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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7화 (27/124)

27화

향단이 간식 상을 내왔다.

그런데 해월은 어째서인지 그것마저 깨작거리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가 먹지 않고 있으니 연진도 편히 수저를 들지 못했다.

어쨌거나 해월의 식성을 잘 아는 연진과 원복은 저절로 기함했다.

“귀빈,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야….”

해월이 손사래를 쳤다.

“미안해, 오늘은 먼저 들어갈게.”

“그리하십시오.”

연진은 얼른 수락했다. 보통 저녁에는 영력의 이론에 관한 강론을 하지만 오늘은 해월의 상태가 심상치 않으니 파하는 것이 옳았다.

“향단아 귀빈의 방을 정리해 드리자.”

“응, 알겠어.”

원복과 향단 역시 분주해졌다.

해월은 혼란을 느꼈다.

너무 이상해서였다. 아까부터 심장이 북을 치듯 울려 대서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달리기를 한 것도 아니고, 숨을 오랫동안 참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이리 펄떡대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얼굴도 좀 상기된 듯했다. 혹시 이 얼굴을 들킬까 봐 고개를 처박고 있었더니 목이 다 뻐근했다.

해월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짧은 머리카락이 작은 손 틈새로 결을 그리며 흩날렸다.

“설마 심동계(心動悸, 가슴이 떨리고 불안한 증)인가….”

기혈이 막혀 있긴 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방심한 사이 병을 키운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한없이 냉랭한 눈초리로 창가 쪽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창밖의 담장 너머를 바라본 것이었다.

해월의 직감이 맞다면 오늘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누군가 저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시선은 해월과 연진이 함께 있을 때 유독 도드라졌다.

‘강석요인가? 아니면 다른 세력?’

지금으로서는 강석요라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벌써 강씨 세가 본관은 물론이고 한주 전체에 연진이 광인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강석요의 입장에서는 어지간히 초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기를 꺾어 눌러놓으려 했던 조카가 성장의 기미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들의 본 목적을 알 길은 없다. 그러니 해월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귀빈, 저희 들어가겠습니다.”

“…응, 들어와.”

때마침 해월의 방에 원복과 향단이 들어왔다.

해월은 방금까지의 무표정한 얼굴은 싹 지우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원복아, 미안한데 너희 도련님 방에서 책 좀 가져다줄래?”

“무슨 책이요?”

“네 도련님한테 낮에 읽던 책이라고 하면 될 거야.”

“예, 귀빈.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원복은 씩씩하게 답하며 방을 나섰다. 향단은 미묘하게 어색한 태도를 보이며 잠자리를 정돈해 주었다.

해월은 그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향단아.”

“…예, 귀빈.”

“명목상 일손이 부족해서라고는 했지만, 너를 이 별채의 하인으로 들인 건 순전히 원복이를 위해서야. 그 아이가 또래와 어울릴 시간이 부족한 듯하여서.”

덧붙여 해월 본인이 떠났을 때, 이 별채가 너무 조용하지 않길 바라서였다.

연진이 조금은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길 원해서.

“…예, 알고 있습니다.”

물론 향단이 이 본의를 알 리는 없었다. 따라서 해월은 느긋한 자세를 취했다.

“날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너희 도련님의 사부가 되었다고 해서 내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잖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왜 내 앞에만 서면 이리 손을 떨까 해서 그러지.”

해월은 향단의 떨리는 손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그 시선이 닿자 향단은 움찔거리며 손을 뒤로 감추었다.

해월은 싱긋 웃었다. 그러나 눈은 결코 웃지 않았다.

그 서늘한 눈초리를 받은 향단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윗분을 가까이서 모신 것이 처음이라….”

“그냥 어려워하지 말라는 얘기야. 나도 너희랑 신분이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귀빈 대접받으려니 부담스러워서.”

“…….”

“네가 경거망동하지 않는 한, 널 안 좋게 볼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며 덧붙이는 미소가 무척이나 시렸다.

해월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 또는 연진을 해치기 위해 사람을 보낼 것이라는 걸.

별채에 새 하인을 들이는 일은 미끼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미끼는 월척이었다. 이렇게 어린 소녀일 줄은 몰랐지만.

이 때문에 해월은 의심의 끈을 잠깐 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향단은 연진과 해월의 앞에서 소개를 할 때부터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긴장을 드러냈다.

게다가 상을 차리는 향단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옅은 향내. 해월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음식에서는 그것의 맛이 느껴지지 않아 구태여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어리숙한 아이라 다행인가.’

적어도 능숙한 자객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유일한 다행이었다. 자객을 보냈다 한들 털끝 하나 건들 수 없을 테지만.

어린 소녀를 겁박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경고는 해두는 것이 좋았다.

마주한 향단의 눈동자는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대답해.”

입술을 파르르 떠는 향단을 보며 해월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조적인 의미가 섞여 있었다.

‘쯧쯧.’

향단과 자신은 아무래도 귀족 가문의 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될 처지였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이 어린 것까지 휘말리다니. 참 기구한 팔자였다. 그러나 순순히 당해 줄 수는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왔는데 이깟 가벼운 위험 하나 못 넘길 그가 아니었다.

그저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해월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만 겉으로는 견고한 자세를 취했다.

향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음성을 내었다간 속절없이 떨리는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였다.

해월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직 향단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생사람을 잡고 있는 것일지 모르니 관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이만 가봐.”

“…예, 귀빈.”

향단이 뒤돌아서 문을 열자마자 원복이 책을 가지고 들어왔다.

향단은 어서 나가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원복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이상해서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향단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어찌 저리 급히 가요?”

“글쎄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얼굴도 좀 빨간 것 같던데….”

원복이 걱정스레 향단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해월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원복이 네가 향단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니 저리 부끄러워하네.”

“예? 어, 어찌 그런!”

원복은 전에 없이 목소리를 크게 냈다.

“그, 그런 거짓말로 애를 놀리면 어떡해요, 귀빈!”

원복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해월은 키득거리며 놀림조로 말을 이었다.

“뭐 어때, 사실이잖니.”

“사실은 무슨 사실이요! 저 향단이 좋아하는 것 아닙니다!”

원복이 부정해 보았지만, 당연히 믿을 리가 없었다. 원복이 향단을 보는 눈빛에 분홍색이 가득했는데 누가 그 말을 믿을쏘냐.

“그래, 그래 네 말이 전부 맞단다.”

완벽하게 아이를 달래는 어투였다.

“귀빈!”

원복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자 해월은 얄밉도록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는 뜻을 전했다.

원복은 할 수 없이 분을 삭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해월은 이불 위에 벌러덩 누워 방금 원복이 가져온 책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역시 넌 복이 없는 놈이구나. 원복아.”

하필 연심을 품은 소녀가 모시던 도련님을 위협하는 존재라니. 참으로 안타까워서 싱거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박복해도 어찌 저리 박복할 수가.

“나도 다복한 놈은 아니니 네게 무어라 할 자격이 없구나.”

이 평화로운 시간이 길지 않을 것이란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확인받게 되니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래서 안정 같은 것을 느끼면 안 된다. 미련없는 사람에게도 자꾸 헛꿈을 꾸게 하니까.

우습게도 또다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식사를 하고, 따뜻한 사람의 옆에 머물며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모두 한낱 춘몽에 불과한 착각이었다.

‘내게 이런 곳은 어울리지 않아.’

해월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손끝에 닿는 공기가 미지근했다. 봄이 끝나 가고 있었다.

***

“원복이에게 먼저 사과하십시오. 타인을 연모하는 마음을 놀리는 건 그릇된 겁니다.”

“예, 예. 알아서 사과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도련님.”

해월이 장난스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근데 어린 애들이 연모에 대해서 뭘 알겠어. 한참 지나서 돌아보면 기억도 제대로 안 날 텐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흐릿해져. 너도 한 십 년쯤 지나면 나랑 있었던 일 하나도 기억 못 할걸?”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연진은 단호히 답했다.

“에이, 말은 고맙다만. 당장 너 여덟 살 때 일 자세히 기억나는 거 있어?”

“그건….”

연진은 할 말을 잃었다.

“거봐. 시간 지나면 전부 잊게 되어 있어.”

물론 정례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때론 찰나의 기억이 여생을 지배하기도 하니까. 해월이 양아버지인 선학경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 해도 해월의 눈엔 원복의 연심이 소년 시절의 풋사랑으로밖에 안 보였다. 마냥 풋풋하다기엔 조금 쓰린 내막이 있었지만.

“…제가 사부에 대해 안 잊으면요.”

연진은 해월의 말에 반의를 드러냈다.

“응?”

“안 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안 잊더라도… 내가 그걸 알 방법이 없으니 무용하겠지.”

사뭇 씁쓸한 음성이었다. 아니, 쓸쓸하게 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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