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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3화 (13/124)
  • 13화

    “귀빈께서 밤새 앓으시니, 도련님이 그 소리가 듣기 싫다며 몸에 좋은 보양식 위주로 상을 같이하셨잖습니까. 원래 남이랑은 절대 겸상하지 않으시는데… 별일이죠?”

    해월은 자신이 앓는 소리가 멀리 있는 연진의 방까지 들렸나 싶어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 반응을 제 식대로 해석한 원복이 신나서 말을 보탰다.

    “귀빈께서도 신기하시죠? 저는 도련님이 누구 신경 쓰시는 모습 처음 봤습니다.”

    “…잠깐, 날 신경 쓴다고?”

    해월은 제 귀를 의심하며 미간을 구겼다. 원복이 단단히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진은 저를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원복은 황당해하는 해월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자신이 하고픈 말만 했다.

    “본인과 서책 말고는 그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분인데 귀빈이 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마음에 들었다니… 마음 밖에 있는 게 아니고?”

    해월이 인상을 구기며 반문했다.

    “도련님은 싫은 것은 절대 가까이하지 않으십니다. 귀빈이 마음에 안 드셨으면 진작에 내쫓으셨을 겁니다.”

    해월은 연진이 저를 동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암만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도 갈 곳 없는 병자를 내쫓진 않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니 원복이 오해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날 마음에 들어 한다니.’

    미워하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했다.

    “근데 여긴 전부 너만 관리하는 거야? 다른 하인은?”

    “그게….”

    “왜? 혹시 너 말고는 아무도 연진을 가까이하지 않는 거야?”

    “…….”

    농담으로 물은 것인데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아, 진짠가 보네.’

    본의 아니게 정곡을 찔러 괜히 민망해졌다. 가볍게 헛기침을 하곤 원복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너도 참 고생이 많구나.”

    “…가끔 다른 하인이 거들어 줄 때도 있지만, 대체로 제가….”

    열두 살의 나이 차가 무색하리만큼 끈끈한 공감이 형성되었다.

    그 뒤로 잠시 동안 해월은 원복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용은 주로 연진과 강씨 세가에 관한 것이었다. 원복은 줄곧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인지라 해월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원복과의 대화는 유익했다.

    해월은 지금껏 연진이 박대당하는 까닭을 ‘조카에 대한 숙부의 견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지금 가주님이 선대 가주님께서 돌아가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차지했다니까요. 장로들도 죄다 겁박해서 손도 못 쓰게 하고.”

    “그런 일이 있었어?”

    “예, 소문엔 가주님이 도련님을 박대하는 이유가 선대 가주님의 유언장 때문이랍니다.”

    귀족 가문에서 유언은 절대적인 효력을 갖는다. 대대로 조상을 섬기는 마음이 강한 만큼 그들의 마지막 염원을 들어주는 것이 거의 법처럼 지켜지고 있었다.

    “유언장?”

    “네. 유언장에 도련님더러 가주가 되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걸 지금 가주님이 태워 버렸대요. 그런데 유언장이 하나 더 있었던 거죠!”

    “…철저하신 분이네. 자기 아우의 허물을 알아보셨던 게지.”

    모르긴 몰라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 같다. 게다가 전 가주는 성품이 좋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문제는 그게 누구에게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장로들한테 있는지, 아니면 누가 훔친 건지.”

    “그것만 있으면 가문의 주인이 뒤바뀔 텐데 아쉽네.”

    “그래서 가주님이 도련님 기를 꺾으려 안달인 거죠. 이상한 헛소문까지 내고…. 아무튼 유언장 얘기는 전부 떠도는 말들이긴 하지만 전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흠, 그렇구나.”

    괜히 머쓱해져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이리 열심히 원복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삼 제가 알아 무엇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연진에게 마음이 쓰였다. 차분하고 냉정해 보였던 연진의 성품이 그런 과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해월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원복아.”

    “예?”

    “한 번도 해 봤는데 두 번은 더 쉽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있어.”

    원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원복은 그저 의아한 얼굴이었다. 해월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

    “나야. 얘기 좀 하자.”

    해월은 연진의 방 앞에서 목소리를 냈다. 당연히도 안쪽에서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얘기 좀 하자니까.”

    “…할 얘기 없습니다.”

    몇 번을 채근한 뒤에야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그마저도 완강한 거부였다. 하지만 해월은 개의치 않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역시나 걸어 잠근 것인지 작은 틈만 보일 뿐 열리지 않았다.

    “진짜 안 열거야?”

    “독서 중입니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방해 안 할게. 진짜 잠깐이면 돼.”

    “싫습니다.”

    연진이 끝까지 거부하자 해월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열어 줄래 아니면 부수고 들어갈까.”

    “…….”

    잠시 정적이 흐르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월은 작게 웃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말 잘 들어서 좋네.”

    “…당신은 겁박하는 게 취미인가 봅니다.”

    “그런 악취미가 있을 리가.”

    “…….”

    연진은 세상의 온갖 떨떠름함을 한데 모아 놓은 얼굴이 되었다. 왠지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살짝 미안해지긴 했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모처럼 생긴 흥미였기에 더 다가가고 싶었다. 흥미의 근원지인 연진에게로.

    “그리고 당신이라고 하지 말랬잖아. 사부라고 한 번 불러 봐.”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데 왜 사부라고 부릅니까.”

    “그럼 배우면 되겠네? 뭐 알려줄까? 퇴마술? 아니면 의술?”

    말꼬리를 잡은 해월이 절대 놓치지 않을 기세로 물었다. 그제야 그의 본 목적을 깨달은 연진은 금방이라도 제 뒷 목을 잡을 기세로 말했다.

    “아무것도 관심 없습니다. 그보다 조용히 좀 하시죠. 책 읽는 데 방해됩니다.”

    “그럼 조용히 있을 테니까 나랑 바람 좀 쐬자. 날씨 좋던데?”

    “바람은 창문으로 쐬면 됩니다.”

    “그러지 말고 나가자, 응?”

    “절대 싫습니다.”

    해월은 거부하는 연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덩치 차이 때문인지 영력을 사용하지 않곤 꿈쩍하게 만들기도 어려웠다. 해월은 포기한 듯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해월의 뒷모습을 흘끗 본 연진은 시선을 서책에 두려 애썼다.

    그러나 해월은 아직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연진을 향해 물었다.

    “진짜 안 나갈 거야?”

    “…그렇다고 몇 번을 얘기합니까.”

    “너무하네 진… 콜록!”

    기침 소리에 연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해월이 연신 콜록거리며 괴로운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제야 연진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당신 안색이….”

    본래도 하얀 편이었던 해월의 낯빛이 지금은 백지장과 견주어도 될 정도로 보였다.

    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방금까지 자리를 보전하려 했던 굳건한 의지가 무색할 만큼, 이끌리듯 일어나 문지방을 넘어 해월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느끼는 해월의 숨결이 평소보다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콜록, 오? 마음 바뀌었, 콜록!”

    와중에 그 행동을 곡해하고 반색하던 해월의 얼굴이 다시금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콜록! 콜록!”

    해월은 연진을 끌고 나가려던 것도 잊은 채 계속 기침을 토했다. 연진은 괴로워하는 그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괜찮습니까?”

    “괜찮… 콜록!”

    사실 전혀 괜찮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까까지 바깥바람을 너무 쐰 탓이었다. 순간 휘청인 해월은 그대로 연진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자세를 바로 하려 했으나 열 때문에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밭은 숨이 흘렀다.

    연진은 식은땀을 흘리는 해월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 심해요. 의원에게 보여야 합니다.”

    “…됐어, 그냥 쉬면 돼.”

    조금 전 문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연진처럼, 이번엔 해월이 고집을 부렸다.

    “원복이에게 일러 의원을 부를 테니 기다리세요.”

    “안 불러도 된다니까… 별일도 아닌데….”

    해월은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힘이 빠진 몸은 몇 걸음 나아가지도 못한 채 금세 허물어졌다.

    “이런 몸으로 의원을 안 부르면 어쩌려고요.”

    연진이 쓰러지는 해월을 붙들고 핀잔을 주었다.

    “의원은 싫어….”

    “본인도 의술을 배웠다면서 의원이 뭐가 싫습니까.”

    해월은 곧 죽어도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쓴 약을 먹기 싫어서 의원을 찾지 않는다는 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연진은 그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연진의 품에 안긴 해월은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뭐, 뭐 하는 거야!”

    “아픈 사람 그냥 놔두는 악취미는 없습니다.”

    “이, 이거 내려 줘!”

    뒤늦게 버둥댔지만, 연진은 꿈쩍도 하지 않고 회랑 중간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나가자고 할 때는 꿈쩍도 안 한 주제에 참 쉽게도 회랑까지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아프기 전에 아픈 척을 할 걸 그랬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몸이 축 늘어졌다.

    마당을 쓸다가 그런 그들을 발견한 원복이 다급히 달려왔다.

    연진을 밖으로 꺼내 오겠다며 호언장담했던 해월이 느닷없이 연진의 품에 안겨 나오니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도련님? 이게 무슨 상황….”

    “보다시피.”

    연진은 해월에게로 눈짓했다. 그제야 해월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원복이 헉하고 놀랐다.

    “당장 의원을 불러와. 열을 다스리는 데 좋은 약도 같이.”

    “아, 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쏜살같이 별채를 빠져나가는 원복을 확인한 후, 연진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제가 책을 읽던 작은 방은 환자를 눕힐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에 이부자리가 준비된 방으로 간 것이다.

    “으….”

    머리가 아픈지 해월은 미간을 한껏 구기며 신음을 흘렸다. 연진은 그런 해월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연진은 아픈 사람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와 가까웠던 이들이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더불어 의원도 싫어했다. 제가 광인이 되었다는 소문을 만들기 위해 강석요가 의원을 이용한 적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인 해월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연진 또한 해월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으나 워낙 활달하여 별 걱정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몰랐다.

    “이리 불덩이가 되는 것도 모르고… 둔한 겁니까 어디 모자란 겁니까.”

    해월은 연진의 핀잔에 답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납덩이로 눌리는 듯했고, 지독한 수마를 이기지 못해 잠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원복이 모셔 온 의원이 다급히 들어와 해월을 진맥했다.

    방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해월의 상태를 살펴보던 의원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 바람에 연진은 눈썹을 작게 까딱였다.

    “…혹시 특별히 앓고 있는 지병이 있으신 분입니까?”

    “그건 모르오. 한데 코피를 자주 흘린다 들었소.”

    연진은 처음 보았을 때 코피를 흘리고는 자주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해월이 떠올랐다.

    “흠, 건강해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기력이 약하신 분입니다.”

    연진은 평소 해월이 기운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고 생각했었다. 해서 의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꽤나 뜻밖이었다.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들쑤실 때는 언제고, 몸이 약한 편이라니. 정말이지 기가 찼다.

    “어디가 특별히 안 좋은 것이오?”

    “어릴 적 폐병을 앓은 적 있는 분들이 고뿔을 심하게 앓곤 합니다. 짐작건대 이분도 그런 경우일 겁니다.”

    “…그렇군.”

    의원은 그 뒤로 고뿔과 기력 보강에 좋은 약재를 주고 몇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기혈이 몇 개 막힌 것이 울화증이 만성이 된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몸을 보중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 당부를 끝으로 의원은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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