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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2화 (22/124)
  • 22화

    “내가 내 제자 머리 좀 쓰다듬겠다는데, 뭐. 닳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에 연진은 죽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연진의 아버지도 제 머리를 쓰다듬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따뜻해서, 잊지 못하는 기억이었다. 아버지처럼 제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줄 이가 세상에 더 있을까, 그런 물음 아닌 물음을 스스로 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당연히 ‘없다’였는데 너무 속단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때, 해월은 연진을 쓰다듬던 손을 떼고 진지한 음성을 냈다.

    “나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 난 네가 마음 쓸만한 인간이 아니야. 그냥 처음 봤을 때처럼만 대해 주면 돼.”

    저를 경계하고 의심하며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면 된다. 연진이 그렇게 해 준다면 작금의 묘한 기분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처음 봤을 때가 아닌데 어찌 처음처럼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미 사부께 마음이 쓰입니다.”

    “정이야 뭐 같이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붙는 거라지만, 그 이상까지는 안 하는 게 좋아.”

    무언갈 받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누군가 제게 이리 정을 품는 일이 이상해서. 그것이 동정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선을 긋는 일에 능숙하시군요.”

    “그냥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그래.”

    해월은 타인의 호의를 받는 것엔 서툴렀으나, 관계에 선을 긋고, 가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숨기는 것엔 익숙했다.

    “내가 네 사부를 하고 싶다고 했던 건… 솔직히 재밌을 것 같아서였어. 난 무료했으니까.”

    작은 놀림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연진이 재밌어서, 그 짜증스러운 얼굴이 계속 보고 싶어서, 책임지지 못 할 말과 행동을 했었다.

    인정한다. 어른답지 못한 태도였다. 그래도 한번 내뱉은 말은 지키고자 연진을 데리고 그를 가두고 있던 저택을 나갔고, 손을 잡고 그를 나아가게 했다.

    변덕과 변화. 그 사이 어디쯤의 감정이었다.

    이런 애매한 마음가짐으로 누군가의 사부가 되겠다고, 함부로 손을 내밀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해월은 충동적이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야.”

    편협하고 이기적이다. 누군가를 이끌어줄 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연진은 그런 해월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사부야말로 뭐가 그리 복잡합니까.”

    “뭐…?”

    “간단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냥 사부와 제자일 뿐입니다. 그 이외의 다른 것이 있습니까.”

    “…….”

    “저는 당신의 비밀을 캐묻고 억지스러운 신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정도 호의는 베풀고 또 품을 수 있길 바라는 겁니다.”

    해월은 연진이 베푸는 호의를 곧잘 사양했다. 누가 보아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연진은 그것이 싫었다. 해월이 더 이상 선을 긋지 않길 원했다.

    “…석 달.”

    해월이 작게 웅얼거렸다.

    “그 뒤면… 난 돌아가야 해. 아버지랑 약속했거든.”

    그리고 이번에 고향에 돌아간다면 아마 한주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선 같은 거 이젠 안 그을 테니까. 남은 시간 잘 보내자.”

    “…그 말을 바랐습니다.”

    그들은 처음 언약을 나누었던 그때처럼 손을 맞잡았다.

    ***

    마루에 걸터앉아 문득 마당을 본 해월은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꽃이 많이 졌구나.”

    “예, 많이 졌습죠. 이제 며칠 뒤면 더는 꽃을 볼 수 없을 거예요.”

    원복은 치워도 치워도 산을 이루는 꽃잎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싱긋 웃은 해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부채를 들었다. 풍술을 사용할 때 도구를 이용하면 술법의 효과가 배가된다.

    촤락.

    부채를 펼친 해월은 팔을 뻗어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바닥에 나부끼던 연분홍 벚꽃잎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치솟았다. 꽃잎으로 이루어진 회오리는 가히 절경이었다.

    다시 한번 손을 올리자 바람이 넓게 퍼지며 꽃잎의 회오리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꽃잎이 난분분 춤을 추었다. 공기 중에 꽃내음이 가득히 퍼졌다.

    그늘과도 비슷한 꽃잎의 막은 하늘을 가리고, 그 아래선 원복은 놀란 눈으로 장관을 지켜보았다.

    바람 소리에 이끌리듯 방 밖으로 나온 연진 또한 멈춰선 채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월은 부채를 이리저리 가르며 바람을 조종했고 그 춤사위 같은 동작에 꽃잎이 흩날렸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분홍 꽃잎이 푸른 하늘 위를 수놓았다. 틈새로 들어온 햇살의 노란빛과 어우러졌다.

    탁.

    부채를 접자 마당에 들었던 부드러운 바람이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따라서 흩날리던 벚꽃잎들도 이내 낙화했다.

    화우(花雨)가 내렸다.

    그 한가운데 선 해월은 떨어지는 꽃잎들을 맞으며 연진을 보고 천진하게 웃었다.

    “어때? 예쁘지?”

    연진은 해월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반응을 보니 별로 안 예뻤나 싶어서 해월은 고개를 돌려 원복을 보았다.

    “예쁘지 않았어?”

    “완전 절경이었어요, 귀빈!”

    원복은 호들갑을 떨며 신기해했다. 그 모습에 괜히 뿌듯해진 해월은 코를 쓱 훔치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내 손을 뻗어 강한 바람을 내보내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을 모두 한쪽에 몰아넣었다.

    원복이 온종일을 치워도 버거웠던 양을 단숨에 정리했기에 그의 표정이 몹시 밝아졌다.

    “오오!”

    “이제 마당은 그만 쓸고 가서 좀 쉬어.”

    “네!”

    원복이 싱글벙글 좋아하며 별채 밖으로 나가자 해월은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복은 열셋의 소년이다. 한창 뛰어놀고 싶고 이런 묘기에 재밌어할 나이였다.

    열셋의 자신은 무얼 했었나. 해월은 십이 년 전의 일을 공연히 떠올려 보았다.

    그날이 그날 같던 삶이라 딱히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다.

    해월의 모든 날은 목적도 없이 흐르는 강물이나 다름없었다. 물길이 어디에 닿을지도 모르는 채,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 삶이었다.

    그때, 연진이 해월의 앞에 섰다. 연진은 아무 말 없이 해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손을 뻗어 해월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떼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 없이 해월을 바라보기만 했다.

    “…응?”

    해월이 의아해하며 눈을 깜빡거리자 연진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를 붙잡았다.

    “…이런 부채로 그런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아, 맨손보다 이런 걸 이용해 주면 효과가 더 좋거든.”

    해월은 평소 늘 부채를 지니고 다닌다. 한주에 오며 이전에 쓰던 부채가 망가져 최근엔 갖고 있지 않았지만, 며칠 전 다시 장만한 참이었다.

    연진은 아무런 무늬 하나 없는 밋밋한 부채를 보다가 이내 그것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해월은 영문을 몰라 그저 연진을 뒤따랐다.

    방에 들어선 연진은 서탁에 부채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그러곤 하얀 부채를 검은 선으로 물들였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진중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이윽고 완성된 부채에는 아름다운 벚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흩날리는 벚꽃잎의 끝자락엔 해를 품고 있는 초승달 문양이 자리했다.

    “와….”

    해월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연진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기도 했지만, 정말 어여쁜 그림이어서였다.

    그 순수한 반응에 연진은 작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응, 너무 예쁘다.”

    해월은 검은 선 위에 손가락을 올려보며 즐거워했다.

    “너 그림 진짜 잘 그린다. 누가 가르쳐 준 거야?”

    “예전에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연진은 해월에게 곧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묻지 않는 이상 먼저 얘기하는 일은 없었다.

    해월은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네 첫 스승은 아버님이셨나 보네.”

    “…스승이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와 놀아 주신 것뿐이셨죠.”

    그 말을 하는 연진은 본 중에 가장 편안해 보였다.

    “그거 알아? 사랑받은 사람은 어디서든 티가 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에 연진이 반문했다.

    “방금 아버님 이야기를 하는 너한테서 사랑받은 티가 팍팍 났거든.”

    “…네?”

    연진은 의아해하면서도 제 기억을 더듬었다.

    제 어머니는 저를 낳고 산욕열로 죽었고, 그 뒤로 받았던 애정은 모두 아버지가 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버지가 죽은 뒤로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타인의 조건 없는 호의와 애정은 해월뿐만 아니라 연진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낯선 것은 어렵고 어색한 법이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받은 기억이 흐렸기에 연진의 대답도 흐릿했다.

    “척 보니 알겠는데? 네가 무척 다정하다는 걸.”

    “제가 다정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받은 애정을 베풀 줄 아는 게 다정한 거야.”

    연진은 ‘친절한’ 해월과는 달랐다. 다정한 것과 친절한 것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해월은 그 사실을 다시금 절감했다.

    해월은 제대로 된 온정을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정을 베푸는 시늉을 했다.

    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해월은 어렵지 않게 웃는 낯을 하고 온기 어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다정하고 가벼우며 장난스러운 사람. 해월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짜였다. 거짓은 언제나 진실을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해월은 다정한 연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난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그때, 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도 다정합니다.”

    그가 한 말은 해월의 지난 생각들을 부정하고 있었다.

    “제가 보았던 사람 중에 당신이 가장 다정한 사람입니다.”

    해월은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가슴속 어딘가가 울렁였다.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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