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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0화 (20/124)
  • 20화

    해월은 땀으로 얼룩진 연진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도도하고 경계심 많던 이 귀공자는 예상보다 정에 약한 자였다. 제가 내보인 친절에 선뜻 손을 내밀었고, 동정심도 쉽게 품었다.

    맨 처음, 해월은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있었다. 가문 내 알력 다툼으로 박대받는 자제들은 흔히 있었지만, 연진은 그 결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서였다.

    ‘선대 가주의 유지에 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당장 가주를 끌어내릴 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침전하고 있다는 건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호기심에 흥미가 더해지고 이젠 어쩐지 마음이 쓰이게 됐다. 이 가여운 공자는 그로부터 비롯된 제 행동에 호의를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연진이 자신에게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싫지도 않은 터라 해월은 그에 맞게 행동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돈이 있어야 해.’

    다른 것들은 전부 무용했다. 돈은 해월에게 있어 가장 확실한 존재이자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 연진의 호의에 조금은 거짓된 호의로 화답할 수 있었다.

    ‘영 거짓말은 아니야. 네가 꽤 마음에 든 건 사실이니까.’

    약간의 삿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미안해서 괜히 속으로 변명했다.

    해월은 연진의 얼굴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잇새에서 뜨겁고 밭은 호흡이 나오고 있었다.

    연진은 지금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으며 무얼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해월 또한 아이의 몸으로 영력을 깨우치며 며칠을 꼬박 앓았는데, 무척 괴로웠다는 기억만 남고 다른 것은 그 무엇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 연진은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나 같은 놈한테 정들지 마.”

    나는 쓰레기니까. 해월은 뒷말을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그래도 네 사부로서 최선을 다할 거야. 이건 진심이니까 믿어도 돼, 그 외에 다른 건 절대 믿지 마.”

    다 거짓일 테니….

    ***

    연진은 사경과도 같은 꿈속에서 헤매고 또 헤맸다. 어디를 보아도 살아 움직이는 존재는 저뿐이었다.

    어둡고 무서운데 동시에 포근했다. 아마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문득 이 온기의 정체가 궁금하여 손을 움직이던 순간, 시야가 환해지며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눈을 뜨곤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시야에 제 손을 꼭 쥔 채로 구부정하게 앉아 선잠이 든 해월이 보였다.

    꿈속에서 느꼈던 온기가 이것이었던가. 손안에 잡히는 해월의 손은 무척 희고 작았다.

    느껴지는 것은 온기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청아한 감각이 손끝에서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이게 해월이 말했던 영력인가 싶었다.

    연진은 해월이 쳤던 제 이마에 손을 얹었다. 분명 해월이 이마를 치는 순간, 무언가 속에서 들끓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을 이리도 뜬금없이, 그것도 뜻밖의 인물로 인해 겪게 될 줄이야. 세상은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인가 싶었다.

    그때, 해월이 가늘게 눈을 떴다. 몇 번 끔뻑거리니 시야가 선명해졌고, 지체 없이 깨어난 연진을 확인했다.

    “어? 일어났어? 몸은 어때?”

    아직 신열이 있을 수도 있기에 걱정하는 뜻을 내비쳤다.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해월이 안도하자 연진은 의문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한데 대체 제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별건 아니고 사술을 좀….”

    “예? 사술은…!”

    연진의 언성이 높아지자 해월이 다급하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얘가 진짜…! 온 동네에 소문낼 일 있어? 소리 좀 낮춰.”

    “…….”

    연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해월은 손을 뗐다.

    “…사술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국법 어기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 암암리에 다들 하는 짓인데 뭘 새삼스레… 네가 이럴 것 같아서 설명 안 한 거야.”

    “금기는 금기입니다. 그러다 잡히기라도 하면….”

    “안 잡혀. 그리고 잡히면 뭐 어때? 죄지었으니 벌 받으면 되는 거지. 아, 만일 잡혀도 너는 관여시키지 않을 테니 안심해.”

    해월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연진이 더 뭐라 하기 전에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 얼른 말을 보탰다.

    “그래도 눈 떴을 때 기분이 좀 다르지 않았어? 뭔가 깨끗한 감각이 느껴진다던가.”

    “…느껴지긴 했습니다.”

    “그럼 성공이네. 길을 터놨으니 나머지는 시간문제야.”

    해월은 일어서며 오래 앉아 있던 탓에 뻣뻣해진 몸을 풀었다. 그런데 바닥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툭.

    방금 바닥으로 낙하한 것이 제 코에서 흐른 피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월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코 부근을 틀어막았으나 피가 샘물처럼 흘러나왔다.

    “사, 사부!”

    연진이 놀라며 해월의 어깨를 감쌌다.

    코피는 어느새 손 틈새로 흘러나와 바닥을 적셔 내고 있었다. 연진은 황급히 제 옷소매로 피를 닦아 냈다.

    해월은 그런 연진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비싼 비단옷인데 더럽히면 어떡해.”

    한다는 소리가 연진의 옷 걱정이었다. 연진은 해월의 거부에도 굴하지 않고 피를 닦아 주었다.

    코피가 거의 멎자 해월은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이 들어서 그런지 몸이 좀 안 좋네.”

    누가 듣더라도 상황을 갈무리하려는 농이었다.

    해월은 제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흔한 일이었으니까.

    반면, 그 말 한마디에 연진은 해월을 째려보았다.

    연진은 피가 굳어 엉망이 된 해월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의원이 왔을 때, 당신이 울화증이 있다고 하더군요.”

    “뭐? 내가?”

    “기혈이 몇 개 막혀 있다고 합니다.”

    그때는 굳이 말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 의원 돌팔이네. 나 울화증 같은 거 없는데.”

    “…언제는 용하다면서요.”

    “그때는 내가 폐병 걸린 적 있단 걸 알아채서였고. 난 울화 같은 거 쌓아 두는 인간이 아니야.”

    해월이 너스레를 떨자 연진은 한숨 쉬었다.

    “제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조금 더 몸을 챙기세요.”

    “네가 그런 소리 하니까 진짜 웃기긴 하네. 근데 언제까지 닦을 거야? 나 피부 벗겨지겠어.”

    연진은 흠칫 놀라며 손을 뗐다. 저도 모르게 계속 해월의 몸을 닦고 있던 까닭이었다.

    “어찌 되었든 몸은 꼭 보중하십시오. 아니면 의원을 부를까요? 혹시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면 어찌합니까.”

    “나도 나름 의술 배웠거든? 내 상태는 내가 잘 알아. 이건 병이 아니야.”

    잔인하게도, 정말 병이 아니었다. 하나 병이 아니면 무엇인지 곧이곧대로 연진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대체 왜 그런 겁니까.”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거야.”

    그 성의 없는 거짓말에 연진은 따져 물었다.

    “피곤하다고 코피를 한 바가지 쏟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연진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연진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해월이 흘린 피가 옷 소매와 바닥을 한가득 적실 정도였으니 걱정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신경 쓰지 마. 가뜩이나 복잡한 네 머리에 나까지 끼워 넣지 않아도 돼.”

    해월은 피를 많이 흘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됐어, 더 실랑이해 봐야 입만 아프지. 해도 졌는데 저녁이나 먹자.”

    “잠시만요.”

    연진이 방을 나서려는 해월을 불러세웠다.

    “왜?”

    “그 옷 입고 밥 먹을 겁니까.”

    “아….”

    해월은 그제야 제 흰옷이 온통 엉망이 된 것을 확인했다.

    ***

    해월은 커다란 나무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몸을 담갔다. 피부에 따뜻한 물이 닿자 온몸이 노곤해지며 긴장이 풀렸다.

    해월은 몸을 씻으며 가볍게 목을 움직여 근육을 풀었다. 사술과 치유술을 동시에 썼더니 확실히 몸이 축나긴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몸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코피야 원체 자주 흘리긴 했지만 이렇게 쏟아지듯 흘린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색에 잠긴 해월은 목욕간 문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귀빈.”

    “으악, 깜짝이야… 원복이구나.”

    해월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뭘 그리 놀라세요. 씻는 거 도와드리려고 온 겁니다.”

    “난 귀족도 아닌데 무슨 목욕 시중까지 들어. 됐으니까 이만 나가 봐도 돼. 어차피 다 씻기도 했고.”

    해월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귀빈이라는 호칭도 이미 충분히 부담스럽다. 누굴 모셨으면 모셨지, 모셔지는 부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도 발도 멀쩡한데 뭔 목욕 시중까지 필요한가 싶기도 했다.

    “예, 갈무리하고 나오세요. 저녁상 준비하겠습니다.”

    원복은 목욕간 문을 닫고 걸음을 옮기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먼저 옷을 갈아입고 마당에 서 있던 연진이 원복에게 다가갔다.

    “어찌 벌써 나와?”

    원복에게 해월의 목욕 시중을 들라 명해 두었는데 원복이 금세 다시 나와서 묻는 것이었다.

    “귀빈께서 시중을 사양하셔서….”

    “그럴 줄 알았다. 한데 왜 그러고 있어?”

    원복이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여서 하는 말이었다.

    “아, 그것이….”

    원복은 연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연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해결할 테니 넌 저녁상을 준비해 놓거라.”

    “예? 도련님께서 직접이요?”

    연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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