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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4화 (24/124)
  • 24화

    “…정인이요?”

    연진이 사뭇 놀란 눈치로 반문하자 해월이 설명을 덧붙였다.

    “넌 잘 모르겠지만 여인네들은 이리 아름다우면서도 정성이 담긴 선물을 좋아하거든. 나중에 네 여인이 생길 때를 대비해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잖아?”

    “…사부는요.”

    “응?”

    “여인들한테 이런 거 만들어서 준 적 있습니까.”

    미묘하게 날이 선 음성이었다. 그것을 여인네를 못 만나 봤냐는 비아냥으로 받아들인 해월은 괜히 울컥하며 말했다.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딨었겠냐. 그러고 보니 고향의 꼬맹이들 말고는 화관 만들어 준 거 처음이네.”

    해월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반면 그 말을 들은 연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해월은 울컥해 하느라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사부는 이런 꽃 선물이 좋습니까? 아니면 다른 선물이 좋습니까.”

    “음, 글쎄.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어서…. 그게 무엇이든 선물을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어. 한 사람이 온전히 나만을 생각하며 준비한 것일 텐데.”

    해월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온전히 나만을 생각하며 준비한 것….”

    연진은 해월의 말을 곱씹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했어?”

    “알려 주십시오, 화관 만드는 법.”

    연진이 갑자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해월은 흠칫 당황했다.

    “뭐야, 관심 없어 보이더니…. 뭐 그래 알려 줄게.”

    꽃가지를 몇 개 더 꺾어 연진에게 시범을 보여 주었다.

    연진은 이를 유심히 보았다. 해월이 간단하게 만들기에 쉬운 줄 알았으나 꽤 복잡했다.

    “어설프게 엮으면 쉽게 풀리니까 조심하고.”

    “이렇게 하면 됩니까.”

    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연진은 해월이 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가 만든 것보다 깔끔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꽤 잘 만들어졌다.

    “어? 너 되게 잘 만든다. 이거 이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거 아닌데.”

    순수한 감탄에 연진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예쁘다.”

    해월은 연진이 만든 화관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연진이 해월의 머리 위로 화관을 씌워 주었다.

    해월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진은 피식 웃었다. 노란빛의 꽃은 해월의 흰 피부와 무척 잘 어울렸다. 덧붙여 어쩐지 조금 붉어진 볼과도.

    “역시 잘 어울리네요. 얼굴이 고와서 그런가.”

    “…너….”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해월의 얼굴이 빨개졌다.

    “…에취!”

    꽃가루 때문에 콧속이 간질거려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이제 그만 가죠. 코흘리개 사부 되기 싫으면.”

    연진은 해월의 콧잔등을 가볍게 꼬집으며 자세를 일으켰다. 뒷짐을 진 손은 아까 전 해월이 만들어 준 화관을 쥐고 있었다.

    “야! 같이 가!”

    해월은 꼬집힌 탓에 조금 붉어진 코를 매만지며 연진을 쫓아갔다.

    ***

    단곡은 배척받는 이방인들이 모인 만큼 일대에서 박해받는 것은 물론이고, 터전부터가 음습하여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이방인들은 마음을 놓고 살 수 있었다. 자신들을 찾는 이들이 없으니까.

    해월은 그곳에서 살던 선학경이 주워온 아이였다. 그 무렵의 일은 흐릿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야산에서 버려졌을 때 마주쳤던 아버지와의 기억을.

    “너 몇 살이냐.”

    “…다섯 살.”

    “부모는?”

    “…없어.”

    “뭐?”

    “버렸어.”

    야산에 버려지고 해와 달이 번갈아 하늘의 영역을 지배하는 걸 본지도 세 번째였다.

    아이의 부모는 제대로 된 인간들이 아니었다. 자식을 키울 어떠한 능력도 없으면서 짐승처럼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낳은 아이를 팔아넘기고 또 낳기를 반복했다.

    이 아이는 그들의 자식들 중 가장 똑똑하면서도 몸이 약해 상품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버림받지 않았다. 사실상 애물단지 취급이었다.

    그러나 가난이 심화하면서 그들은 아이를 노역장에 팔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를 거부했다.

    부모는 아이를, 아이는 부모를 버렸다.

    “노역장에 판다길래 나 같은 어린애는 값도 안 나올 테니 그냥 버리라고 했어.”

    “…….”

    “그 사람들이 멍청해서 다행이었지.”

    며칠을 제대로 먹지 않아 깡마른 아이는 그 말을 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차피 굶어 죽는 사람은 세상에 많았다. 그중 하나가 되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다.

    “…다섯 살이라며 말을 꽤 잘하는군. 네 부모가 원망스럽지도 않나?”

    선학경은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원망을 왜 해야 해? 난 노역을 하다 죽기는 싫었어.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지막 양심을 지키고 싶었고, 난 그에 맞게 응한 거뿐인데.”

    “하아… 네 부모도, 너도 영 정상은 아니다.”

    선학경은 그렇게 말한 뒤 아이를 들쳐메고 지팡이를 짚었다. 그는 절름발이였으나 체격만큼은 여타 사내들만큼이나 건장했다.

    아이는 선학경에게 대롱대롱 매달렸다.

    “나 팔 거야? 색주가에? 아니면 노비로?”

    기왕 팔릴 거면 노비가 나아 보였다. 색주가에서 변태 같은 성벽을 가진 자들에게 유린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더불어 나름 괜찮은 집안의 노비라면 배라도 안 곯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미쳤냐 널 갖다 팔게. 네 말대로 넌 값도 안 나올 텐데.”

    “근데 왜 나 데리고 가? 혹시 구해 주고 싶은 거야?”

    “네 눈은 장식이냐. 너 저기 계속 있으면 죽어.”

    선학경이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굶어 죽거나 산짐승에게 잡아 먹히거나 그도 아니면 마물에게 죽임을 당할 게 뻔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저 의아했다.

    “왜? 아저씨 나 처음 보잖아. 구해 줄 이유 없잖아.”

    “…너 입 좀 다물어라. 시끄러워.”

    “거짓말. 아저씨가 생각해도 이상해서 그런 거면서. 그냥 모른 척 두고 가도 돼, 원망 같은 건 안 해.”

    해칠 수도 없는 상대에게 원한을 품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도 없었다. 아이는 부질없는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선학경이 오기 전 이미 많은 행인이 저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 중 제게 말을 붙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척 봐도 버려진 아이를 굳이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 살길도 바쁜데 도움은 무슨 도움.

    딱히 구원을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괴로울 거면 조금이라도 덜 괴롭길 바란 것뿐이다. 그 때문에 노역장에 팔리는 것을 거부한 것이기도 했다.

    “꼬맹이 주제에 뭔 말이 많아. 그리고 네 부모는 예의도 안 가르쳤든? 왜 자꾸 반말이야.”

    침묵이 도래했다. 그제야 선학경은 아이의 부모가 정말로 예의를 안 가르쳤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선학경의 등에 업혀 있는 음침한 꼬맹이는 재잘재잘 은근히 말을 잘 붙였다.

    “아저씨 진짜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은 날 봐도 못 본 척 지나가던데.”

    “나보다 네가 훨씬 이상해 이 꼬맹아.”

    “나 꼬맹이 아니야.”

    “쪼끄만 게 꼬맹이지 뭔.”

    선학경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냐.”

    “무명… 여덟 번째 무명.”

    “…설마 그걸 이름이랍시고 말한 건 아니겠지?”

    “날 낳아 준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을 전부 무명이라고 불렀어. 구분은 해야 하니까 순번도 붙이고.”

    “…정말 가관이군.”

    그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짚었다.

    선학경은 하필 이 야산의 이 길목에 들어선 것을 후회했다. 이렇게 이상한 꼬맹이를 만날 줄 누가 알았을까.

    정작 ‘이상한 꼬맹이’인 아이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이상한지도 몰랐다.

    자신이 매달려 있는 선학경의 너른 등판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꼈을 뿐이었다. 아이가 살면서 처음으로 느낀 안정감이었다.

    그 뒤로 선학경은 아이를 단곡으로 데려왔다.

    투박하고 세심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씻겨 주기도 하고 밥도 줬다.

    아이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선학경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앞으로 네 이름은 선해월이야. 여덟 번째 무명같이 뭐 같은 이름이 아니라. 알아들었어?”

    “선…해월?”

    “너 주웠던 날이 일식이 있던 날이었어. 그래서 해월인 거고 선씨는 내 성.”

    아저씨의 이름이 선학경이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으나 굳이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연유를 몰라서, 아이는… 선해월은 침묵했다.

    “어쨌든 넌 내 아들이고 난 네 아버지야. 그래도 난 아버지 노릇 같은 거 할 인간이 아니니까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왜 아저씨가 내 아버지를 하는데?”

    “불쌍해서 그런다. 됐냐.”

    “내가 불쌍해? 왜? 아저씨는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

    해월은 아낌없이 의문을 드러냈다. 해월은 자신이 들어온 이 마을이 이방인들의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각자 제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신세라는 것이다. 선학경이 구태여 저를 데려와 양자로 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의아한 표정을 쳐다보던 선학경은 이내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내가 널 본 이상 앞으로 난 널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 거야. 그러니까 토 달지 마. 노역장에 팔아 버리기 전에.”

    “…….”

    굶어 죽는 것은 전혀 안 두려웠으나 노역은 하기 싫었다. 게다가 선학경의 경고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선학경은 내뱉은 말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형태는 아니었으나 해월에게 최소한의 가족의 역할을 해 주었다.

    해월은 그런 선학경을 아버지라 불렀고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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