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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2화 (12/124)
  • 12화

    깨작깨작.

    우걱우걱.

    방안에 흐르는 소리는 그렇게 딱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전자의 소리는 연진이 내는 것이었고, 후자의 소리는 해월이 내는 것이었다.

    차분하게 수저를 움직이는 연진과 달리 해월은 다소 거친 움직임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부터 줄곧 공복 상태였다.

    게다가 해월은 기본적으로 먹을 것에 한이 맺혔다. 배를 곯는 일이 일상이었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 컸다.

    연진은 저렇게 급하게 먹는데 흘리는 것도 없고 은근히 깔끔하게 먹는 해월이 신기했다.

    한참 뒤, 수저를 내려놓고 상을 물리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연진은 해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해월은 그의 삼백안을 보며 그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진 못하겠지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런데 연진은 웃는 낯에도 침을 뱉는 사람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해명하세요.”

    오, 그래도 경어는 잊지 않고 쓰는군. 이거 착하다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건가.

    “바로 화낼 줄 알았는데 계속 경어 써 주네?”

    말을 놀림조로 하긴 했으나 솔직히 해월은 적지 않게 놀랐다. 아무리 제 집안에서 기를 못 펴고 있다 해도 연진은 엄연히 귀공자였다. 제게 반말을 듣고 놀림을 당할 신분이 아니란 말이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누구 놀립니까? 다시 하대받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하세요.”

    “…….”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고 억울한 일을 겪게 한 것은 숙부님과 형님인데 왜 제가 고통받아야 합니까.”

    연진은 혼자인 것이 익숙했다. 무엇이든 혼자 해 왔고, 또 잘 해내 왔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배운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퇴마사가 제 사부를 자처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해월도 연진의 생각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월 본인은 물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치만 난 우리가 공동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무슨 이익이요? 혹시 제가 알고 있는 이익의 뜻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연진의 반문에 해월은 웃으며 그 뜻에 대해 답변했다.

    “정신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이롭고 도움이 되는 것을 이익이라 부르지.”

    “이익의 정의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똑바로 답해 보세요.”

    “녀석, 따지기는. 뭐, 내가 너의 전부를 아는 건 아니지만… 난 네가 이 생활에 만족하게 될 거라 확신해.”

    해월은 제법 논리정연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별채에 머무는 한 네 숙부와 형은 절대 이곳으로 오지 않을 거야. 나만 보면 화병 나서 죽을 것 같단 얼굴이었거든.”

    “…….”

    “너도 그들이 너의 공간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잖아. 나는 쉴 곳이 필요하고, 너는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지. 이래도 공동의 이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처음 만났을 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것과 저번에 강석철의 만행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연진은 개인 공간을 침해받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본인은 조용하고 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듯 보이니 충분히 협조가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알겠어요.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있으면 조용한 공간이 안 되잖아요.”

    해월은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소란스러운 것도 좋은 법이지.”

    결코 조용히 하겠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 해월이었다.

    “말의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대체 내 사부 노릇을 하겠단 얘길 왜 한 거예요. 사람 괴롭히는 취미라도 있나 봅니다?”

    “제자야, 일단 진정하고….”

    “제자라고 하지 마십시오.”

    연진이 딱 잘라 거절하자 해월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럼 뭐라고 해? 야, 너, 이거, 저거 하면서 부를 순 없잖아.”

    “그냥 부를 생각을 하지 마세요.”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었지만, 해월은 굴하지 않았다.

    “싫은데? 부를 건데? 하다못해 미물도 이름으로 불리는 세상에 귀한 도련님을 함부로 부를 수야 없지.”

    “하아… 당신과 얘기하면 기가 빨리는 기분입니다.”

    “우리 제자 기 빨리면 안 되니까 우선 오늘은 호칭부터 정하자.”

    이마를 짚고 한숨까지 내뱉는 연진에 해월은 속으로 웃음기를 감추었다. 휘둘리고 있는 그의 반응이 재밌어서였다.

    “됐습니다. 그런 걸 왜 정합니까.”

    예상대로 연진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하나 물러날 생각 없는 것은 해월도 마찬가지였다.

    “너 계속 당신, 당신 거리는 거 별로야. 앞으로는 사부라고 불러.”

    “…미쳤습니까?”

    “왜, 부르기 싫어? 뭐 네가 이렇게 싫어할까 봐 강석요한테 우리가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문서를 받아 놓긴 했는데….”

    “그런 걸 대체 왜 받은 겁니까?”

    연진이 대놓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라니, 일종의 제약이지. 너도 자존심이 있는데 천한 퇴마사한테 반말 듣고, 가르침까지 받아야 한다면 싫잖아. 그래서 치졸한 수를 써 봤어.”

    연진은 ‘천한 퇴마사’라는 표현에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천하다 얘기하는 해월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연진의 신념에 위배되었다.

    “귀하고, 천하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응? 그럼 뭐가 중요한데?”

    “저는 스승이 생기길 원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요.”

    “왜, 배울 게 하나도 없을까 봐?”

    “그것이 아니라….”

    “그럼 한번 믿어나 봐. 내가 백난국 각지를 떠돌며 배운 잔재주가 많거든? 너한테 도움 될 만한 것도 분명 있을 거야.”

    해월이 익힌 것은 퇴마술뿐만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이것저것 배워 둔 것이 많았다.

    “그런 걸 배운다 한들 의미 없잖아요. 난 어차피 계속 이곳에 머물 거고, 당신은 머지않아 떠날 텐데.”

    “배운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행위야. 너도 학식을 쌓아 보았으니 알겠지만 참 보람찬 일이잖아.”

    “…….”

    “그러지 말고, 너도 영력을 수련하는 게 어때?”

    “영력을 수련하려면 엄청난 내공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내공을 쌓기엔 전 이미 나이가 찼습니다.”

    “영력을 수련하는 게 오랜 세월이 걸리긴 하지.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하는 거고.”

    영력을 수련하기 위해선 타고난 자질과 뼈를 깎는 인내력이 필요하다. 영력을 다루는 자들이 드물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이 중년의 나이인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런 면에서 해월은 이례적이었다. 이십 대의 나이에 영력을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안타깝게도 마물 하나 없는 평화로운 땅의 한주 사람들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느낌이 와.”

    “무슨 느낌이요.”

    “네 기가 아주 강하다는 거. 기가 강하면 영력도 남들보다 훨씬 빨리 배울 수 있지. 그걸 썩히기는 너무 아깝잖아.”

    “…됐어요.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애매하게 영력을 수련했다간 괜히 귀신만 보게 되지 않습니까.”

    “오, 잘 알고 있네. 혹시 무당 일에 관심이 있던 거야?”

    “…….”

    해월은 표정으로 욕하는 연진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연진은 그 웃음 탓에 더욱 일그러진 얼굴이 되었고 해월은 그것이 꽤나 즐거웠다.

    “음… 그렇게 싫다면 하는 수 없지. 이만 일어날게.”

    해월은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진은 예상보다 쉽게 물러나는 해월이 의아했다. 해월의 성격상 이것보다 훨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진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

    해월은 떠돌이 생활을 오래 한 탓에 자연히 적응력이 높아졌고, 언제 어디에 놓이든 곧잘 생활하곤 했다. 상황이 열악할 때는 야산에서도 며칠씩 지냈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지금처럼 연진의 별채에 머무는 것은 그의 삶에 있어 최고의 호강에 가까웠다. 적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에취!”

    그러나 그의 건강 상태는 휴식과 관계없이 바닥을 기어 다녔다. 며칠간 몸 편히 지내며 잠시 가라앉은 줄 알았던 고뿔이, 갑자기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콜록, 콜록!”

    기침도 터져 나오고 머리가 울리도록 열이 오르는 것이 절대 쉽게 나을 기세는 아니었다.

    원체 고뿔에 취약한 터라 놀랍지는 않았다. 이렇게 낫는 척하고 다시 기승을 부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주 땅이 공기가 좋아 영력의 회복이 빠르다는 것이다.

    한주에 오기 전부터 영력과 체력 소모가 심했는데 그것까지 금세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이곳이 특출나게 정화가 잘 된 땅이라기보다는 이전에 있던 곳이 워낙 음험했던 이유가 컸다.

    해월은 마루에 걸터앉아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나부끼는 봄바람을 만끽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주변의 차분한 분위기를 느꼈다.

    이곳 별채는 단정하고 조용해서인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놓은 별채 밖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이 담백함에 오히려 더 시선이 가고 관심이 생겼다. 마치 이곳의 주인처럼.

    해월은 제 머리를 긁적였다. 돌이켜보니 제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짓을 한 까닭이다.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설령 관여하더라도 가벼운 도움만 주고 떠났으면 될 일이었는데. 대체 뭣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었다.

    문득,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슬며시 눈을 떴다.

    연진의 수발을 드는 하인 원복이었다.

    “원복이…?”

    “예, 저 원복입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언제부터 그리 친했다고, 해월은 그새 원복을 태평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해월이 이 별채의 주인인 줄 알 것이다.

    조금 황당했는지 원복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은 제 소관이거든요? 언제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마음대로 못 드나들었음 저기 있는 무서운 덩치들이 가로막았을 테니까.”

    해월은 대문 쪽을 흘긋하며 말했다. 별채의 문밖엔 항상 장정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처음에는 저 장정들 때문에 연진이 밖을 안 나가는 줄 알았다. 한데 이제 보니 연진은 타의보다 자의로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연진이 가까이하는 사람은 원복 하나뿐이었다. 이 아이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건 진즉에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넌 몇 살이야?”

    “열셋이요. 귀빈께서는요?”

    원복은 해월을 귀빈이라 불렀다. 해월은 그 호칭이 부담스럽고 민망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스물다섯.”

    “와, 보기보다 나이 많으시네요? 저는 우리 도련님보다 어리신 줄 알았습니다.”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도련님보다 일곱 살은 많은데….”

    해월은 씁쓸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너희 도련님은 왜 코빼기도 안 보여?”

    해월이 연진을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를 놀리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으니까.

    요 며칠 연진의 방 창틀에 앉아 신경 쓰이게끔 그를 뚫어져라 보기도 하고, 정신 사납도록 마당을 들쑤시고 다니기도 했다. 항상 서책을 읽는 연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몇 마디 하다 체념하기 일쑤였다.

    그 짜증과 체념이 뒤섞인 얼굴이 묘하게 중독적인지라 해월은 장난을 끊을 수가 없었다. 처음 연진이 제게 꼬맹이라고 했을 때는 발끈한 주제에, 지금 보니 영락없이 관심을 구걸하는 꼬맹이가 맞았다. 해월은 그것이 퍽 우스웠다.

    “원래 도련님은 방 밖으로 잘 안 나오십니다. 아침 식사도 거의 거르시고요. 귀빈께는 좀 특별한 경우이시죠.”

    “특별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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