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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1화 (11/124)
  • 11화

    서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강석요와 해월은 확연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 수습하실 겁니까, 가주님.”

    “…….”

    강석요는 분노와 짜증이 한데 섞인 얼굴로 해월을 노려봤고, 해월은 즐거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강석요를 마주 보았다. 열감으로 머리가 어지럽긴 했지만, 그보단 앞으로 보게 될 재미가 우선인 해월이었다.

    “본격적으로 얘기하기에 앞서, 우선 가주님이 저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먼저 한 말씀 드립니다.”

    한 번 약점을 쥐었으니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끝까지 쥐고 놓지 말아야지.

    “가주님이 ‘천하다’고 하신 퇴마사 일을 저는 십 년이 넘도록 해 왔는데….”

    “…….”

    “잔재주가 많아서 이래저래 맡았던 일이 많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해월은 다시 경어를 쓰는 강석요가 우스웠지만 대놓고 비웃지는 않았다. 제가 비웃지 않더라도 강석요를 비웃는 자들은 차고 넘치니까. 어쨌든 이번 일로 강석요가 얼마나 못난 인물인지 알게 되었다.

    못난 인물에겐 못난 짓을 하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맺은 인연이 많고, 제 가벼운 청을 들어줄 만한 분들도 더러 계시지요.”

    해월의 말에 강석요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작은 체구에 조곤조곤한 말씨임에도 무언가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해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미소를 띠었다.

    강석요에게도 말했듯 제겐 좋은 인연이 많다. 사사롭게는 물건을 찾아 주는 것부터, 크게는 악귀로부터 목숨을 구해 준 일까지. 그렇게 이 한 몸 다 갈아가며 일하니 자연스럽게 연이 생겼다.

    솔직히 진실된 마음으로 맺은 인연들은 아니었고. 의도가 다소 불순하긴 했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언젠가 그리 맺어진 귀족 한 분이 제가 궁핍하다는 것을 알고 큰돈을 후원해 주겠다 한 적이 있었다. 대신 자신의 옆에 지내며 자신의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결과적으론 받지 않았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일한 것 외의 돈까지 탐할 만큼 물욕에 눈이 멀지는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절했고, 아쉬워하던 상대는 대신 차후 제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주겠다 약조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만일 제가 이 억울한 사연을 다른 명문 세가에 알린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

    강석요의 턱이 굳게 다물렸다.

    한주 강씨의 입지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당장 가문의 위세가 줄진 않을 것이다. 하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꼴이 우스워지는 것은 둘째치고, 책잡힐 일이 생기면 이 또한 다른 세가 놈들이 문제로 들고 일어서 몰아붙일 것은 자명한 일. 괜히 그놈들에게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쥐여 줄 순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강석요는 그제야 해월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무얼 하면 만족하시겠소.”

    강석요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물었다. 해월은 그 앞에서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너무 그리 보지 마십시오. 저는 제 주제를 알거든요. 설마 무릎을 꿇으라는 둥, 재산을 내놓으라는 둥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겁니다.”

    “하면 원하는 것이 뭐요.”

    “글쎄요….”

    해월은 말꼬리를 늘이며 고민했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쳤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습니다.”

    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

    해월과 연진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것도 연진의 별채에서.

    “오랜만이야 강 공자.”

    “…….”

    해월은 어제도 보았던 연진에게 마치 석 달 만에 본 것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그 모습이 황당해서 연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월은 싱긋 웃으며 연진의 턱 아래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벌레 들어가겠어.”

    “…….”

    연진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열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어허, 말조심해야지 네 사부한테.”

    “…….”

    연진에게는 사부가 있던 적이 없었다. 그는 해월이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멀뚱히 제 앞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부…?”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어디 있….”

    인상을 구기며 따져 물으려던 연진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해월은 그런 연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나야, 네 사부.”

    “…….”

    해월은 고요했던 연진의 호수에 돌이 아닌 바위를 투척했다.

    “당신이… 내 사부라고…?”

    “응,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말 높여.”

    “아니, 잠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아 미안, 내가 배려가 없었네. 들어서 대충 알겠지만, 내가 겪은 일을 비밀에 부치는 대신 귀빈 대우를 받고 네 사부를 하고 싶다고 했어.”

    해월이 보상을 받기 위해 제 숙부를 겁박했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내용이 이토록 터무니없을 줄은 몰랐다. 연진은 황당함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떠 있는 당혹을 읽은 해월은 친절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내가 여독이 많이 쌓였고, 이래저래 피곤해서 좀 쉬어야 하거든. 충분히 회복할 때까지만 잠시 머물려는 거야.”

    “그럼 돈을 받고 객잔에서 쉬면 될 일이지 왜 하필 내 별채에….”

    “그냥 심심하니까. 누구라도 가르치고 있으면 안 심심할 것 같아서.”

    연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냥 심심해서 내 사부를 하겠다… 이 말인 거야?”

    “역시 우리 공자 똑똑하네.”

    해월은 감탄하며 손뼉까지 쳐 주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쓰읍, 내 제자는 똑똑하지만, 예의가 없군. 사부한테 말투가 그게 뭐야.”

    이제 연진에게는 더 이상 사라질 어이가 남지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것만으로도 놀랐는데, 그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이리 충격적인 소식이라니. 별채에서 사제지간으로 같이 지내자고?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 안 높이면 나 여기서 십 년은 눌러살게 해 달라고 한다? 지금의 네 숙부라면 충분히 들어줄 것 같은데?”

    어째 퇴마사라기보단 협박범, 사기꾼이라는 직함이 잘 어울리는 발언이었다. 연진은 바닥으로 낙하하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렸다.

    해월은 연진의 앞에서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어? 지금 억지로 웃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자 한 자 힘이 강하게 들어간 것이 누가 보아도 화가 난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럼 또 보자고, 제자.”

    해월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별채에 마련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하하!”

    방에 들어온 해월은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며 폭소했다.

    이렇게 세상이 떠나가라 웃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인 것도 같았다.

    별채에 들어온 자신을 보곤 당황하던 연진의 얼굴과 화를 억누르며 경어를 쓰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당연히 안 된다며 화를 낼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보다는 훨씬 순종적인 자세였다.

    “놀리는 맛이 있는 도련님이었네.”

    딱딱하고 냉정하게 생겨서는 당황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하아….”

    실컷 웃은 해월은 몸을 대자로 뻗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격조 있게 짜여 있는 천장의 무늬를 가만히 보다 반쯤 몸을 굴려 팔을 베고 벽면을 쳐다보았다.

    “…피곤하다.”

    고뿔 때문에 몸이 안 좋은 상황에서 장정 여럿과 강석요를 상대했으니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한숨 푹 자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이부자리에 눕는 것조차 귀찮아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콜록!”

    해월은 눈을 뜨자마자 마른기침을 했다. 그동안 억지로 참아낸 탓에 고뿔이 단단히 도진 것 같았다.

    반쯤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있던 찻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셨다. 입안과 목을 적시자 갑갑했던 것이 한결 나아졌다.

    영력을 많이 소모한 터라 휴식도 필요하고, 다 나을 때까지 이곳에서 연진을 놀려먹으며 호의호식하다 적당히 돈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에휴. 처음부터 한주에, 그것도 명문 세가 도련님한테 귀신이 들었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 느끼긴 했어.’

    명문 세가의 대부분은 백난국의 중심지 근처에 본관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한주 또한 백난국의 중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더해 중심지는 터가 매우 좋다.

    국경 지방 등의 척박하고 메마른 땅일수록 음기가 모여 마물들이 많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곳은 귀신이나 요괴 등의 마물이 나올 정도로 음기가 가득한 곳이 아니란 얘기다.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이곳에서 제가 퇴마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황궁의 비호를 받는 명문 세가의 땅에 악귀가 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터가 좋은 것뿐만 아니라, 백난국에서 손꼽히는 영하(靈下)들이 황궁 주변 지역에 음기를 억제하는 술법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지역이 이토록 평화로운 게지.

    ‘영하… 같은 영력을 써도 누구는 떠받들고, 누구는 천대받고….’

    영하를 떠올리자 입안 어딘가에서 쓴맛이 났다.

    사실, 일반적인 백성이나 귀족들이 퇴마사를 천시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지만, 힘들고 더러워 모두가 꺼리는 그런 일이기 때문이다.

    마물들은 대개 불행을 몰고 다니고, 악취와 음기를 풍긴다. 그런 것들을 상대하는 직업이니 몸이 성한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언제 어떻게 불행이 전해져 고생할지도 모르고, 끔찍한 악취가 몸에 배어 도무지 씻기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영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적었고, 황실은 강한 힘을 쓸 수 있는 그들을 독점하길 원했다. 그래서 영력을 쓸 수 있는 평민 이상은 죄다 끌어모았다.

    그렇게 모으고 훈련한 자들은 곧 영하가 되었고, 이들이 있는 곳이 신궁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주로 정화와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

    정식으로 신을 모시는 존재라 그런지, 사람들은 영하를 퇴마사와 달리 하찮은 존재라 여기지 않았다. 또한 표면적으로 그들은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지 사익을 추구하지 않으니, 같은 힘을 씀에도 찬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다.

    해월도 그것을 알았다. 해서, 그런 영하를 목표로 영력을 수련했던 적이 있었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거니와 실력에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신분의 한계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게 되었다.

    ‘제 명에 살고 싶거든 영하가 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라.’

    평소에도 체벌을 흔히 하는 엄한 양부였지만 그날은 유달리도 엄격했다. 기어코 영하가 되고 싶다는 해월을 매질하여 한동안 다리를 못 쓰게 됐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린 해월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런 그를 깨우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퇴마사님! 아침 드셔야죠. 얼른 나오세요.”

    원복이 해월의 방문을 열고 웃으며 말했다. 해월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나오라니? 여기서 먹는 게 아니고?”

    “네, 도련님 방으로 가시면 되어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 도련님 방으로? 난 따로 먹어도 되는데 왜 굳이?”

    “저도 퇴마사님 방으로 상을 옮기려 했는데 도련님이 자기 방에 갖다 놓으라고 하셔서….”

    “음… 올 것이 왔군.”

    해월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결의에 찬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연진은 식사를 핑계로 만나 제게 따져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예?”

    알아듣지 못할 소리에 원복이 반문하자, 해월은 그저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 그럼 우리 도련님한테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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