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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0화 (10/124)
  • 10화

    “보석이 없어진 어제. 이곳을 방문한 외부인이 저뿐이라 의심하는 것이라면 그 의심은 거두어 주시지요. 그 보석을 훔친 범인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무어라?”

    “차라리 제게 증언을 해 달라 부탁하셨으면 될 일인데, 이리 막무가내로 구시니 저리 호된 꼴을 당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해월은 제가 쓰러뜨렸던 사내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 눈빛을 마주친 장정들은 몸을 움찔하며 들썩였다.

    강석요는 그제야 그들의 몰골을 보았다. 다들 어딘가 다친 듯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들이었다.

    “대체 무슨….”

    “피를 보진 않았으나 급소를 찔렀으니 한동안은 성치 않을 겁니다.”

    “저들을 저리 만든 것이 너란 말이냐!”

    “다짜고짜 위협을 가하니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보석을 훔친 범인을 찾는 것 아닙니까.”

    “…….”

    “저도 억울한 일은 겪고 싶지 않거든요.”

    해월은 싱긋 미소 지었다.

    “아무리 명문가라 해도 자신의 관할 지역 출신이 아닌 자를 함부로 처벌해선 아니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물론 암암리에 이를 어기는 가문들은 한주 강씨 말고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한주 강씨는 가세가 예전 같지 않으니 충분히 약점이 될 수 있었다.

    “…….”

    “제가 여기서 진범을 밝히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시렵니까. 말씀해 주시지요.”

    “…네놈이 훔쳐 가고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지.”

    “정 못 믿으시겠으면 여기서 옷이라도 벗을까요? 털어 봤자 나오는 것은 없을 겁니다.”

    “팔아넘겼거나, 어딘가에 숨기는 방법도 있다.”

    강석요는 끝까지 우겨댔다. 해월은 짧게 한숨 쉬고 이내 입을 열었다.

    “가주님, 보석을 훔친 건 제가 아닙니다. 범인은 아드님이신 강석철 공자님입니다.”

    “내 이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내 아들을 욕보이느냐!”

    강석요가 분개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이건 굽은 게 아니라 꺾인 수준인걸.’

    해월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정 못 믿으시겠거든, 지금쯤 주무시고 계실 아드님 옷소매를 확인해 보시지요.”

    일전에 강석철의 품속을 뒤졌을 때부터 해월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내가 왜 너 같은 퇴마사의 말을 들어야 하지?”

    “만일 강석철 공자님에게서 보석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

    “하지만 강 공자가 진범으로 드러난다면 저 또한 이 일을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강석요는 제 아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해월이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라 생각한 그는 자신 있게 답했다.

    “좋다.”

    그리고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월은 그 미소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강석철의 방은 사치스럽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따가운 고가의 장식품들과 화려한 가구들이 즐비했다.

    문하생들과 하인들, 해월 그리고 강석요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하인이 강석철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술 냄새가 진동해서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았다.

    작금의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석철은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수면술을 오랜만에 써서 그런지 조절이 안 됐나 보네.’

    잠든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누가 온 줄도 모르고 자는 것을 보니 그렇게 짐작되었다.

    ‘어쩐지, 영력 소모가 너무 크다 했어. 이리 깊게 재우니 영력이 많이 들 수밖에.’

    해월은 드르렁 코까지 고는 강석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인의 움직임 하나에 모두의 신경이 곤두섰다.

    강석철의 옷 안쪽을 더듬거리던 하인의 표정이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

    “왜 멈추는 것이야.”

    강석요가 추궁하듯 캐물었다.

    “그, 그것이….”

    하인이 뜸을 들이자 해월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꺼내십시오.”

    “…….”

    하인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손엔 예상대로 보석이 쥐어져 있었다. 백난국에서 채굴되지 않는 값비싼 광석을 가공한 보석이었다.

    “오, 진귀한 보석이군요. 이거 훔쳐 갈 만한데요?”

    해월의 농담에 강석요의 귓등이 붉어질 대로 붉어졌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해월을 향했다.

    “제 말이 사실인 것을 아셨으니…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거짓말! 네놈이 내 아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을 누가 모를 줄 알아?”

    “정 그렇다면 아드님을 깨워 여쭤보면 되겠군요.”

    해월은 자고 있는 강석철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강석철이 번뜩 눈을 떴다. 몸을 반쯤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던 강석철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과 제 아비의 손에 들린 보석을 본 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다 해월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너, 너는 어제 나한테 미친놈이라 그랬던…!”

    그걸 이리 곧장 떠올릴 줄은 몰랐다. 그 정도로 기분이 나빴었나. 누가 보면 아주 험한 욕이라도 한 줄 알겠다.

    해월은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저요?”

    “너 맞잖아! 어제 그놈!”

    “소인이 어찌 공자님께 그런 망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이 취해 계시더니 이상한 꿈을 꾸신 모양이군요.”

    강석철의 말에 술렁이던 분위기는 착하게만 보이는 해월의 말에 다시금 조용해졌다. 강석철이 도둑질한 상황을 모면하려 거짓을 꾸며낸 취급을 받는 것이다. 심지어 그 아비인 강석요마저 강석철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래서 평소의 행실이 중요한 법이다.

    해월은 순수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강석요에게서 보석을 뺏어 들어 강석철의 앞에서 흔들었다. 그 덕에 주위의 시선이 다시 보석으로 쏠렸다.

    “그보다 이 보석이 왜 공자님의 품에서 나왔는지 해명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 그것이… 아, 아버지! 그게 소자는… 그러니까….”

    강석철의 입에서 뒤죽박죽된 문장들이 완성되지 못한 채 섞여 나왔다. 그 반응만으로 설명은 충분했다. 해월은 강석요를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보상을 논의해 볼까요?”

    명백한 승리자의 여유였다.

    ***

    아침에 일련의 소동이 있고 난 후 연진은 줄곧 별채에 머물렀다. 이곳 별채는 연진만의 작은 세상이었다. 그는 저택을 거니는 일도, 바깥으로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요란스럽게 장식해 놓은 저택을 보는 것이 싫었고, 저를 미치광이로 보고 동정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싫었으니 나가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온갖 무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연진은 반항한 적이 거의 없었다. 뭣 모르는 어린 시절에야 그랬던 적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냥 이대로 아무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고, 관심을 받지도 않는 생활이 지속되길 바랐다.

    그런 연진의 평온한 호수에 돌을 던진 사내, 선해월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담 넘는 모양새나 술법을 다루는 실력을 보아하니 쉽게 잡히진 않을 것 같았지만, 마지막으로 본 해월의 용태가 좋지 않았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였다.

    숙부인 강석요가 제 기분 따라 아무나 트집을 잡고 벌을 내리는 일은 자주 있는 터라 익숙했다. 과거엔 말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하나 살피기도 바쁜데 굳이 그들을 돕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움켜쥔 것만으로도 금세 붉은 자국이 생기던 가냘픈 손목이 떠오른 연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신경 쓸 바 아니다.’

    연진은 그 말을 염불처럼 외고 또 외웠다. 하지만 해월의 소식이 궁금하여 하인에게 알아보라 이른 것이 사실이었다.

    때마침 연진을 수발드는 어린 하인 원복이 별채로 들어왔다. 원복은 연진이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가까이 여기는 하인으로 아직 열셋밖에 안 된 소년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연진이 급히 일어섰다.

    “도련님! 저 왔습니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연진은 원복이 숨돌리기가 무섭게 물어 왔다.

    “퇴마사 선해월이 잡혔사온데….”

    “그자가 잡혔다고?”

    연진은 놀라며 원복의 말을 끊고 물었다.

    “도련님도 참.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미안하구나, 계속 말해 보아라.”

    “그러니까, 그 퇴마사가 잡혔는데 순순히 잡히진 않았는지 우리 가문 문하생들 얼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뭐?”

    “다들 여기저기 얻어맞은 모양새던데요? 그에 비해 퇴마사는 생채기 좀 난 것 빼고는 멀쩡해 보였습니다.”

    “…….”

    해월의 몸놀림이 날쌘 줄은 알았지만, 문생들을 상대할 정도의 실력자였던가.

    아무리 위신이 예전 같지 않아도 한주 강씨는 여전히 무예로는 알아주는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문하생들을 상대로 생채기만 난 수준이라니. 짐작건대, 해월의 무공은 보통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분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가주님한테 따져 묻더니 진범은 첫째 도련님이라며 도련님 방에 가자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솔직히 첫째 도련님 손버릇 안 좋은 거 이 집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당연히 덜미가 잡혔죠. 첫째 도련님 품에서 그 보석이 나오고 가주님은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오르셨습니다.”

    원복은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신기한 경험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이 집안에서 강석요의 뜻을 거스르는 자가 아무도 없는 만큼 신기한 것이 당연했다.

    “혹 숙부님이 그자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더냐.”

    “당연히 그러셨죠. 근데 그 퇴마사는 간이 세 개는 되는지 가주님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우리 가주님 화나시면 난장형도 때리시는 분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 사람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제가 꼬맹이라고 했다는 이유 하나로 대뜸 양반인 제게 하대를 했던 해월이니만큼. 딱히 이상한 것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해월은 겁도 없이 강석철에게 수면술까지 걸지 않았던가.

    연진은 조금이지만 해월을 걱정했던 자신을 우습게 여겼다.

    “누가 누굴 걱정한 건지….”

    “예?”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든 그 후로 어찌 되었느냐.”

    “그것이… 겁박을….”

    “그 퇴마사가 겁박을 당하고 있다고?”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원복의 표정이 곤란해지며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던 원복은 이내 말문을 다시 열었다.

    “…그 퇴마사가 가주님을 겁박하고 있습니다.”

    “…….”

    그 순간 연진은 깨달았다.

    해월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니, 미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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