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14화 (14/124)
  • 14화

    방안엔 해월의 앓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몸이 아파 그런다기보다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혹시나 중요한 말을 하는 것일까. 연진은 해월에게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

    “…….”

    “문 열어 줘요….”

    해월은 언젠가 아버지에 의해 곳간에 갇혔던 때를 꿈꾸고 있었다.

    영하를 배출한 집안은 일평생 영화와 재화를 누릴 수 있었다. 당시의 해월은 그런 영하가 되고 싶다고, 자신은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다 그를 매질하고 곳간에 던져둔 채 그대로 문을 잠갔다. 자그마치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홀로 어둠 속에 있었다.

    그 뒤로부터 해월은 영하가 되겠단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픈 기억도 세월 속에 풍화되어 그저 가슴속에 묻고 지냈다. 그런데 왜 지금 그때의 꿈을 꾸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

    해월은 어두운 이곳을 빠져나가려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손을 감싸는 온기가 느껴졌다. 단단하고 따뜻한 감촉이었다.

    그 온기에 안정을 느낀 해월은 이내 몸에서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그런 그의 손을 단단히 잡은 연진이 땀으로 얼룩진 해월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무슨 꿈을 꾸시기에 그리 괴로워하는 겁니까.”

    해월에게선 대답 대신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렸다.

    “참,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군.”

    연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해월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대로 안식에 빠져들었다.

    ***

    가늘게 눈을 떴다. 어두웠던 시야를 가르고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떠오른 해월은 이마를 짚으며 반쯤 몸을 일으켰다.

    “이 무슨 추태람….”

    연진의 앞에선 부러 뻔뻔하게 굴었으나 해월은 얹혀사는 처지였다. 그런데 괜한 짓을 하다 쓰러져 의원까지 부르고야 말았으니. 자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귀빈! 탕약 내왔습니다!”

    “……!”

    원복이 손에 쟁반을 든 채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원복의 등장에 해월은 몸을 움찔거렸다. 방안에 원복이 갖고 들어온 약재의 냄새가 퍼졌다. 냄새만 맡아도 역하고 독한 것이 아주 불쾌한 향이었다. 반사적으로 오만상을 쓰고 코를 막았다.

    원복은 생긋 웃으며 해월의 앞에 탕약을 내려놓았다.

    “온종일 주무셨습니다. 이건 의원이 달여 마시라 했던 약입니다.”

    친절히도, 원복은 약이 든 사발 그릇을 해월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해월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물끄러미 탕약을 바라보기만 했다.

    “안 드시고 뭐 하십니까?”

    원복은 약을 마시지 않는 해월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월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원복이 약을 더 가까이 내밀자 쓱 하고 몸을 뒤로 빼기까지 했다.

    원복은 해월이 물러나는 만큼 탕약을 다시 내밀고 또 내밀었다. 쫓고 쫓기는 행동이 계속되다 결국 원복이 먼저 언성을 높였다.

    “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미안.”

    해월도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터라 그저 헛웃음만 지었다.

    “미안하시면 얼른 드세요. 도련님이 귀빈께서 약을 잘 마시는 것까지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해월은 쓸데없이 철저한 연진과 그런 그의 명을 착실히 수행하는 원복이 원망스러웠다.

    “저 팔 떨어지겠습니다. 이거 마셔야 금방 낫는다니까요?”

    “안 마시고 늦게 나으면 안 될까…?”

    “기껏 의원까지 불러 비싼 약재까지 달였는데 무슨 소리예요.”

    딱히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자 해월은 하는 수 없이 차선책을 꺼내 들었다.

    “…원복아. 지금 이 방엔 너와 나 단둘뿐이니 너희 도련님은 모를 거야 그치?”

    “저를 매수해서 도련님을 속이시려는 생각은 마십시오.”

    “…너 엄청 충직한 하인이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어린아이니 잘만하면 구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해월의 오산이었다.

    “대체 너희 도련님은 내가 약 잘 먹는 걸 왜 확인하라 한 거니….”

    “도련님은 아픈 사람 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렇구나.”

    아픈 사람 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마도 연진은 제가 골골대는 것이 보기 싫거나 고뿔 옮을까 염려하는 것일 터. 그렇게 짐작한 해월은 깊이 한숨 쉬었다. 말을 많이 했더니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해월도 의술을 배웠기에 잘 알았다. 저 약을 꾸준히 마시면 고뿔은 며칠 안에 나을 것이란 걸.

    하지만 해월은 약을 싫어했다. 어릴 적 빈속에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마시고 고생한 덕에 생긴 거부감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입맛도 그때부터 생겼다.

    “대체 왜 안 드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말이야….”

    해월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기어들어 가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실 쓴 걸 잘 못 먹어….”

    “예?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쓴 걸 잘 못 마셔요?”

    원복은 해월이 창피하리만큼 큰 소리로 되물었다. 해월은 원복의 입을 다급히 막고 검지를 입가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뜻을 전했다.

    “열셋짜리 어린애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암만 그래도 그렇지….”

    “그러니까 이 탕약 그냥 네가 마시고 너희 도련님한테 잘 좀 말해 주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원복은 딱 잘라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해월은 다음 방책으로 넘어가야 했다.

    “만약 내 제안을 따라 준다면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게.”

    “신기한 거요…?”

    어린아이는 묘기에 약한 법, 공교롭게도 해월은 묘기에 능했다.

    짧게 심호흡을 한 해월은 손날을 세워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순식간에 원복의 발아래로 바람이 모여들어 그의 몸을 띄웠다.

    “와…!”

    짧았지만 공중에 띄워진 원복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감탄했다.

    이 정도쯤은 간단한 일이었지만 확실히 상태가 안 좋을 때 풍술을 쓰려니 예전만 하진 못했다. 곧이어 발이 땅에 닿은 원복은 이전과 다른 선망의 시선으로 해월을 바라보았다.

    해월은 팔짱을 끼며 자신 있게 얘기했다.

    “어때? 신기하지?”

    “완전요! 이런 묘기는 저잣거리 왈패들만 부리는 줄 알았는데.”

    “걔네는 눈속임이고 난 진짜로 할 수 있다고.”

    해월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때, 냉랭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묘기는 다 끝났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연진이었다.

    원복과 해월은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간신히 고개만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연진이 한겨울의 냉기를 품은 얼굴로 저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에 해월은 절로 시선을 피했다. 원복은 어색하게 웃으며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에는 해월과 연진만이 남았다. 지독한 정적이 흐르고 해월은 어색한 높낮이의 음성으로 딴청을 피웠다.

    “아 어지러워서 좀 자야….”

    “일어나십시오.”

    “…응.”

    연진의 싸늘한 한마디에 해월은 뉘던 몸을 곧장 다시 일으켰다. 확실히 귀공자는 귀공자인지 그의 목소리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연진은 바닥에 놓여 있던 탕약 사발을 집어 내밀었다.

    “마시세요.”

    “내, 내가 사정이 있어서… 몸이 약재를 많이 가리는 편이라 자칫하면 담마진(蕁麻疹, 두드러기)이 나기도 하거든.”

    두 번째 궁색한 변명이었다. 물론 연진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거짓말 마십시오.”

    “…너 아까 다 들었구나. 대체 언제부터 들은 거야.”

    연진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해월이 맥 빠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원복이랑 탕약을 두고 실랑이할 때부터요.”

    “뭐야 그럼 처음부터 들은 거잖아!”

    원복을 구슬리려는 시도부터 들켰으니 제대로 헛짓한 셈이었다. 자신이 이래저래 진땀 빼는 것을 보며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자괴감이 일었지만, 눈앞의 상황이 더 급했다.

    연진은 조금도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나 때문에 비싼 약재 달인 건 미안한데 나 진짜 쓴 거 못 마셔… 어렸을 때 탈 난 적 있거든.”

    “…그래도 마셔야 합니다. 의원이 말하길 당신이 폐병을 앓은 적 있는 것 같다던데 그럼 고뿔에 취약하다더군요.”

    “오, 엄청 용한 의원이네 그걸 다 알아채고.”

    해월이 순수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혼을 내듯 말했다.

    “지금 감탄할 때입니까? 당신 고열로 기절했던 건 기억 안 나요?”

    “…미안.”

    “암만 사과해도 이 탕약은 마셔야 합니다.”

    “그건 진짜 무리인데….”

    해월은 마음만 먹으면 탕약을 사발째로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연진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염치가 있지….’

    차마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해월은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떠올리고 마지막 계책이자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사부 대접해 주면 이거 마실게.”

    “…….”

    대답 없는 연진을 보고 해월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연진은 줄곧 저를 사부라 부르지도 그렇게 대하지도 않았다. 이 계략은 자신을 향한 반발심을 역이용한 억지였다.

    ‘어때? 아무래도 사부 대접은 못 하겠지?’

    이쯤 되면 연진도 짜증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싶었다. 해월은 벌써 다행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때, 뜻밖의 말이 해월의 귓속에 꽂혔다.

    “그러지요.”

    “…뭐?”

    해월은 말까지 더듬거리며 재차 물었다.

    “내, 내가 열 때문에 귀까지 이상해진 건가? 아니 이건 열 때문에 꾸는 환몽일 수도….”

    “귀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 환몽도 아닙니다.”

    연진은 해월의 생각을 부정하며 언젠가 그가 지었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따라 했다.

    “그러니 어서 이거 드시지요, 사부.”

    “…….”

    해월은 그날 생에 처음으로 복수라는 것을 당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