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글쎄요, 저도 원복이처럼 이름 따라 살진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연진이 자조적인 말을 입에 올렸다. 해월은 그런 그의 이마를 검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아까 네가 말했잖아. 가난이 죄가 아니라면 예기치 못한 불행도 죄가 아니겠지.”
“…….”
“이 머리는 너무 복잡해서 탈이야. 외관이 잘난 탓에 생긴 부작용인가? 이런 걸 보면 신이 좀 공평하긴 한가 봐.”
“예…?”
“이 얼굴이면 단순하게 살아도 될 텐데 말이야. 나였으면 벌써 한량 됐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연진은 제 이마를 누르고 있는 해월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는 손을 옮겨 연진의 볼을 꼬집는 해월이었다.
“그래도 걱정 마, 난 한 번 한 약속은 지켜. 난 무조건 너한테 잘해 줄 거야.”
“…이 손부터 치우고 말씀하시는 게 더 설득력 있을 것 같군요.”
계속 꼬집히고 있는 탓에 연진은 표정을 구기며 대놓고 질색했다.
“이건 훈육의 일환이고.”
해월은 키득거리며 천진하게 웃었다. 이윽고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목소리가 나왔다.
“진아.”
“…….”
“네가 원하는 바가 있다면 난 널 도울 거야.”
해월은 알려 주고 싶었다. 겁먹은 불쌍한 새도 힘차게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아직 자신조차 완벽한 해답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태가 이어지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까 말해 봐, 무얼 배우고 싶은지.”
“저는….”
연진은 해월의 온기 어린 말에 감화되어 사제의 연을 맺긴 했지만, 솔직히 배우고 싶은 것이 없는 터라 답을 망설였다.
연진은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 잘 몰랐다. 성취의 즐거움은 알았지만, 딱히 무언갈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공허하게 보낸 시간이 길었던 탓에 마음을 비우는 게 습관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배우고 싶고, 얻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전부요.”
“응?”
“전부를 배우고 싶습니다.”
“전부? 진짜?”
그 포괄적인 말을 들은 해월은 놀라며 반문했다. 그러나 연진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답했다.
“예.”
마주한 올곧은 눈에선 한 치의 거짓도 허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연진이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나아가게 할 무언가를.
해월은 이미 한차례 약속했다. 그를 잘 대해 주기로. 약속을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하여 한참의 고민 끝에 해월은 계획을 짜냈다.
“진아, 너 돈 좀 있지?”
“예? 있긴 한데….”
“그것 좀 쓰자.”
난데없는 해월의 요구에도 연진은 군말 없이 은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내놓았다. 은화의 개수를 세어 본 해월은 싱긋 웃었다.
“이거면 충분하겠어.”
“무얼 하려고요?”
“수학의 기본은 서책이지. 책 사러 갈 거야.”
“책이라면 서고에도 많습니다.”
연진은 책을 좋아하는 만큼 암암리에 책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양이 많을 뿐 종류가 다양하진 못했다.
“에이, 그중에 영력이나 퇴마에 관한 건 없잖아. 새로 사야 할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
해월은 대뜸 일어나서 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진은 멀뚱히 해월의 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해? 얼른 안 잡고. 책방에 같이 가야 할 거 아니야.”
“예?”
“나 외지인인 거 잊었어? 여기 지리 잘 몰라. 원복이도 없는데 나 혼자 가라고 할 참이었던 거야?”
연진과 함께 별채에만 머물다 보니 지리를 파악할 새가 없었다. 물론 길을 잘 알았다 하더라도 연진을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저는 외출을….”
“일단 손부터 잡아. 나머지는 일어난 다음부터 생각해.”
해월의 재촉이 이어지자 연진은 얼결에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씨 가문에 대한 건 원복이한테 설명 많이 들어서 알고 있어. 네 숙부나 사촌 형은 본관보다 별관에 주로 머문다면서?”
“…그곳이 이곳보다 더 화려하고 넓어서 그럽니다.”
본관도 사시사철 연회를 여는 것처럼 화려한데 별관이 더 화려하다니. 기함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해월은 내심 경악했다.
“그자들이 설마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어? 잠깐 나가는 것쯤은 별로 신경 안 쓸 거야.”
“그렇다 해도 나가는 건 좀….”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 사부가 다 알아서 책임질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호언장담했지만, 연진은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였다. 해월을 못 믿는 것인지, 저 자신을 못 믿는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애초에 위험한 일입니다. 제가 지금껏 스승이 없었던 것은 제가 원한 일이기도 했지만, 숙부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알아, 내가 너한테 제대로 된 스승 노릇을 하는 순간부터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겠지. 강석요는 내가 금방 떠날 거라 생각할 테니, 지금 상황은 정말 짜증 나는 변수일 거야.”
안 봐도 뻔했다. 연진의 성장을 방해하고자 핍박했는데 웬 퇴마사 하나가 굴러들어와 훼방을 놓은 셈이니. 화가 안 나는 것도 이상하다.
“다 알면서… 왜 이러는 겁니까.”
“뭐? 지금까지 일을 다 잊기라도 한 거야? 난 사부고, 넌 내 제자야. 거기에 다른 이유가 필요해?”
해월이 타박하자 연진은 말이 없어졌다.
“일단 넌 이 별채에서 나갈 필요가 있어. 널 담기에 여긴 너무 좁잖아.”
“…알겠습니다, 나갈게요.”
그는 짧은 망설임 끝에 답했고, 해월은 활짝 웃으며 연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단정했던 그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졌다.
“…제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머리는 왜 자꾸 쓰다듬는 겁니까.”
해월은 곧잘 연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다. 연진은 그게 거슬렸으나 싫지만은 않았다.
“기특해서 쓰다듬는 거지. 어린애들 칭찬해 줄 때 종종 그러잖아.”
“저 안 어립니다.”
나이 얘기에 발끈하는 것을 보면 아직 미성숙한 티가 났다.
“그래, 그래 너 안 어려.”
어쩐지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였다. 해월은 진심으로 연진을 어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과 비교해서 어린 것이지.
연진은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이내 군말 없이 나갈 채비를 했다. 준비랄 것도 없는 게 그저 외출복을 꺼내 입었을 뿐이었다.
항상 연진의 가벼운 실내 차림만 보던 해월은 강씨 세가 특유의 군청색 옷을 입은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차려입으니까 훨씬 근사하네.”
칭찬이 어색한지 연진은 뒷덜미를 매만지며 멋쩍어했다.
“오랜만에 입어서 이상합니다.”
“왜? 잘 어울리기만 하는데.”
해월은 연진에게 다가가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어깨를 툭툭 쳤다.
“준비됐어?”
“모르겠어요. 준비된 것 같기도, 안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저택 밖으로 아예 안 나간 자는 얼마나 된 거야?”
“…삼 년쯤 됐습니다.”
삼 년 전, 장로 몇몇이 연진을 내세워 강석요를 몰아내려 작당하다 적발당한 뒤로, 연진은 그의 박대를 온전히 견뎌 냈다.
그 후 모든 것을 체념한 연진은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해월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구나.”
해월은 그 짧지 않은 시간을 대강 짐작했다.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해월에게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았다.
눈앞에 있는 자신의 제자를 이끌어 주는 것, 그것이 해월의 역할이다.
왕도를 모르니 헤매기도 하겠지만 그런 사부라도 괜찮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 것이다.
“이제 가자.”
“…예.”
사제가 처음으로 함께 외출하는 순간이었다.
***
“한데, 밖에 있는 하인들은 어찌할 셈입니까. 사부 혼자라면 출입이 자유롭겠지만, 함께라면 어려울 텐데요.”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내가 해결할 거니까.”
홀로 문간에 다다른 해월은 문 앞에 서 있는 장정 둘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무슨 일이오.”
장정들이 뒤돌아서자 해월읕 싱긋 웃었다.
“죄송하지만 한 시진 정도 주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사내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해월은 단숨에 손날을 세워 그들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장정들은 억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소리에 연진은 화들짝 놀라 문간에 다가섰다. 그런 연진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쓰러진 장정들을 편히 앉혀 놓고 있는 해월이었다.
“…어떻게 한 겁니까.”
“혈 자리를 잘 건드리면 이렇게 잠시 기절시키는 게 가능해. 너도 나중에 알려 줄게. 근데 매번 나갈 때마다 이럴 순 없으니 매수를 하든 협박을 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것 같아.”
지나치게 태평한 어투였기에 연진은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그럼 이제 갈까?”
조금 전 장정들을 쓰러뜨린 자가 할만한 음성과 표정은 아니었지만, 연진은 그저 해월을 따랐다. 저택을 가로질러 가는 도중 연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때와 맞지 않는 웃음인지라 해월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웃어?”
“그냥…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인가 해서요.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그리 미련하게 굴었나 싶고.”
종종 마주치는 하인들이나 문하생들이 저를 보고 흠칫 놀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별일이 없었다. 스스로를 가둔 새장 밖은 많이 변한 것 같기도,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내게는 쉬운 일이었지만 너에겐 어려운 일이었겠지. 사람마다 어려운 건 다 다른 거니까.”
해월이 답했다. 어떤 일이 쉽고 어렵고는 각자의 문제일 뿐 잘못이 아니라고.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 어려운 일을 네가 대신해 줘야 해. 말했지? 나 길 잘 모른다고.”
“저도 저택 밖으로 나간 지 오래되어 책방까지 안내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연진은 자신 없는 모습을 보였다.
“네가 어렸을 때랑 크게 바뀌지 않았을 거야. 보통은 그러니까.”
“그런가요.”
그들은 마침내 저택의 대문을 넘어섰다.
커다란 대문을 지나 청명한 하늘을 마주한 연진은 무언가 속에서 울리는 것을 느꼈다. 꼭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딛으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전부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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