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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3화 (23/124)

23화

연진과 해월이 보내는 시간은 단순했다.

사제관계의 주도권은 해월에게 있었고, 해월은 연진을 단련시키는 데 치중했다.

한가로이 놀 때도 있었지만 지난번 연진과 진솔한 대화를 나눈 뒤로는 스승의 역할에 충실했다.

솔직히 거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이었다.

기본적으로, 영하가 아닌 자들이 영력을 수련하는 일은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하물며 연진은 귀족이다. 가문 내의 지위를 떠나서 신분 자체는 드높다는 뜻이다.

해월은 이방인의 마을 출신으로 신분의 고하를 따지자면 한참 아래에 있는 하층민이었다.

같은 저급한 행위를 하더라도 해월이 하는 것과 연진이 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그런 해월과 연진이 정말로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것부터가 이미 놀랄 노 자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강석요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기도 했다.

광인인 것도 모자라, 천한 퇴마사에게 가르침이나 받는 공자라는 소문을 내기 좋을 것 같아서.

최근까지 해월은 그런 강석요의 생각을 이용하여 호의호식하다가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해월은 연진에게 호기심이 아닌 호의를 품게 되었고, 그건 연진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앞에 펼쳐진 길이 꽃밭이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가혹할 것이다. 그렇기에 해월은 이 잠깐의 평화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래도 맡은 바 책무가 분명했으니, 해월은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자 했다.

연진은 지금 정좌한 채 영력을 모으는 수련 중이었다. 해월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긴장을 풀도록 도와주었다.

“몸 편히 하고, 이 주변에 있는 깨끗한 공기를 모두 네게 모은다는 생각으로 집중해. 그러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셔.”

해월은 연진의 뒤에 붙어서 호흡법을 알려 주었다. 영력과 호흡은 거의 무관하지만, 영력을 드러내고 감추는 것은 호흡법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영력이 조금 모이는 것 같다. 이대로 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어 봐.”

“후우….”

연진은 해월이 알려 주는 호흡법을 곧잘 따라 하며 숨을 내쉬었다. 사실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 잘되어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해월을 믿고 따를 뿐이었다.

“단전에 뭔가 응어리지는 게 느껴지지 않아?”

“뭔가 가슴께가 묵직하긴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영력의 근원이야. 근원이 모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니까 그렇게 기운 없어 하지 않아도 돼.”

해월은 연진에게 빈말을 하지 않았다. 연진은 충분히 훌륭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본인이 원체 둔감하여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영력을 내보낸다는 건, 가슴 속에 모인 응어리를 몸의 가장 바깥으로 밀어낸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해월은 연진의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영력을 개방했다.

영력이 어느 정도 눈에 보이게 된 연진은 해월의 온몸을 뒤덮고 있는 영엄한 기운에 눈을 크게 떴다.

“살짝만 내보이면 이렇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게 되고, 조금 더 드러내면.”

영력을 더욱 강하게 방출했다. 그러자 연진은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묵직해진 것을 느꼈다. 숨이 답답하고 몸이 억눌린 것처럼 움직이기 어려웠다.

본능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 해월은 영력을 내뿜는 것만으로도 눈앞의 연진을 압도했다.

살짝 웃으며 영력을 갈무리한 해월은 이어서 설명했다.

“이렇게 상대를 압박할 수 있게 되지. 잘 수련해 두면 요긴하게 쓸 상황이 많아.”

“어느 상황에서 쓸 수 있습니까.”

“음… 기선 제압할 때? 덧붙여서 상대를 죽일 듯이 째려보면 효과가 배가 돼.”

“눈에서도 영력이 방출되는 겁니까?”

“아니, 그냥 과시하는 거야.”

실없는 소리에 연진은 순간 맥이 풀렸다.

해월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누차 얘기하지만 넌 기가 세서 엄청나게 강해질 수 있어.”

“저는 제가 기가 세 보이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속에서 나오는 기를 얘기하는 거지. 그리고 겉도 그렇게 약해 보이진 않는데?”

연진은 차가운 인상에 딱딱한 표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상당히 매서운 분위기를 가졌다. 길 가다 보면 눈도 못 마주치고 지나갈 인상이랄까.

해월의 객관적인 평가에 연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평소 연진은 자신의 얼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왕이면 서늘한 인상보다 따뜻한 인상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시무룩한 태도를 보이는 연진이 웃겨서 해월은 웃음을 터뜨렸다.

“풉, 괜찮아. 일단 따뜻한 인상이든, 차가운 인상이든 잘생긴 건 매한가지 아니겠어?”

“…제가 정말 잘생겼습니까?”

연진이 정말 모르겠다는 투로 반문했다.

‘방금 굉장히 재수 없는 질문을 들은 것 같은데.’

해월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으나 연진이 진심으로 묻는 듯하니 성실히 답해 주었다.

“어, 너 잘생겼어.”

그 말에 연진의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

해월은 농을 하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가 여인이었으면 반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잘생겼으니까, 어디 가서 그런 질문하지 마. 재수 없어 보여.”

“…예.”

원체 무뚝뚝한 연진이기에, 이번에도 별 반응 없겠거니 싶어 해월은 그를 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정적으로 생활하다 보니 좀이 쑤셨다. 어디 풍경 좋은데 산책이라도 가고 싶었다.

그런 해월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연진이 물었다.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응? 내가 필요한 게 어딨어. 잘 곳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 나오는데.”

“그런 것 말고요. 이런 곳에서 조용히 생활하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으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가만 보면 넌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 같아. 나 그렇게 쉬운 사내 아닌데.”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이었다.

“어디 나들이라도 다녀오시지요. 아직은 봄이니 꽃이 남아 있는 곳도 있을 겁니다.”

연진은 나들이를 권했다. 해월은 오호라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 근처에 구경할만한 데 없어? 아, 그러고 보니 저택에 후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후원에 유채꽃밭이 있습니다. 아직 꽃이 지지 않았을 테니 걸음 하시지요.”

“그럼 같이 가자.”

“예?”

연진이 흠칫 놀라 되물었는데, 해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네 돈 가지고 문지기들한테 뇌물 먹여 놨으니 괜찮을 거야.”

“…뇌물보단 협박 아니었습니까.”

“그랬던가? 몰라, 기억 안 나.”

해월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나 연진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해월이 무력과 약간의 금전을 이용해 저택의 하인들을 구슬리던 장면을.

역시나 대부분의 하인이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나 지금 본관에 가주와 그 아들이 없으므로 최고 주인은 연진이 되었고, 그렇기에 하인들은 해월의 협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연진은 저택이든 밖이든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그런데도 연진은 별채에 틀어박혀 있는 생활을 고수했다. 해월은 그것이 잘못되었다 지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부로서 조금 신경 쓰일 뿐.

“나랑 같이 후원에 가자.”

“…….”

“너도 안 가본 지 오래되었을 거 아냐. 가서 꽃구경 좀 하자.”

“…알겠습니다.”

근래 들어 연진은 해월이 원하는 것은 웬만해선 다 들어주었다.

정이 들어서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해월은 그리 추측하고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좀 못된 짓을 하는 기분이었지만, 연진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 주고 싶었다. 계속 이렇게 좁은 세상에서 사는 것은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

해월은 후원으로 향하는 문간에 발을 디뎠다. 연진이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문을 열자마자 싱그러운 노란 빛이 그들을 반겼다.

넓은 후원은 꼭 황금색의 평야 같았다. 유채꽃은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렸고, 꼭 노란 파도가 일렁이는 듯했다.

꽃밭이 햇살과 어우러져 장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꽃잎들이 흩날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 한구석이 술렁였다. 해월은 그때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연진더러 재미없게 산다고 뭐라 하긴 했으나 해월 역시 재밌는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의 봄날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해월은 조심스레 꽃밭에 발을 디뎠다. 연진은 그런 해월의 발자취를 똑같이 밟으며 걸었다.

후원에 오는 것이 워낙 오랜만인지라 연진은 어색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해월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채꽃 사이를 넘나들었다. 꼭 여러 번 이곳에 와 본 사람 같았다.

연진은 해월의 친화력 하나는 알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저렇게 친숙하게 대하니, 마음을 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저만 해도 그러했으니까.

“와, 날씨 너무 좋다. 그렇지?”

자세를 낮춘 해월은 꽃가지 하나를 꺾어 연진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어때? 예쁘지?”

해월은 그 꽃밭 한가운데 서서 연진을 향해 물었다.

“…정말 예쁘네요.”

연진은 그 꽃가지를 받아들며 답했다. 그의 시선은 해월에게 고정된 채였다.

해월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자세를 숙여 꽃을 조금 더 꺾었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해월이 의아했던 연진은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뭐합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해월은 꽃 가지를 엮어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은 터라 금세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다 됐다.”

노란 화관이 완성되기가 무섭게 해월은 연진의 머리 위에 그것을 씌워 주었다.

연진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해월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역시 잘 어울려.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가?”

농이 아니라 정말 잘 어울려서 하는 말이었다. 역시 외관의 완성은 얼굴이었다.

“…사내가 이런 게 잘 어울려서 뭐 합니까.”

연진은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해월은 장난스레 엄한 목소리를 냈다.

“너 화관을 쓰는 데 남녀노소가 중요한, 편견 있는 애였어?”

연진은 화관 하나에 남녀노소까지 들먹이는 해월이 어이없었지만, 그런대로 즐거웠기에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해월은 항상 황당하고, 보면 볼수록 모르겠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재밌었다.

“좋았어, 사부로서 화관 만드는 방법을 전수해 주지.”

해월은 굉장한 비법을 일러주는 도사 마냥 말을 했다.

“제가 그런 걸 알아서 어디다 씁니까.”

꽤나 회의적인 반응이었지만 해월은 굴하지 않았다.

“너는 애가 왜 이리 삭막하냐. 혹시 모르잖아, 나중에 네 정인한테 만들어 줄 수도 있고.”

정인이라는 단어를 들은 연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짧은 단어가 가슴속을 울리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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