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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8화 (18/124)

18화

연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따라 해월을 안내했다. 책방으로 향하는 동안 말이 없는 연진에게 해월이 먼저 말을 붙였다.

“무슨 생각해?”

“…아버지 생각이요. 어렸을 때 이 저잣거리를 함께 걸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렇구나.”

연진이 제 아버지의 이야기를 직접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월 역시 무의식중에 고향에 있을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때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는데, 지금은 텅 빈 손으로 걷고 있군요.”

연진은 어딘지 쓸쓸한 눈으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해월은 걸음을 멈추고 그런 그의 손을 그러쥐었다.

“이렇게 하면 안 비어 있지?”

“…예.”

손안에 들어온 타인의 온기를 붙잡았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맞잡고 저잣거리를 걸었다.

시전 상인들이나 지나는 몇몇 행인들이 연진을 알아보고 수군댔다.

“광인이 되었다더니, 멀쩡해 보이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살다 살다 강씨 둘째 공자가 저잣거리에 나온 꼴을 다 보고….”

“저 머리 짧은 사내는 또 누구인가.”

그들 딴에는 속삭이는 모양이었지만, 엄연히 다 들렸다. 해월은 앞장서고 있는 연진을 흘끔 보았다.

“혹시 불편해?”

“무엇이요?”

연진이 되레 반문했다.

“얼굴이라도 가릴 걸 그랬나… 내가 나오자고는 했지만 수군대는 소리를 막아 주지는 못하니까. 물론 원한다면 귀를 잠시 멎게 해 줄 수는 있는데….”

“됐습니다. 그게 더 불편하겠습니다.”

귀가 안 들리게 되는 상상을 한 연진이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는데 달가울 리 없잖아.”

“달갑진 않지만 어쩐지 이전처럼 불편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말씀대로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허깨비 같은 말들이니까요. 그리고….”

연진이 잡은 손에 바짝 힘을 주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부도 제 곁에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 산뜻한 미소가 봄바람을 타고 해월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방금… 뭐지?’

이상한 감각이었다.

“사부?”

“어…?”

잠시 멈칫했던 해월이 넋이 나간 채 반문했다.

“갑자기 멈추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가자.”

***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진한 닥나무 향과 묵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마음이 안정되는 담백한 향이었다. 연진을 책벌레라 놀리긴 했지만, 해월 역시 책을 좋아했다.

해월은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냥 직접 시범을 보여 주며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역시 이론부터 알고 영력을 수련하는 것이 우선일 듯하여 최대한 정리가 잘 된 책들 위주로 골랐다.

긴 서가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검지를 까딱이며 눈에 띄는 책들을 꺼내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딱 적격인 책은 없네. 아쉽게 됐군.’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깨끗한 땅이니만큼, 퇴마술에 관한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그게 당연하다. 퇴마사라는 업은 그리 떳떳할 수 없으니까.

‘어떤 게 가장 좋을까.’

처음 누군가의 사부가 되어 제자를 가르치게 된 만큼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신중해지고 싶었다.

영력에 관한 책을 살피는 해월과 달리 연진은 학문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있었다.

해월은 살포시 웃었다. 연진은 서책과 마주하고 있을 때 가장 진솔해 보였다. 세상의 모든 불행과는 완전히 무관한 사람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게 되었다.

연진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 해월 쪽을 쳐다보았다.

“어찌 그리 봅니까.”

“그냥, 뭔가 편해 보여서.”

“사부야말로 편해 보입니다.”

“내가?”

분명 기분이 좋은 것은 맞았지만 편해 보인다는 말은 거의 처음 들은 터라 곧바로 반문이 나왔다.

“예. 아까부터 무척 편해 보였습니다.”

“…내가 그랬구나, 몰랐어.”

해월의 마음에는 여유가 없다. 그것이 마음의 영역을 넘어 몸까지 점령한 터라 항상 바쁘게만 움직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렇게 느리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몸을 맡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무엇에 기인한 부끄러움인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초라한 자신이 누군가를 이끌어 줄 만한 사람이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해월은 서둘러 골라 둔 책들을 품에 안고 책방 주인장에게 계산을 마쳤다.

“무거울 텐데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아. 별로 안 무거워.”

정말 무겁지 않아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거절을 다르게 받아들인 연진은 재빨리 책을 뺏어 들었다. 해월이 다시 손을 뻗었으나 연진은 책을 꽉 붙들고 놓지 않았다.

“내가 든다니까.”

“팔 아프잖아요.”

“네가 들면 양심이 아파. 어린애 짐꾼 시킨 것 같아서 찔린단 말이야.”

“양심에 찔리는 건 제 쪽인 것 같은데요.”

“응?”

연진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해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소리쳤다.

“야! 너 나 지금 어리게 생겼다고 놀리는 거지!”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연진은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해월은 씩씩댔지만 그렇다고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분하기만 했다.

해월은 자신의 어려 보이는 외모가 싫었다. 단순히 동안으로 인해 생기는 오해가 싫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차마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도 뭐해서 그저 연진의 뺨을 작게 꼬집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연진은 뭐가 좋은 건지 뺨을 꼬집히고도 피식 웃어댔다.

“뭐가 그리 웃겨.”

“그냥, 꽤 즐거워서요.”

“참 나 어이가 없… 어?”

고개를 내젓던 해월이 무엇인가를 보고 말끝을 올렸다. 연진은 해월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월병이다!”

해월이 활짝 웃으며 팔랑 걸음으로 달려가 과자가 진열된 상판 앞에 섰다. 검푸른 두 눈동자에 활기가 감돌았다.

상인은 그런 해월을 보고 껄껄 웃고는 말했다.

“단 것 좋아하는가?”

“예, 무척 좋아합니다. 없어서 못 먹는 수준인걸요.”

형형색색, 그 빛깔도 고운 달달한 과자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릴 적엔 가난해서, 크고 나서는 돈 아끼느라 잘 못 먹었지만, 지금 해월의 수중에는 연진이 준 돈이 있었다. 아까 책을 사고 조금 남은 돈이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에구머니, 이 많은 걸 다?”

“예, 얼마면 됩니까.”

“다 합하면 은화 한 닢쯤은 필요할 터인데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전부 주세요.”

멀리서 바라보던 연진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누가 한주 사람이고 누가 외지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 다 양손 가득히 짐을 들고 있게 되었다. 물론 해월은 과자만 들고 있었다.

“그거 정말 다 먹을 겁니까.”

연진은 해월의 손아귀에 가득 있는 과자들을 흘긋 보며 말했다. 냄새만으로도 입안이 아릿할 정도로 단 것들이었다.

“응, 다 먹을 거야.”

해월은 아주 당차고 씩씩한 음성으로 답했다. 사뭇 결의에 차 보여서 약간 웃기기도 했다.

“대체 그 쪼그마한 몸에 뭐가 그리 많이 들어가는 겁니까.”

연진이 지금껏 지켜본 바로 해월은 상당한 대식가였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뱃속에 거지가 들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그렇게 먹어도 살이 오르기는커녕 마른 체형인 해월의 몸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 안 쪼그맣거든? 키도 너랑 비슷하잖아.”

해월은 많이 먹는다는 지적보다 쪼그맣다는 표현이 더 거슬렸다.

“그래도 제가 좀 더 크잖아요.”

연진은 단호하게 사실만을 말했다. 두 사람은 언뜻 키가 비슷해 보이지만 연진이 조금 더 컸다.

짜증 나긴 하지만 그 말이 맞는지라 해월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까 상인이 준 과자 하나를 꺼내 입안에 넣었다.

“오, 이거 맛있다.”

“…많이 드십시오.”

연진은 뭐라 하기도 지쳐서 그냥 체념했다.

***

사제의 연을 맺고 정식으로 강론을 시작하게 된 뒤로 그들의 일상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연진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이는 모두 해월 덕이었다. 대단한 목표나 대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충실했다.

해월은 영력이나 술법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을 연진에게 가르쳤다. 연진은 하나를 알면 백을 깨우치는 놀라운 습득력을 보여 주었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제자였다.

덕분에 꽤나 즐거웠다. 이와 같은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을 것을 알면서, 또다시 헛꿈을 꾸게 될 정도로.

그럴수록 해월은 냉정을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입가엔 가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영력은 깨끗하고 절대적인 힘이야. 천신이 준 힘이라고 해서 신성력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보통의 해월은 늘 가볍고 천진한 태도만 보였으나 가르치는 일을 할 때는 한없이 진지했다.

“영력을 잘만 수련하면 각종 술법을 배우며 여기저기 요긴하게 쓸 수 있어.”

“한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과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왜 못 해? 내가 가르쳐주는 건데.”

“그래도 타고난 소질이 당락을 결정한다고 했잖습니까. 수양에 필요한 세월도 꽤 되고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넌 소질이 있거든.”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제가요?”

“응, 넌 기가 아주 강해서 분명 잠재된 영력도 뛰어날 거야. 막혀 있는 길만 뚫어 주면 금세 성장할 수 있어.”

“막혀 있는 길을 뚫는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아직 배우지 않은 부분인지라 연진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세상에 영력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어. 단지 그게 봉인돼 있고, 영력을 쓰는 사람들은 수양으로 그 봉인을 깬 것뿐이지.”

“예?”

설명이 다소 간결하고 추상적인지라 연진이 반문했다. 해월은 느닷없이 연진의 이마 쪽 머리칼을 정리하며 싱긋 웃었다.

“원래 이런 거 쓰면 안 되긴 하는데… 정도를 따르기엔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

“……?”

“영력을 수련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그 ‘봉인’이라는 걸 깨는 데 긴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난 그 세월을 딱 두 시진으로 압축시킬 수 있어.”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해 보면 알아.”

해월은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백번 설명하느니 한 번 보여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였다. 벌써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힘을 빨리 일깨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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