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리둥절해하는 연진을 앞에 두고, 해월은 묵묵히 옆에 있던 붓을 들어 자신의 오른 손등에 무엇인가를 그렸다.
무슨 글자 같기도 문양 같기도 했다.
“다 됐다. 아파도 조금만 참으면 돼, 알겠지?”
“그게 대체 무….”
연진이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는 해월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되묻던 순간, 그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미리 술법을 걸어 둔 오른손이 연진의 이마를 툭 하고 쳤다. 가벼운 타격이었으나 연진은 눈앞이 점멸하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으윽!”
연진이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해월은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미안, 미리 설명하면 절대 안 하겠다고 할 것 같아서….”
“이게 대체… 윽!”
“말하지 마, 그냥 최대한 쉬는 게 좋을 거야.”
최소 십 년 이상의 수양이 필요한 일을 두 시진으로 압축하는데 희생이 안 따를 리가 없다.
잠재된 영력 수양을 통해 서서히 일깨우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사술을 이용해 단숨에 깨워 버리는 수도 있었다. 물론 열화와 한기가 동시에 전신을 점령하는 고통을 견뎌야 하긴 하지만.
해월 역시 오래전 느껴 보았던 고통인지라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해월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치유술로 최대한 통각을 옅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바닥에 엎어져 괴로워하는 연진을 바로 눕혀 주었다.
“강한 힘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지. 대가가 좀 세긴 한데 효과도 그만큼 좋으니까 걱정하지 마.”
연진은 질끈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렸다. 반듯한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해월은 원복을 시켜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연진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원복은 앓고 있는 제 주인과 해월을 번갈아 보며 황당무계한 표정을 지었다. 기겁하는 원복과 달리 해월은 한없이 태평하고 무감해 보였다.
“…귀빈께서 이곳에 오신 뒤로 참 별꼴을 다 보는 것 같습니다.”
원복은 지금의 일을 그렇게 평했다. 과연 맞는 말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해월은 작게 웃고는 연진의 옆에 앉아 얼마 전 사 왔던 과자를 한입 먹었다. 그 바람에 원복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지금 도련님께서 앓고 계시는데 과자가 넘어가세요?”
“너한테나 도련님이지 나한테는 제자잖아. 그리고 나도 힘쓰고 있거든? 먹어야 힘이 더 나지.”
해월은 과자를 먹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연진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치유술을 행하고 있었다. 힘을 깨우고 있는 과정에 다른 힘이 흘러 들어가면 신체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연진의 영력을 피해서 정확하게 통각만 옅게 만드는 고난도 기술을 쓰는 중이라, 기력 소모가 심했다. 그러니 단 거라도 먹고 힘내야 하지 않겠나.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원복은 뾰로통한 눈으로 해월을 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월은 아무렇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너도 먹을래?”
“됐어요.”
원복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연진이 앓고 있는데 천연덕스레 과자를 먹는 해월이 못마땅한 탓이었다.
“귀빈은 대체 어찌 그리 많이 드실 수 있는 겁니까. 상차림도 하나 남김없이 다 드시고….”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와 나무껍질)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정신이지.”
굶주려 본 사람만이 아는 배고픈 서러움이 있다. 때문에 먹을 것이 생기면 언제 또 굶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조건 많이 먹게 되었다.
그게 습관이 되어 굶는 일이 별로 없는 지금도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 게 당연해졌다. 그만큼 활동량도 많았기에 딱히 몸에 살이 붙지도 않았다.
“진이도 나더러 그 얘기 하더라.”
원복은 해월의 입에서 나온 진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진…?”
“네 도련님 아명이잖아. 설마 몰랐어?”
“제가 도련님을 모실 때는 이미 자(字)를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몰랐던 것이 당연했다.
“근데 참 별일입니다, 지금껏 누구도 이렇게 도련님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는데… 귀빈께선 도련님께 귀인이신가 봅니다.”
“귀인이랄 것까지야. 악인이면 악인이지.”
해월이 연진을 돕는 이유가 그다지 순수하지 않았기에 한 답이었다. 선의긴 하지만 결코 그 의미 자체의 선의는 아니다. 선량한 사람이 되고 싶은 해월의 이기였다.
“어차피 네 도련님은 앞으로 두 시진은 앓아야 하는데 이참에 농땡이 피우는 게 어때?”
“…도련님 옆에서 이런 얘기 해도 돼요?”
“해도 돼.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속도 울렁거리고, 귀는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서. 깨고 나면 아무 기억 안 날 거야.”
그 깔끔한 설명에 더 말을 보태기도 애매해지자 원복은 짧게 한숨 쉬었다.
“…귀빈께서는 친절하고 다정하신데 가끔은 너무 무심해요.”
원복의 말에 해월은 일순 표정을 굳혔다.
“원복아, 친절한 거랑 다정한 것은 엄연히 달라. 앞으로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땐 그 두 가지를 잘 구분하는 게 너에게 이로울 거야.”
“…네?”
원복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월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하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마.”
“…귀빈께서는 도련님이 걱정되지 않으세요?”
“당연히 걱정되긴 하지만 이것도 이 애가 거쳐야 할 관문이니까. 나는 이 애를 강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내가 없어도 이 저택에서 기를 펴고 살도록.”
“꼭 떠날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럼 떠나겠지. 내가 언제까지고 여기에 머물 거라 생각한 거야?”
해월은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었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 봤자 몇 달 안 될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연진을 단련시키기 위해선 불가항력으로 사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떠나면… 언젠가 다시 오실 거죠?”
“글쎄, 난 원래 한곳에 얽매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애매한 답이었다.
“도련님께서 아신다면 많이 아쉬워할 거예요.”
“아쉬워할 게 뭐 있어. 사는 건 원래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야. 네 도련님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래도….”
“지금 당장 떠나는 것도 아니니 괘념치 마.”
“…예.”
해월은 새삼 원복도 연진도 정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해 봐야 불청객에 불과한 제게 이토록 아쉬움을 드러내니 말이다.
우습게도 그 아쉬움이 싫지 않았다. 이곳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하지만 그러면 안 되었다. 그럴 수 없었다.
몇 년 전, 아버지 선학경과 했던 약속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돈은 계속 보낼게요. 넉넉히 보내도록 노력할 테니 염려 마세요.”
해월은 무던하게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로 마을 어귀에 서서 선학경에게 말했다.
“…어딜 가든 네 걸음은 네 자유다.”
선학경은 전에 없이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해월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제 결심을 선학경에게 들켰다는 걸.
“…그럼 가 보겠습니다.”
“한 가지만 약조해다오.”
그대로 마을을 나서려던 해월을 선학경은 붙잡았다.
“언제라도 좋으니 돌아와. 그거면 된다.”
자신은 그 말에 답을 하지 않았지만, 무언의 약조는 이미 이루어진 뒤였다.
그 뒤로 한 해에 몇 번 안 되었으나 아예 돌아가지 않는 해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선학경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서일까, 아니면 제 본심이 시키는 일일까.
판단하기 어려운 것을 고민하는 것만큼 피곤한 것도 없다.
***
원복이 방을 나서고 해월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는 연진을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각도 채 안 지났으니 아직 한참은 고통에 시달려야 할 터,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해월은 시선을 내리고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연진은 고통이 심한지 손까지 떨고 있었다. 해월은 강한 힘으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안에 있는 온기가 뜨거웠다. 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해월도 이와 같은 경험을 했던지라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잘 알고 있다.
살을 에는듯한 추위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 있는 듯한 열기가 동시에 몸을 뒤섞는 고통.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의 감각이다.
‘사술을 쓴다고 하면 보나 마나 거부할 것 같아서 이리하긴 했는데… 너무 졸렬했나.’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사술은 문자 그대로 사사로운 술법이다.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다루기도 까다로운 덕에 현재는 그 술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해월은 아버지인 선학경으로부터 배운 적이 있다.
‘아버지….’
선학경은 해월의 양부이자 사부이기도 했다.
그는 망국의 주술사 출신으로 온갖 술법을 다루는 데 능했고 해월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영력을 깨우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무예까지. 선학경에게 배우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그토록 강하고 엄한 아버지였지만 한 가지 흠결이 있다면, 그는 절름발이었다. 전쟁에서 패전하며 얻은 상처라 들었다.
해월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내 생각했다. 선학경은 주워 온 아이인 저를 통해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영하가 되겠다고 한 것도 그 이유가 가장 컸다. 하지만 기뻐하리라 생각했던 그는 전에 없이 크게 노했다.
지금도 그가 매질하여 생긴 상처가 흉터로 남아 있다. 아이가 버티기엔 혹독한 환경이었지만, 해월은 도망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버려진 자신을 구해 준 건 사실이었고 그에 대해 이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남루할지언정 혼자인 것이 싫었다. 제 삶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집단에 속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일까.
‘나는 여기서 무얼 하는 거지.’
새삼스레 여러 의문이 들었다.
선학경이 바라던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나는 무얼 원하는 걸까.
해월은 언제나 선학경이 제시한 것들을 성취하며 살았다.
영력을 수련하라 해서 수련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보은하라 해서 보은했고, 퇴마사가 되어 수양을 쌓으라 해서 그 말을 따랐다.
‘…나도 참 역겹군.’
선학경이 어렸던 저에게 사술을 써서 강제로 영력을 깨우치게 했을 때, 어린 자신에게 극악의 고통을 선사하는 선학경의 무심함을 이상하게 여겼다.
어른이 아이를 해하는 행위는 부덕하다는 것을 책에서 보아 알고 있기에 생긴 의문이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제가 연진에게 똑같은 짓을 해 버렸다.
‘결국 나도 당신을 닮았나 봅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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