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16화 (16/124)
  • 16화

    관계를 새로 정리한다는 것은 무슨 특별한 힘이라도 있는 걸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던 사이에 심지어 첫 만남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언약을 나눔으로써 무엇인가 바뀐 기분이었다.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해월은 더 이상 외지에서 온 불청객 퇴마사가 아니었고, 연진 또한 밥맛없고 가여운 귀족 도련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사부가 되었고 제자가 되었다.

    ‘머문다는 거, 좋은 거였구나.’

    고향을 떠나 각지를 떠돌면서도 한곳에 오래 머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해월은 제 발밑이 가시밭이라고 생각했다. 발을 뗄 수도 붙일 수도 없어서 그저 움직여야만 했고, 그런 일을 아무런 의미도 목표도 없이 반복해 왔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발을 움직이는 것에만 익숙했다. 멈추는 일은 낯설었다.

    그런데 한 자리에 멈추자마자 마치 그간의 일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더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의 긴장이 모두 풀려 그저 현재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지금의 시간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좋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완연한 봄이 되었다.

    온화한 공기 속에 꽃내음이 섞여 코를 간질였다. 엄혹한 겨울을 이겨 내고 꽃을 피워 낸 나뭇가지 사이에 작은 새들이 내려앉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따사로운 햇볕이 조화로웠다. 평화로운 오후의 시간이었다.

    해월은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의 짧은 머리칼이 바람의 춤사위에 따라 흔들렸다.

    영력의 기본은 정신의 수양이다.

    올곧은 정신과 마음을 가져야 더욱 강한 힘을 쓸 수 있기에, 해월은 종종 이렇게 명상을 하곤 했다.

    정좌한 채로 바람을 맞고 있는 찰나. 문득 시선이 느껴져 책을 읽는 연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쳐다보다가 나 뚫리겠다.”

    연진이 제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무의식중에 보게 된 모양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목석이나 다름없던 그였기에 별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월은 싱긋 웃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반하지 마라, 곤란하니까.”

    당연하게도 연진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보나 마나 경악하거나 질색하는 표정일 게 뻔해 부러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원복이가 잘 안 보이네.”

    원래라면 원복이 나타나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원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 부모의 기일이라 아마 향을 피우러 갔을 겁니다.”

    “아… 요 며칠 원복이가 우울해 보이던 게 그런 연유였구나.”

    해월은 놀라지도, 그렇다고 안타까워하지도 않는 담백한 반응을 보였다.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어서였다. 그 나이 아이들은 부모나 형제 얘기를 곧잘 하지만 원복은 단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궁핍한 일반 백성들이 가족을 잃고 홀로 생활하는 것쯤은 흔한 일이다. 그래서 딱히 놀라지 않았다.

    “원복이는 언제 부모를 잃은 거야?”

    “…몇 해 전, 역병이 잠깐 돌았을 때였습니다. 원복이의 양친은 외거하던 하인들이었고, 부모를 잃어 오갈 데 없는 그 아이는 자연히 저희 가문의 가솔이 됐습니다.”

    그렇게 아주 어릴 적부터, 원복은 하인이 되어 일했다.

    “한주 땅은 정화된 지역이라 역병이 돌지 않을 텐데, 별일이네.”

    “황제 폐하의 총애를 잃어 지방 전체가 신궁의 정화를 받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공기도 맑고 땅도 깨끗해. 뭐, 그렇다고 역병이 유행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의아한 점이 있었지만 넘어가지 못할 만큼 걸릴 일도 아니었다.

    해월은 원복의 부모님에 대해 곱씹어 생각했다. 본적은 없지만, 구김살 없고 밝은 원복을 보니 그 부모님도 분명 좋은 사람들이었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을 망자의 세계로 이끄는 원인은 의외로 흔하고 또 명쾌했다.

    “그거 알아? 원복이의 양친이 돌아가신 건 역병 때문이 아니야. 가난 때문이지.”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은 가난할 때 쉽게 죽어. 돈이 없으면 자는 곳도, 먹는 것도 죄다 변변치 않고 자연히 몸이 상해. 그러다 죽는 거고.”

    해월의 목소리는 여상했으나 전에 없이 냉소적인 말이었기에 연진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해월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 어린애가 손이 다 트도록 하인 노릇을 하고 있으니 참 이름 따라 못 살고 있는 셈이지. 안타깝지만, 가난은 곧 값이 비싼 죄나 다름없어.”

    죗값이 높다는 게 가난의 흠이다.

    원복의 이름 뜻은 복을 원한다는 의미였다. 자녀와 가정에 평안을 바라고 지은 이름이겠지만, 그 의미가 무색하게도 부모는 죽고 어린 아들은 귀족가에서 하인 일을 계속하고 있다.

    세상사는 이토록 우습다.

    해월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 손끝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연진은 그런 그에게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가난이 곧 그 사람의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불공평한 일을 누가 무슨 권리로 정한단 말입니까.”

    단호하면서도 평이한 대꾸에 해월이 멈칫했다. 그대로 눈꺼풀도 깜박이지 않고 연진을 응시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자 제 몸속 깊은 곳이 울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썩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답하며, 해월은 작게 웃었다. 거의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연진이 분명하게 제 의견을 피력한 것이.

    문득 앞을 본 해월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마당으로 나가 그것을 주웠다.

    “뭡니까?”

    “새야.”

    해월은 손 위에서 버둥대는 작은 새를 연진에게 보여 주었다. 볼품없는 회색빛 꽁지를 가진 새끼 새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인지 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날개가 꺾여 못 나는 모양입니다.”

    날지 못하는 새의 생존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아직 작은데 일찍이 날개가 꺾였으니 다시 비상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연진의 눈동자에 한기가 깃들었다.

    그때, 해월이 말했다.

    “날 수 있어.”

    “날개가 꺾였는데 무슨 수로요?”

    “이 애는 아주 자유로운 새일 거야. 날개가 꺾일 정도의 장애물이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힘차게 비행했겠지.”

    새가 일러준 것도 아닐 텐데 해월은 다 아는 듯이 말을 했다. 꼭 대화라도 해 본 사람처럼.

    새의 사연을 알 리도, 공감할 리도 없는 연진은 그저 해월과 새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다시 날게 해 주면 돼. 용감한 애니까 작은 도움만으로도 금방 다시 날아갈 거야.”

    “꺾인 날개를 다시 만들어 주기라도 할 겁니까?”

    의문과 비관이 섞인 물음이었다.

    “내가 신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난 그저 약간의 치료만 해 줄 거야.”

    해월은 낑낑대는 새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손끝으로 영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불편해 보이던 새의 움직임이 유연해지더니 금세 날개를 활짝 펼 정도가 되었다.

    “……!”

    연진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영력이 뛰어난 이들이 치유술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책에서 보았던 적이 있다. 하나 신성하고 강력한 힘이니만큼 어지간한 수양으로는 결코 쓸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방금의 해월은 놀랍도록 순식간에 새의 날개를 치료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새는 날아가지 않고 해월의 손바닥에만 머물러 있었다.

    “…치료가 덜 된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 이 애는 단순히 겁먹은 것뿐이야.”

    “그걸 사부가 어찌 압니까.”

    “딱 보면 알겠는데? 너같이 둔한 녀석은 모르겠지만.”

    연진은 둔한 해월에게 둔하다 지적받은 것이 거슬렸지만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상태를 보니 한동안 제대로 못 날다가 이 집 마당까지 다다른 것 같아.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걸 잊었을 수도 있어.”

    아직 어리고 성장하지 못한 만큼, 잠깐의 실패와 불행이 자신의 평생을 점거했다고 단정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포기가 익숙해지고 나아가길 그만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연진처럼.

    “날 수 있게 해 줄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려 그럽니까.”

    “다 방법이 있지. 등만 떠밀어 주면 돼.”

    해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 끝에 서서 두 손으로 떠받든 새를 가만히 보았다. 새는 여전히 날개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할 수 있지? 넌 자유로운 애니까 금방 날 수 있을 거야.”

    화답하듯 작게 지저귀는 소리를 들은 해월은 웃으며 새를 향해 입바람을 불었다. 풍술을 사용했기에 잇새에서 나온 흐릿한 호흡은 작은 바람이 되어 새를 날려 보냈다.

    공중에 떠오른 새는 조금 움찔하다 이내 방향을 잡고 힘차게 날갯짓했다. 자유롭게 창공을 가르는 회색빛 날개에 눈부신 햇살이 비쳤다.

    그 모습을 본 해월은 뒤돌아 연진을 향했다.

    “봤지? 날 수 있다고 했잖아.”

    “정말 날았어….”

    연진이 그답지 않게 흐릿한 답을 했다. 그의 시선은 날아가고 없는 새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해월은 씩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회백이는 잘 갔을 거야.”

    “…회백이요?”

    “방금 날아간 새 이름.”

    “그런데 왜 회백이 입니까.”

    “왜냐니. 회색 깃털을 가졌으니 회백이인 게지.”

    작명의 기준은 단순명료했다. 근데 이름을 떠올리니 자연히 궁금한 것이 생겨 해월은 호기심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아명이 있지?”

    귀족가에서는 흔히들 아명을 짓는다. 아명은 본 이름을 지을 때까지 대신 부르는 이름이다.

    민가에서는 이름이 그저 부르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만, 귀족가에서는 그 뜻이 조금 다르다.

    앞으로 평생을 부를 것이기에 신중하게 엄선하여 본명을 짓는 동안, 유년기까지만 부르는 이름. 그게 바로 아명이었다.

    “있습니다만… 하지 마십시오.”

    “내가 뭘 할 줄 알고 대뜸 하지 말래?”

    시작도 해 보기 전에 가로막힌 것 같아 해월은 입술을 삐쭉이며 불만을 내비쳤다.

    “알려주면 아명으로 부를 생각이잖아요.”

    “…너 진짜 똑똑하구나.”

    눈칫밥을 먹고 자란 탓인지 연진은 눈치가 아주 빨랐다.

    “다 컸는데 아명으로 불려서 뭐 합니까.”

    “아명으로 부르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잖아. 장수하란 뜻이지.”

    “퇴마사가 그런 미신을 믿으면 어떡해요.”

    “한 번만 알려 줘.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연진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해월의 간청에 낮게 한숨 쉬며 말했다.

    “…진입니다.”

    “고울 진(縝)? 웃을 진(辴)?”

    “나아갈 진(進)이요. 그 글자를 따서 연진이란 이름이 된 겁니다.”

    나아갈 진. 멈춰 있는 그에게는 모순적인 이름이었다. 하지만 꽤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좋은 이름이네. 너랑 잘 어울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