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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5화 (25/124)
  • 25화

    선학경은 주술사였던 만큼 영력과 사술을 다루는 데 능했고 해월은 어릴 적부터 그것들을 접하며 살았다.

    퇴마사로서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 이후로는 퇴마 일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실력이 알려지고 점차 많은 의뢰가 들어와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었으나, 그 돈은 전부 단곡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단곡은 해월에게 고향이자 유일무이한 곳이었다.

    그런 그곳을 떠나겠다 결심했을 때는 ‘그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무작정 짐을 싸고 마을을 나서려던 저를 선학경이 붙잡기 전까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결심했었다.

    평생을 박하게만 대했던 아버지가 저를 붙잡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백난국 각지를 떠돌면서도 고향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내게 미래란 것이 있나.’

    계속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보은하고 그들의 안위만을 위하다가 결국 예상했던 결과에 이르지 않을까.

    해월은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상정하고 있었다.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을 순차적으로 떠올려 보지만 언제나 그렇듯 정답을 찾을 리는 없었다.

    ‘어차피 그래도 상관없나….’

    선학경이 아니었다면 그 야산에서 죽었을 것이다. 지금껏 생을 이어온 것은 전부 그의 덕이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거저 얻은 삶이니, 무의미하게 취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연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런 불공평한 일을 누가 무슨 권리로 정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러니 불만을 느껴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

    어차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 갈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대를 품으면 실망은 자연히 뒤따르는 것이다.

    실망이라는 감정은 쉽게 절망으로 이어진다. 해월은 희망을 품지 않았고, 그렇다고 절망을 맛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 최선이다. 무념에 도달하여 얻은 마음의 고요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침전하면 그만이다.

    “…난 괜찮아.”

    해월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

    여느 때처럼 함께 마루에 앉아 있던 해월은 연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하문하십시오.”

    연진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동안 왜 원복이만 가까이했던 거야? 다른 하인들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 몇몇 있었는데.”

    해월은 연진에게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지만, 개중 그나마 가벼운 것을 골라 입에 올렸다.

    “…제 하인을 고를 당시에 있던 이들 중에 원복이가 가장 어려서였습니다.”

    “나이 어린 게 무슨 장점이 있다고? 다른 이들보다 일을 못 하면 못 했지, 잘하진 않을 거 아니야.”

    “적어도 나이가 많은 이들보다는 순수할 테니까요.”

    연진은 아이의 순수함에 가치를 둔 것이었다. 해월은 그런 연진의 결정을 이해했다.

    인간의 순수성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지만, 그래도 아이가 세상의 때가 가장 덜 묻은 존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연진은 가장 어린, 순수한 하인을 들여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고자 했을 것이다.

    나이보다는 기본적인 인성의 문제이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원복이는 좋은 아이니까.

    일리 있는 선택이자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네 말이 맞아. 아이는 순수하지….”

    “근데 새로 온다는 아이는 누굴까. 듣기론 원복이랑 친한 하인이라는데.”

    “저도 다른 하인들과 달리 교류가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원복이랑 친밀하다 하니 괜찮은 하인일 겁니다.”

    그들은 원복을 배려해 함께 일하고 싶은 하인이 있거든 누구든 데려오라 했었다.

    사실 해월은 누군가에게 보살핌받거나 도움받는 일이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냥 혼자 하는 것이 편했다.

    그냥 고생하고 있는 원복이가 안쓰러워서 내린 결정이었다. 적어도 해월이 머무는 석 달간은 편히 지내길 바라서.

    그들은 원복을 믿는 만큼 원복이 괜찮은 이를 데려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원복이 때마침 누군가를 이끌고 별채에 들어왔다.

    “귀빈, 도련님. 저 왔습니다.”

    연진과 해월은 동시에 할 말을 잃고 원복과 그 뒤편에 있는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또래 하인을 데려올 거란 생각은 했으나, 여자아이를 데려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원복은 싱글벙글 웃으며 제 뒤에 서서 쭈뼛거리는 여자아이를 소개했다.

    “오늘부터 귀빈의 수발을 들 제 친우입니다.”

    “향, 향단이라고 합니다. 원복이와는 같은 나이입니다.”

    향단은 말을 더듬거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해월은 헤실거리며 웃는 원복과 낯을 가리는 듯 고개를 숙인 향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이후로 가장 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원복을 보니 답은 하나였다.

    ‘마음대로 데려오라 하긴 했지만… 너무 사심이 가득한 거 아닌가.’

    해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으며 이만 가 보라고 말했다.

    향단과 원복은 하인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좋을 때다….”

    해월은 그들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치며 뒤로 누웠다.

    “무엇이 좋을 때란 말입니까?”

    연진의 질문에 해월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너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예?”

    “하아….”

    해월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딱 보면 몰라? 원복이가 향단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대체 어딜 봐서 그렇다는 겁니까.”

    연진은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답답한 마음에 조금 높아진 음성을 냈다.

    “원복이 눈이 전에 없이 반짝거리는 거 못 봤어? 활기가 막 돌잖아.”

    해월은 손으로 반짝거리는 시늉을 하며 설명했다. 그럼에도 연진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긴 했습니다만… 그게 그런 이유가 되는 겁니까.”

    “됐다, 너랑 이런 얘길 하는 내가 잘못이지.”

    아무리 설명해도 연진은 모를 것 같아 빠르게 단념했다. 그 단념이 연진은 못마땅했는지 표정이 영 불만스러워 보였다.

    해월은 괜스레 연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어딜 사부 앞에서 그리 뚱한 표정이실까.”

    “그런 표정이었던 적 없습니다.”

    “에헤이, 발뺌하기는.”

    해월은 장난스레 웃고는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응시했다. 연진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해월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텅 빈 마당뿐.

    문득, 연진은 해월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해월의 입가에 아스라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흐릿하고 묘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그냥, 새삼 평화롭다 싶어서.”

    해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다.

    귀신을 제령하고 요괴를 없애며 생사를 오고 가지도 않았고, 배를 곯지도, 얼음장 같은 날씨에 노숙하지도 않았다.

    봄을 온전히 봄으로 누린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계절의 변화에도 둔감할 정도로 해월은 바쁘게 살아왔다. 몸도 마음도 늘 여유가 없었다.

    작금의 안정적인 시간은 되레 해월에게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불안정 속에서 살아온 인간은 안정을 두려워한다. 해월은 이따금 찾아오는 불안을 잠재울 줄 몰랐다.

    ‘울화 같은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해월은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연진이 걱정할까 봐 말을 돌리긴 했었으나, 자신의 기혈이 막혀 있다는 것쯤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난 화가 난 걸까.’

    우습게도 해월은 제 감정을 몰랐다. 정확히 무얼 하고 싶은지, 어딜 가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냥 떠밀리는 대로 떠밀리고, 흘러가길 반복해 왔다. 그 삶에 이렇다 할 불만은 없었다.

    그게 제게 주어진 삶이라면 그냥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그 욕망을 제어 당한 뒤로는 무념의 상태가 되었기에 크게 벗어나고픈 생각도 없었다.

    ‘왜… 이 애를 바꾸고 싶었는지 모르겠군.’

    해월은 그 이유에 대해 골똘히 고민했다. 그러다 확신은 없는 결론이 섰다.

    ‘난 진이를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걸지도 몰라.’

    외모부터 성격까지 공통되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진이 무엇을 바라는지, 또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아마… 그거일 것 같아.”

    “예? 무슨 말입니까?”

    혼자 가만히 생각하다가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하니 연진은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진을 향해 검지를 입가에 댄 채 싱긋 웃었다.

    “비밀이야.”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아마 그것일 것이다.

    그들을 비롯한 누구나 다 바라는 것.

    바로 안정(安定)을.

    ***

    한주 땅은 공기가 좋고 음기가 적은 편이라 잡귀 하나조차 보기 어려웠다.

    때문에 영력을 수련한다 한들 연진에게 제령을 시범 보이거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나. 직접 귀신을 없애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수련의 효과가 좋을 텐데. 귀신이 없으니 그럴 수 없었다.

    사술을 이용하여 귀신을 소환해 낼 수도 있으나, 일이 커지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좋은 방법을 강구하기 전까지는 다른 것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결정한 것이 바로 대련이었다.

    활동하기 좋은 무명옷을 입은 해월과 연진은 너른 마당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오늘은 영력과 함께 체술을 수련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진의 습득력은 놀라울 만큼 빨라서 벌써 어느 정도 영력을 운용할 줄 아는 수준이 되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잘 해낼 줄 몰랐던 터라, 해월은 자신의 안목이 생각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느꼈다. 연진의 영력이 강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쨌든… 어쩌면 나보다 뛰어날 수도 있겠다.’

    이 정도 성장세면 그러한 예상도 무리는 아니었다.

    해월은 여유로운 자세로 서 있었다. 반면 연진은 어딘지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다.

    “정말… 하는 겁니까?”

    “이제 와서 딴소리하는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배우고 싶다며. 그럼 체술도 익혀야지.”

    “그렇다고 무작정 달려들라니…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연진은 망설이고 있었다. 표정부터 탐탁지 않다는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월은 그에게 손짓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와봐. 기본적인 체술을 알려 줄 테니까.”

    하물며 해월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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