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무리 훈련이라지만 눈을 가린 상대에게 달려들라니. 연진의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주먹질하든, 발차기하든 괜찮으니까 얼른 덤벼.”
재촉이 이어지자 연진은 마지못해 해월에게로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무의미할 정도로 약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특별히 몸이 날쌘 편이 아님에도 타고나길 체격이 좋아서 웬만한 이들에게 굴할 기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력을 체화한 상태인 해월은 연진의 움직임을 단숨에 간파했다. 눈앞은 암흑뿐이었으나 발끝에서 느껴지는 땅의 울림, 손끝을 스치는 바람, 귓가에 들리는 공기의 파장이 선명했다.
‘바로 앞에서 왼쪽 주먹이군.’
해월은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연진의 빈틈을 파고들어 순식간에 그의 목에 손날을 댔다.
“윽…!”
“이렇게 되면 당하는 거지. 만일 내 손에 칼이라도 있었음 죽는 거야.”
“…….”
“다시 해 봐.”
“예.”
그 뒤로도 몇 번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해월은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연진이 어디에서 어떤 공격을 하는지 전부 알아채고 매끄럽게 피했다. 연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겨워했다. 체격은 건장한 편이었으나 아무래도 몸을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해월은 안대를 풀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영력을 체화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 오감 중 하나가 막혀 있더라도 보완할 수 있고 오히려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게 돼.”
가끔 조절이 안 되면 너무 예민해져서 탈이지만, 영력을 체화한다는 건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저는 그 경지에 도달하기엔 아직 이른 것 같군요.”
“당연하지.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영력을 수련해 왔는걸.”
자신을 높이는 어투가 아니었다. 해월은 그저 사실만을 말했다. 어릴 적부터 쉴 틈 없이 수련해 왔다. 그렇기에 능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맞아가며 수련했다. 어떨 때는 차라리 노역장에 팔리는 것이 나았을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선학경의 매질은 몹시 매워서 해월은 맞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했다. 때문에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어?”
해월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누군가 제게 힘드냐고 물어본 것이 처음이어서.
아버지 선학경도, 아니 다른 누구도 제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저는 무엇이든 잘 해내 왔고, 그 모습을 본 누구도 안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 의문은 없었다.
자신은 강했고 다른 이의 걱정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런 것이 달갑지 않기도 했고.
“…힘들게 뭐 있었겠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얼른 점심이나 먹자, 배고프다.”
해월은 괜히 답을 얼버무리며 걸음을 옮겼다. 연진은 멀찍이 사라지는 해월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거의 혼자서만 일을 해 왔던 원복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생겨 기분이 좋았다. 물론 같이 일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열셋의 소년, 풋풋한 사랑을 하기 좋은 나이였다.
향단과 원복은 함께 식사를 준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복의 얼굴에는 싱글벙글한 웃음이 가득했다.
“이 저택에서 오래 일했는데 도련님을 가까이서 뵌 건 처음인 것 같아.”
“우리 도련님은 별채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무니까.”
“…근데 저번에 외출하셨다는 소식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 일이었어?”
“아, 그거 귀빈께서 도련님을 데리고 나가신 거야. 안 그렇게 보여도 귀빈이 무척 막무가내셔서….”
원복은 괜히 주위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해월은 어딜 다니든 기척을 내지 않는 편이라 혹시 엿들을까 봐서였다.
귀빈은 순하고 곱상한 외모와 달리 즉흥적이고, 앞뒤를 재지 않는 행동을 종종 했다. 원복은 처음엔 그런 그를 황당해했지만, 이젠 완전히 적응된 상태였다.
향단은 상차림을 마저 준비하며 말을 붙였다.
“도련님께서 귀빈을 좋아하시나 봐.”
“맞아. 솔직히 우리 도련님이 저렇게 편해 보이는 모습 처음 봤어.”
원복은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귀빈께서는 무척 좋으신 분이야.”
원복은 부모님의 기일에 향을 피우던 일을 떠올렸다.
여느 때처럼 부모님의 무덤 앞에 앉아 멍하니 향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해월이 원복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말없이 향을 올리고 두 손을 맞댄 채 기도했다.
“귀빈…?”
그 부름에 가늘게 눈을 뜬 해월은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게 죽상하고 있지 마. 너희 부모님이 아직도 천도하지 못하고 계시잖아.”
“……!”
원복은 화들짝 놀라 해월이 보고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원복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계신 거예요?”
“귀신이 이승에 오래 머물면 안 좋아. 그러니 얼른 마음 편하게 해 드려.”
해월의 말은 믿기 어려운 것투성이였으나 원복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 제게 무슨 말씀이라도 전해 주실 수 없나요?”
“…영력도 없는 네가 사자의 말을 전해 들었다간 음기가 쌓일 거야. 그러니 안 돼.”
해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단순히 전해 듣는 것뿐이면 별 탈 없겠지만, 그 귀신이 혈육인데다 주기적으로 무덤에 방문했다면 알게 모르게 몸에 음기가 쌓였을 것이다.
거기에다 더 가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다 해월은 귀신과 대화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이들을 여럿 보았다.
한 번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그러니 잘라 내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원복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리고 귀신은 의식이 흐리고 기억이 옅어서 그저 원념만 남은 상태가 대다수이다. 게다가 여기에 있는 원복의 부모님 혼도 사실상 잔재만 남은 상태였다.
해서 일반적인 의미의 소통을 하기 어려웠다. 이런 사실들을 원복에게 들려주면 실망할까
봐 해월은 말을 아꼈다. 그러니 이것은 원복이의 시름을 덜어 주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당연히 원복은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한마디라도 좋으니 전해 주시면 안 돼요? 예?”
“너 음기가 얼마나 사람 몸에 해로운지 모르지? 세상 빨리 하직해서 부모님 뵙게 되면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냉소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원복을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이었다.
“그럼….”
원복은 하는 수 없이 부모님을 안심시킬 말을 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가만히 응시한 원복은 말을 이었다.
“…저는 밥도 잘 먹고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모시는 도련님도, 여기 귀빈께서도 다들 좋으신 분이에요. 그러니 더는 걱정하지 마세요.”
원복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해월은 말없이 그 얼굴을 닦아 주었다.
원복은 한참이 지나서야 슬픔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잘 가셨을까요?”
“웃으며 떠나셨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
해월은 담담한 위로를 전했다.
원복은 그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부모님의 영혼이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마음속 응어리는 덜어 내었다.
“너는 귀빈을 무척 좋아하는구나.”
“응, 좋은 분이시니까. 오래 머물면 좋겠지만, 길어도 석 달 정도밖에 안 계신댔어. 아마 가을 즈음엔 여기에 없으실 거야.”
“그래?”
상차림을 준비를 마친 원복은 문간을 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향단아, 후식은 꼭 단것으로 준비해야 해.”
“응?”
“귀빈께서 단것을 무척 좋아하시거든. 밥 먹으면 단것을 꼭 먹어 줘야 한다나 뭐라나. 어쩌다 보니 도련님도 말려들어서 단것을 후식 삼는 게 일상이 됐지 뭐야.”
“알겠어. 준비해 놓을게.”
향단은 웃으며 답했다. 이에 안심한 원복은 얼른 상을 들고 별채로 향했다.
원복만큼은 아니지만, 향단도 강씨 세가에서 오래 일했기에 후식을 만드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었다.
부엌에 홀로 남은 향단은 떨리는 손으로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정체 모를 흰 가루가 들어 있는 분첩이었다.
찬장을 열어 간식이 있는 것을 확인한 향단은 상차림을 준비했다. 손에 미세한 떨림이 가득했다.
정갈하게 준비된 간식 상을 쳐다본 향단은 말없이 한숨 쉬었다.
“하아….”
향단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
점심을 먹는 내내 해월은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반찬이 맛있네, 국은 어떠네 하면서 재잘재잘 말을 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왜인지 조용했다.
뿐만 아니라 먹는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땅속으로 파고들 기세였다.
그런 그의 변화를 주위에서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연진은 평소 식사 중에 말하는 법이 거의 없으나 이번만큼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답변이 지나치게 간결하고 딱딱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더 이상한 것이 있었다.
평소 해월은 대식가로 절대 찬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더 먹었으면 더 먹었지, 덜 먹는 예는 없었단 이야기다.
그런데 해월이 밥을 무려 반 공기나 남겼다.
고뿔로 잔병치레했을 때도 먹는 것만큼은 황소 같았던 해월이다. 그런 그가 소식하자 연진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 적게 먹으면 조금 있다 배고프지 않겠습니까.”
“미안, 입맛이 없어서.”
해월도 자신의 행동이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입맛이 사라져 본 적은 거의 없었기에 기분이 참 이상했다.
“후식이라도 많이 드십시오.”
“응, 그래야겠어.”
그나마 단것을 떠올리니 입안에 군침이 감돌았다.
밥을 먹고 곧바로 후식을 먹는 일은 순전히 해월 때문에 생긴 일정이었다. 연진은 원체 많이 먹는 유형이 아니었고, 단것을 즐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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