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해월은 제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사사로운 인연과 정은 애초부터 안 만드는 것이 좋았다. 다시 돌아올 수도 없으면서 연을 맺는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에겐 길고 깊게 이어진 인연이 거의 없었다.
연진은 그런 해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월은 종종 미래에 관해 얘기했으나, 그 어디에서도 제가 함께한다는 미래는 없었다.
“여길 떠나더라도 언젠가 다시 오면 안 되는 겁니까.”
“…미안.”
돌아오는 건 거절이었다. 일순, 연진의 표정이 굳었다.
“오고 싶어도 못 올 거야.”
남은 미련을 완전히 잘라 내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시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혹시 제가… 못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까.”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해월은 연진의 걱정 많은 성격이 염려스러웠다.
“아니야. 그런 건.”
해월은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힘없는 도련님이라서가 아니라, 이건 순전히 내 문제야.”
“…….”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언젠가… 언젠가 알려 줄게.”
또 다.
책임지지 못 할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연진이 서운해할까 봐 사족을 붙였다. 정말 통제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후회했으나 이미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월의 말에 연진은 눈에 띄게 반색했다.
“알겠습니다.”
해월은 그저 연진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 연진의 밝은 얼굴을 보니 뭐 이대로도 나쁠 건 없겠다 싶었다.
삶에는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
해월은 연진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유시간이 많았다.
영력을 수련하는 것은 분명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들인 시간만큼 결과가 나오는 일이 아니기에 무턱대고 시간을 쓰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몰아붙이면 더 안 될 수도 있으므로 여유 있게 수련을 진행하는 터라 비어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항상 바쁘게 움직이기만 했었기에 한가롭게 보내는 시간이 적응되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다.
물론 그런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 흠이지만.
향단의 정체를 간파하고 난 뒤로 줄곧 신경에 거슬렸다. 어째 편한 길을 가려다 되레 엄한 길을 가게 된 기분이었다.
어쨌든 저는 지금 연진의 사부로 있고, 이 일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제가 무엇이든 일단 제가 연진에게 흥미를 느꼈다는 이유로 이리 얽혀 버린 것이 아닌가.
해월은 짬짬이 외출하며 바깥 동태를 살폈다.
‘강석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인물이군.’
아무리 막돼먹었다지만, 친족을 정당한 이유 없이 살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경쟁자들에게 그럴싸한 죄명을 갖다 붙여 지방으로 유배 보내거나, 은밀하게 죽이는 것이다.
조카를 해하려는 일에 어린 소녀를 보내다니. 어리석은 건지 급했던 건지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별관에서 매일같이 잔치판을 벌이는 것을 보면 참 배짱이 두둑하단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어리면 대개 방심하기 마련이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린 연진의 곁에 있는 해월은 방심하고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사주를 받은 자에게 악의가 없어도, 심지어는 어린아이라 해도, 원하는 바에 방해가 된다면 주저 없이 제거할 것이다.
***
왁자지껄했던 며칠 전의 풍경이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연진 본인은 원체 말수가 많지 않아, 해월과 원복이 없으면 이곳 별채는 적막에 젖게 된다.
‘조금은 소란스러운 것도 좋은 법이지.’
언젠가 해월이 했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조금 소란스러운 것도 좋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것을 선호하는 성향이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해월이 실없는 소리를 하면 원복은 그게 뭐냐며 따져 묻고, 자신은 피식 웃는. 그런 상황이 그리웠다. 마음이 기쁘다는 것이 그런 걸 의미하는 걸까.
평화롭고 조금은 떠들썩하고 또 이상하기도 한 그때의 나날들이 오래가길 바라게 되었다.
원복과 해월의 일도 훗날 되돌아보았을 때 그저 웃고 지나갈 정도의 일이 되겠지.
그러기 위해선 다정하면서도 냉정한, 제 이상한 사부를 만나야 했다.
매일 보는 사이에 굳이 찾아서 본다는 것은 어쩌면 약간의 사심이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해월에게 찾아가서 원복의 일에 대해 말하고, 또 사소한 대화를 나누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든 연진의 입가에 어느새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꽃이 진 봄날임에도 꼭 한창때의 봄처럼 포근한 미소였다.
***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연진이 해월의 방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날마다 보는 사이지만 반가운 마음 반, 당황스러운 마음 반이었다. 하필이면 한참 좋지 않은 생각을 하던 와중인 까닭이다. 무언가 들킨 기분이었다.
“원복이 일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
향단의 속내를 알 길 없는 원복은 해월 때문에 자기들 사이가 어색해지고 틀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해월도 원복이 그리 생각하고 삐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응? 아, 설마 또 사과하라고 하려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연진은 원복을 아끼니 그 아이의 마음이 하루빨리 풀리길 바랄 것이다.
“맞습니다. 설마 사부께서 며칠이 지나도 사과를 안 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참 유감입니다.”
제자가 대놓고 눈치를 주자 해월은 천연덕스럽게 응했다.
“난 딱히 잘못한 게 없는걸. 그리고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애들은 금방 잊는다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그 아이 마음에 상처가 남으면 어쩌시렵니까.”
“지금은 상처받아도 돼. 나중에 더 상처받기 싫으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비밀이야.”
해월이 눈을 찡긋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복이한테 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네 도련님을 해치러 왔다는 얘기를 어떻게 하냐….’
솔직히 처음에는 향단이 저를 해치려는 줄 알았다. 그런 오해를 할 정도로 향단은 제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자 향단의 궁극적인 목표가 연진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당연했다. 저를 해쳐 봤자 땡전 한 푼 나오지 않을 테니.
이러한 사실은 원복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그 정도로 배려심이 없지는 않기에 이 일은 철저히 저만이 알고 있을 생각이다.
원복은 물론이고 연진에게도 알리거나 상의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해결하는 것이 익숙하니 달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어쨌든 내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너무 신경 쓰지 마.”
연진은 작게 한숨짓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그냥 뭐… 생각 정리.”
“생각 정리요?”
“나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계획을 해야 하니까.”
거짓말이었지만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지 고민 중이었으니까.
이것도 미래에 대한 계획이라면 계획이다.
“…사부가 계획을 세워요?”
해월의 행동은 워낙 종잡기 어렵고 즉흥적인 구석이 많은 터라 연진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딱히 할 일을 정해 두지 않으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생각 없이 산다는 말을 참 대놓고 한다.”
“…….”
침묵은 곧 긍정을 의미한다. 해월은 어쩐지 살짝 짜증이 느껴졌지만 그러려니 했다. 연진의 입장에서 자신은 정말 되는대로 사는 듯 보일 테니까.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고향에 돌아가실 날도 머지않았군요.”
“그래도 아직은 꽤 남았지. 걱정하지 마. 너 수련시키는 일은 소홀히 안 할 테니까.”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뭘 걱정하는데?”
“저는….”
무언가 말하려던 연진은 이내 주먹을 말아쥐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머릿속에서 할 말을 찾은 듯 고개를 들었다.
“고향에 가면 무얼 하실 겁니까.”
“글쎄? 예전과 똑같겠지. 잠시 들러 아버지께 안부도 여쭙고, 게다가 가면 할 일이 많이 쌓여 있을 거야.”
마을 꼬맹이 글공부도 봐줘야 하고, 땅도 정화해야 하고,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그 일을 다 하면 제게 주어진 시간은 전부 소모될 것이다.
그런데 해월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에 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냉랭한 낯빛이 되었다.
“…아무리 친아들이 아니라지만, 자기 아들을 매질하는 분을 어찌….”
“에이, 됐네요. 난 괜찮다니까 그러네.”
연진의 뒷말을 예상하고 재빨리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연진은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해월이 어물쩍 넘어가려 하자 이에 순응했다.
많이 참고 있는 듯 보이는 연진을 향해 해월은 살포시 웃었다.
“넌 너 하나 생각하기도 바쁜데 남 생각을 왜 이리하는 거야. 난 신경 쓰지 말래도.”
“저는 남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부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그러셨어요?”
장난스레 응수했다. 반면 연진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리 온 김에 약이나 바르시지요.”
연진이 소매에서 약과 천을 꺼내었다. 그것을 본 해월은 질색하는 얼굴이 되었다.
다리의 흉은 어차피 사라지기 어렵다고 누차 얘기했건만, 연진은 꿋꿋하게 약을 발라 주려 했고 해월은 늘 그걸 피해 다녔다.
언젠가 탕약을 가지고 씨름하던 그때와 비슷했다. 쫓고 쫓기지만 언제나 쫓기는 자의 패배였다.
우직한 자세로 자신을 쳐다보는 연진에게 이내 항복한 해월은 가만히 앉아 그에게 다리를 맡겼다.
연진은 궂은일은 조금도 해 본 적이 없는 듯 보이면서도 이런 일에 능숙하게 행동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바짓단을 걷어올리고 천천히 약을 발랐다. 그 손길이 묘하게 간질거려 단전이 울렁이기까지 했다.
연진이 해월의 다리에 천을 감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리가 가늘어서 천이 남습니다.”
“그런가? 워낙 많이 움직여서 그런지 살이 잘 안 붙나 봐.”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인 말이었다.
“평소에 그리 많이 드시는 것 치고는 마른 편이신 것 같습니다.”
해월은 군살 하나 없이 늘씬한 체격이었다. 하여 일견 약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탓에 견고해 보이기도 했다.
“너도 먹을 게 귀해 봐라. 걸신이 안 붙을 수가 있나.”
“저 허기 잘 참습니다.”
“예예. 그러시겠지요,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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