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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1화 (21/124)
  • 21화

    목욕을 마치고 대충 천으로 물기를 닦은 해월은 준비되어 있던 옷가지를 집었다.

    해월의 여벌 옷은 며칠 전에 같은 이유로 버린 적이 있다. 물론 다른 이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여하튼 해월에게 맞는 다른 옷이 없어 부득이하게 연진의 백야장의를 얻어 입게 되었다.

    윗옷을 입자 묘하게 연진에게서 나던 시원한 묵향이 나는 것 같았다.

    해월은 소매를 킁킁대며 그 냄새를 맡다가 너무 변태 같단 생각에 자세를 바로 했다.

    야장의는 본래에도 품을 넉넉하게 입지만 연진과의 체격 차이 때문에 옷소매가 많이 길어서 손끝만 간신히 보였다. 아래 끝단도 거의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어라?”

    그러고 보니 하의가 안 보였다. 목욕간 어디를 뒤져보아도 하의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원복이 깜빡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별채 내에 사람이라곤 연진과 원복뿐이라지만 하의를 입지 않고 야외를 돌아다니는 변태가 될 수는 없었다.

    소리라도 쳐서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해야 하나? 변태 같지만 이대로 상의만 입은 채 하의를 찾으러 가야 하나?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지만 좀처럼 결정이 어려워 그대로 굳어 있을 무렵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원복이 옷을 가져다주러 온 듯했다.

    “원복… 어?”

    그런데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원복이가 깜빡했다고 해서 갖다 주러 온 겁니다.”

    연진은 제 옷을 입은 해월을 보고 잠시 굳었다가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로 곱게 개어 놓은 바지를 건네주었다.

    순간, 해월은 잽싸게 옷을 가로채고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더운 목욕물 때문에 목욕간 내부가 뿌예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연진에게 보일 뻔했다.

    “…뭐 하는 겁니까.”

    “보면 몰라? 내외하는 거잖아.”

    무얼 하든 매사에 당당한 해월이, 장난식이지만 저자세로 나오고 있기에 연진은 그저 황당한 얼굴이 됐다.

    “나 옷 입는 거 구경할 거 아니면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뭘 그리 서 있어.”

    해월은 빨리 연진을 내보내고 싶어서 괜히 실없는 소리를 했다.

    “…구경하러 온 거 아닙니다.”

    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내 그는 문을 닫고 나갔다.

    해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내려 제 다리를 쳐다보았다. 마르고 흰 다리에는 흉으로 남은 상처들이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다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 숨은 것이었다.

    ‘근데 내가 왜 들키기 싫은 거지…?’

    여태 이 흉터를 일부러 숨긴 적은 없었다. 대놓고 드러낼 일도 아니지만, 딱히 숨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제가 한 행동은 그 생각에 위배되었다.

    잠시 고민해 보니 금세 결론이 나왔다.

    연진은 제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니 그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그가 걱정 어린 눈을 할 때면 이상하게 가슴께가 불편했으니까.

    ***

    해월은 품이 넉넉한 야장의를 입고, 연진과 저녁상을 사이에 둔 채 마주 앉았다.

    연진의 안색이 어딘가 좋지 않아 보여서 해월은 공연히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해월은 그답지 않게 음식을 깨작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 어디 안 좋아? 혹시 아직도 아픈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돌아오는 답이 지나치게 냉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재잘재잘 말을 붙였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연진의 화난 얼굴을 자주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저 짜증 어린 얼굴이었나 보다.

    ‘정말 기분 안 좋으면 이런 표정을 하는구나.’

    싸늘하고 무감한 얼굴. 한겨울 얼음처럼 냉랭해서 감히 입을 열기도 어렵게 느껴졌다.

    굳은 표정은 식사를 마치고도 계속 이어졌다. 상을 정리하는 원복까지 덩달아 연진의 눈치를 보았다.

    해월은 원복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원복은 힘내라는 듯한 눈인사를 끝으로 방을 나섰다.

    덩그러니 연진과 마주 앉게 된 해월은 슬쩍 연진을 보다가 어색하게 일어섰다.

    “그럼… 밤도 늦었으니 이만 갈게.”

    “거기 서십시오.”

    연진은 돌아서려던 해월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해월에게 내밀었다.

    해월이 이게 뭐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연고입니다.”

    “연고?”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아까 봤구나.”

    다리에 있는 상처를 본 것이 분명했다.

    “…일부러 본 건 아닙니다.”

    해월은 제 다리에 생긴 흉터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누가 그 흉터를 본다 한들 상관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걸까.

    ‘들켰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동요하는 해월과 달리 연진은 여전히 차분하고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바르십시오. 상처와 흉터에 좋은 약재입니다.”

    “…챙겨 주는 건 고마운데 별로 소용없을 거야. 이미 오래된 흉터라서.”

    살짝 짓는 해월의 미소 한 자락엔 이유 모를 서글픔이 묻어났다. 오랜 상처들만큼이나 굳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바르세요. 아예 바르지 않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연진은 확실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해월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픈 사람을 보는 걸 싫어한다더니 생각보다 그 정도가 심한 편인가 보다, 그리 짐작할 뿐이었다.

    “네 말이 맞긴 하지만 난 괜찮아. 사내가 흉터 좀 있다고 탈 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안 괜찮습니다.”

    대체 뭐가 안 괜찮다는 건데? 의아한 시선을 보냈음에도 연진은 묵묵부답이었다.

    해월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진이 한 말의 저의를 몰라서였다. 자신은 흉터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연진은 신경 쓰인다고 말하고 있다.

    왜일까. 본인의 흉터도 아닌데.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했습니다.”

    연진은 그 한마디로 갈음했다. 해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늙은이 같은 소리를… 그렇다 치면 난 이미 머리도 짧은데 별 상관없지 않나.”

    연진은 말없이 해월의 손을 잡아당겼고, 해월은 얼결에 주저앉게 되었다.

    “다리 줘 보십시오.”

    “괜찮다니까….”

    “…….”

    “알았어, 알았어.”

    연진이 강하게 째려보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 해월은 체념한 듯 바지 밑단을 말아 올렸다.

    가까이서 확인하니 훨씬 심한 상처인지라 연진은 미간을 좁혔다. 하얀 다리에 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묵묵히 해월의 다리에 약을 바르고 천을 감아 주었다.

    간질거리는 감촉과 연진의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해월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연진은 감은 천을 매듭지으며 말을 보탰다.

    “계속해서 바르면 흉이 사라지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말이 다였다. 연진은 상처에 관해 묻거나 하지 않았다.

    해월은 괜히 야살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호오, 상처가 왜 생겼냐 같은 건 궁금하지 않은 거야?”

    “궁금합니다.”

    돌아온 답은 해월에겐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연진은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그것이 그 나름의 배려인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지금은 또렷한 목소리로 궁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응? 그럼 왜 안 물어봐?”

    “궁금해도 묻지 말아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헤에, 그러니까 괜히 얘기해 주고 싶어지네.”

    해월은 배려를 보이는 연진이 마음에 들었다. 꽤 차갑게 생겨서는 은근히 정 많고 사려 깊은 모습이 재밌기도 했고, 동정받기 싫어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쉽게 동정심을 품는 것이 귀여웠다.

    그가 제게 주는 ‘정’이 싫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익숙하지도, 달갑지도 않았지만. 왜인지 연진에게는 해 주고 싶었다. 단순한 변덕일지, 아니면 변화일지는 모르겠다.

    “열 살 때였나… 그때 한창 견습 영하를 차출한다길래 영하가 되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거든.”

    해월은 어릴 적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정말 불같이 화를 내셨어. 그래도 꿋꿋하게 설득하려 했는데, 결과는 뭐… 보다시피 이렇지.”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심하게 맞았었다. 한동안은 걷지 못하고 앉은뱅이 생활을 했을 정도로.

    “…고작 그런 이유로 다리에 이런 상처를 낸 겁니까.”

    연진이 한없이 냉랭하고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에 반해 해월은 남 얘기를 하듯 태연자약했다.

    아니, 생판 모르는 남의 얘기를 해도 이렇게 무감한 태도일 수는 없었다.

    해월이 무감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인 선학경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에겐 고작 그런 이유일지라도 아버지에겐 고작이 아닐 수 있잖아.”

    완전히 선학경의 의중을 알진 못했지만, 그렇게 반감이 들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사람인 거니까. 자신이 딱히 무얼 할 수 있겠나. 그것이 양부가 사는 삶의 방식이라는데.

    “…사부의 아버님께 함부로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이건 옳지 않은 행태입니다.”

    연진의 생각에 영하가 되고 싶다는 아들을 이렇게 매질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연진 또한 폭력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반항을 포기했다고 해서 폭력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부당함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폭력에 적응했을 뿐이다.

    연진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마주한 해월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옳든 그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받아들이는 내가 별로 상관없으니까. 그거면 된 거지.”

    “중요한 겁니다. 상관없는 일도 아니고요.”

    “날 걱정하는 거야?”

    “그건….”

    연진은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은근히 여린 녀석이야 너는.”

    해월은 그런 연진의 머리를 작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순해서 어디다 쓰려고.”

    “그런 말 살면서 처음 듣습니다.”

    연진이 정색했다. 이에 해월은 피식 웃으며 계속 연진의 머리를 매만졌다.

    “…언제까지 만질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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