 있었다. 그녀는 화단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원복은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향단아, 내가 좀 도와줄까?”

향단은 어쩐지 조금 상기된 낯빛이었다.

“어? 어….”

원복은 몰랐다. 향단이 하얗게 질린 이유가 조금 전 이곳을 지나간 해월 때문이라는걸.

그저 더운 날씨 탓이라 여긴 원복은 그녀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향단은 어색하게 웃으며 원복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원복은 어색하게 구는 향단에게 개의치 않고 말을 붙였다. 자꾸 어색한 분위기를 이어가봤자 손해는 자신의 몫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때… 향단아?”

“…….”

어느 순간 그녀가 전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원복이 그녀를 불렀다.

“혹시 어디 안 좋아? 안색이….”

“아, 아니야. 좀 더워서 그래. 어… 그보다 원복아. 귀빈 말이야….”

모처럼 향단의 입에서 먼저 나온 얘기가 하필 해월의 얘기라 탐탁지 않긴 했지만, 원복은 귀를 기울였다.

“무척 강하신 분이라며…? 어느 정도로 강한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

“음, 내가 무예나 퇴마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모르는 이가 봐도 뛰어날 정도야.”

원복은 솔직하게 해월의 실력을 인정했다.

무인 가문인 강 씨 세가에서 일하며 눈으로 무예를 익혔기에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있었다.

해월이 연진에게 무예를 알려주는 모습을 보곤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해월은 몸을 다루는 것에 능수능란한 사람이었다.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답을 하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원복이 말을 덧붙였다.

“근데 몸이 좀 허약하셔.”

“…허약하시다고?”

“응. 지난번에 고뿔로 쓰러지신 적도 있고… 전에는 코피를 샘물처럼 쏟으신 적도 있는걸.”

“…그렇구나.”

향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조금 전과 달리했다.

그 작은 변화를 원복이 알아챌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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