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탕약을 가운데 놓고 서로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해월은 침을 꼴깍 삼키며 심호흡했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된 일이지만 전혀 적응되지 않았다.
누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했던가. 한 번은 어려웠고 두 번은 더 어려웠다.
“드세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마음의 준비하다가 아침나절 다 지나겠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해월은 눈을 딱 감고 숨을 꾹 참은 채 단숨에 탕약을 들이켰다. 너무 쓰고 맛없는 데다 안 좋은 기억까지 떠올라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으으, 맛없…어?”
그때, 입안에 무언가 단맛이 퍼져 나갔다. 징얼거리는 해월의 입안에 연진이 무언가를 넣어준 것이다.
“뭐야 이건…?”
“설탕으로 만든 과자입니다.”
“…맛있다.”
해월은 입에 들어온 과자를 혀로 굴리며 단맛을 음미했다.
연진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단 거 하나 입에 들어갔다고 눈에 띄게 표정이 풀어진 해월이 웃겨서였다. 정말 저보다 연상이 맞긴 한 걸까 의문이었다. 생김새도 하는 짓도 영락없이 소년 같은데 청년의 나이라니 영 믿기지 않았다.
한편, 해월은 저를 향해 웃고 있는 연진을 믿기지 않는듯한 표정으로 보았다.
“어? 너 지금 웃었어?”
“…그럴 리가요.”
연진은 순식간에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했다.
“아닌데 분명 웃었는데?”
“착각입니다.”
그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저는 잘못 보지 않았다. 분명 연진이 웃고 있었다.
‘웃으니까 보기 좋은데, 좀 웃고 살지….’
늘상 가식적이고 싱거운 웃음만 지었던 연진에게서 진심 어린 미소를 본 것 같아 신기했다. 연진은 그의 불우한 환경 탓인지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했고 해월은 그것이 신경 쓰였다.
해월은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 있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 대상이 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노인과 아이. 흔히 약자들에게는 조금 더 진심을 담아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연진을 아이라고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성장한 감이 있어 우습긴 하나, 적어도 해월의 입장에서 그는 아직 아이였다.
“웃으니까 보기 좋네.”
“…….”
“너 말이야 항상 차가운 표정만 지으니까 하나도 안 귀엽잖아. 좀 웃고 살아.”
해월은 연진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양 뺨을 잡고 입매를 위로 올렸다.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이 구겨지자 꽤나 웃긴지라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봐, 이러니까 귀엽잖아.”
“…미쳤습니까?”
“누가 맨날 맛없는 거 먹여서 미쳤다, 왜?”
해월은 잡았던 뺨을 놓아주었다.
“이제 막 성인 된 놈이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지내면 어떡해. 풍류도 즐기고 그래야지.”
“…사부가 무슨 상관입니까.”
“사부니까 상관하지. 그러고 보니 이제 사부라고 곧잘 부르네. 약간 감동인걸?”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정말이었다. 터놓고 말해서, 해월 역시 연진이 저를 많이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지금껏 제가 선 넘는 행동을 여러 번 했었는데, 그때마다 연진은 짜증 어린 표정만 지었을 뿐 결코 역정 내지는 않았다. 표현은 안 해도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호칭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니까요. 특별한 건 아닙니다.”
그 말에 해월은 잠깐이나마 연진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던 저 자신을 매우 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한마디를 해도 정 없게 하는구나.’
그래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으니까.
지금껏 지켜본 결과, 연진은 가진 재능이 많았다.
학식은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나고, 자신이 아무리 도망쳐도 금세 꼬리가 잡힐 정도로 몸을 쓰는 일도 능했다. 무엇보다 연진의 기가 강하다는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 비범한데… 영력을 수련 안 하기엔 아깝단 말이지.’
그런데 숙부 때문에 그 재능을 썩히고 산다니 아까워서 못 견디겠다.
해월은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지만, 연진은 아니었다. 명문 세가 공자이니만큼 앞으로 기회도 많을 것이고, 더 좋은 미래를 누릴 수 있었다. 그저 연진이 저와는 다르게 살길 바랐다. 가벼운 바람이었다.
“근데 너 정말 나한테 뭐 배울 생각 없어?”
해월은 이제 습관이 된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없습니다.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 해 왔습니다.”
“학식이야 내가 너보다 나을 게 없어 보이지만… 너 무예는 좀 해?”
강씨 세가가 대대로 무인 가문이다 보니 연진도 풍채가 좋고, 체격이 다부졌다. 그가 무예를 수련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저 정도 체격이라면 자연히 평균 이상의 실력을 갖췄을 것이다.
“…해 본 지 오래돼서 모릅니다.”
“그럼 다시 배우면 되겠네. 기본적으로 근력이 좋으니까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뭐부터 할까, 검술? 체술?”
“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네 입으로 나 사부 대접해 준다며. 그래서 저 맛없는 것도 만날 마시게 했잖아. 뭐 결과적으로 나만 좋은 일이지만.”
“그건….”
해월은 연진의 생각을 꿰뚫어 보곤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며칠 안 가 떠날 테니까 그 기간만 딴청 피우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
연진은 침묵했다. 해월의 말이 맞아서였다.
“괜히 반발심 생기네.”
“…….”
“네가 원한다면 몇 달이고 머물러 줄 수 있는데.”
몇 달까지는 솔직히 무리였지만, 어차피 거절할 게 뻔해서 되는대로 말했다.
“원하지 않는다면요.”
“원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나 너한테 관심 생겼거든.”
억지로 주는 관심도, 얄팍해 하루아침에 사라질만한 관심도 아니었다.
해월은 싱긋 웃으며 연진의 손을 잡았다.
“난 너한테 어쩌다 굴러 들와서, 널 괴롭히는 퇴마사 나부랭이쯤이겠지만…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니겠어? 난 네게 도움이 되고 싶어.”
연진은 저를 향해오는 지긋한 시선을 마주했다. 해월의 눈에서는 어떠한 악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타적이고 따뜻한, 선의의 시선이었다.
연진은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않고,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지난 며칠간 해월 덕에 소란스럽게 지냈었다. 그는 줄곧 해월이 떠나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해월이 없는 이 별채를 상상해 보니 적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러지….”
연진의 작은 중얼거림에 해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뭐라고?”
연진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포기가 빠른 만큼 수긍도 빨랐다. 이젠 인정한다. 자신이 어느새, 옆에 있는 해월의 존재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해월에게는 다른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허물이 없었다. 모두가 저의 불행을 동정하기 바빴다. 저는 신세를 한탄할 겨를도 없이 그 시선들에 둘러싸여 숨이 막혀야만 했다.
“…제 이야기는 원복이에게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뭐, 대충은.”
해월은 놀란 마음을 감추고 간단하게 답했다.
‘다 들었나 보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연진은 새도 되고, 쥐도 되나 보다. 도대체 못 듣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전 포기하는 게 익숙합니다. 이대로가 좋아요. 그러니 절 동정하는 것이라면 이쯤에서 관두십시오.”
연진은 해월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리며 냉담히 말했다. 해월은 양손을 뻗어 연진의 뺨을 부여잡고 저를 보게 했다.
“……!”
느닷없이 뺨을 잡힌 연진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해월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널 왜 동정해. 동정할 거면 네가 나한테 하는 게 더 맞지 않겠냐.”
“…….”
“난 어렸을 때 야산에 버려졌고 양아버지가 그런 날 거둬 주셨어. 근데 엄청 엄한 분이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매를 맞았어.”
해월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 무지하게 아팠지. 뭐 지금은 그런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에게 보은하려고 각지를 떠돌며 퇴마사 일을 하는 중이야.”
그것은 해월의 어깨에 있는 짐이었다. 하지만 결코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짐. 은혜라는 탈을 쓴 부담을 어떻게 떨쳐낼 수 있을까. 가끔은 숨이 막힐 듯 속이 답답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만하면 도리를 다했다고 외치고 있기도 했다.
혹자는 해월을 두고 어리석다 할 것이다. 다 커서도 어린 시절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다고. 하지만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살지 않는 방법을 모르기에.
“너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습니다.”
“…고마워.”
연진의 말이 빈말이더라도 해월은 개의치 않았다. 모든 걸 바치고 해내야 하는 삶은 고단했고, 각지를 떠돌며 생활하는 것이 제가 누리는 일말의 자유이자 소극적인 일탈이었다.
“내가 더 불행하니 네 불행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길 하려는 게 아니야. 불행을 어떻게 저울질하겠어. 각자의 인생이고, 각자의 삶인데.”
“…….”
“비록 알게 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았지만, 난 네가 신경 쓰여. 만약 이대로 떠나면 네가 눈에 밟힐 것 같아.”
진심이었다.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연진이 계속 생각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한들 뭘 할 수 있습니까.”
체념이 가득 묻어난 어조였다. 포기가 익숙한 사내의 음성이었다.
“꼭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만 해? 좀 부질없더라도 그냥 하면 되는 거지.”
“…난 당신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숙부님은 제가 가주의 자리를 탐낼까 늘 압박하고, 주변 사람들은 저를 광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진은 아버지가 죽은 후로부터 줄곧 배척 받아 왔다. 제 숙부는 조카인 저를 냉대하고, 박대하며 후환을 없애려 했다. 어렸을 적부터 이유 없는 미움에 적응해야만 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친절은 없다. 그것이 연진이 지난 세월에서 깨달은 것이다.
연진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어른들은 모두 강석요를 몰아내고자 그를 이용하려 할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전부 실패하여 강석요에게 박대당할 빌미만 제공하게 되었다. 연진은 이미 친절에 질려 버렸다.
그런데 해월은 그런 연진의 방어벽을 너무도 쉽게 파고들었다.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한 건, 너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야. 그리고 보상이라면 이미 충분히 받았잖아. 방도 내주고, 밥도 주고, 아플 때 의원도 불러 주고, 약도 먹여 주고, 과자도 주고.”
“그건 그냥….”
연진이 해월에게 해 주었던 것은 굳이 따지자면 적선 같은 것이었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한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동정을 그토록 싫어했으면서 해월에게 연민을 품었다는 것이 우스웠다.
해월은 그런 연진의 뒷말을 예상했는지 살며시 웃었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전혀 상관없어.”
“…상관없다고요? 내가 동정하는 게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응, 전혀. 그리고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너 되게 괜찮은 놈이거든? 내가 부리는 억지도 다 맞춰 주고, 탕약을 먹이려던 것도 내가 더 빨리 낫길 바라서 그런 거 아냐?”
정곡을 찔린 터라 연진은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픈 사람을 보는 게 싫어서 그랬습니다.”
“본의가 어쨌든 그게 선의임은 변하지 않아. 네가 내게 도움을 주었는데 왜 나는 주면 안 돼?”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린놈이 벌써 이렇게 생각만 많아서 어디다 쓰려고.”
해월이 검지로 연진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한 번만 나 믿어 봐.”
“…….”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작고 하얀 손이 연진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해월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가 무조건 잘해 줄 거니까.”
해월은 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진은 시선을 내려 그 손을 바라보았다.
연진은 그저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를 잃고 제게 남은 선택지는 늘 제한적이었다. 불행한 선택지와 더 불행한 선택지 중 그나마 나은 하나를 고르며 살아왔다.
왜일까. 다시는 타인의 다정함과 친절함에 미혹되지 않으려 했는데. 안면을 튼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은 눈앞의 사내를, 지금껏 만난 그 어떤 이보다 더 믿고 싶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이끌림이었다.
자신이 과거의 과오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우매한 인간이었던가 하는 자조적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해월에게 향하는 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저 작고 여린 손이 지금껏 저에게 내밀어진 그 어떤 손보다 단단해 보였다.
이윽고 연진은 해월의 손을 맞잡았다.
“잘 생각했어, 제자.”
“…예, 사부.”
그렇게 사제의 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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