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따사로운 햇볕이 눈을 찌르자 해월은 눈가를 찌푸렸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뜬 해월은 이내 제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앉은 채로 잠이 들어서 그런지 온몸이 찌뿌둥했고, 오한이 들었다.
“으으….”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기 무섭게 온몸을 휘감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해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콜록, 콜록.”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건지. 아주 제대로 고뿔에 걸린 모양이었다. 목 깊숙한 곳이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놓은 것처럼 따갑고, 메마른 사막처럼 건조했다. 계속해서 마른기침이 나왔다. 그럴 리는 없지만 얼핏 핏물의 맛도 나는 기분이었다.
“아, 아….”
시험 삼아 목소리를 몇 번 내 본 해월은 결론을 내렸다.
‘망했군.’
목이 아주 제대로 가 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머릿속이 어지럽고 눈앞이 일렁이는 것이 열도 나는 것 같았다.
고열에 노숙에… 가관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해월은 밤새 기대어 자던 벽면을 짚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영력도, 체력도 바닥인지라 서둘러 쉴만한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소일거리로 여비를 마련해 최대한 빨리 한주를 떠나려던 해월의 계획은 자연스레 어그러졌다.
이 상태로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커녕, 한 발자국 떼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해월은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처럼 벽면을 짚으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담벼락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없어 일어나긴 했지만, 이런 몸 상태론 돈을 벌겠다 나서 봤자 받아 주는 이도 없을 것이다.
해월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목에 사람이 꽤 많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사시(巳時, 09시~11시)는 된 것 같았다.
발바닥 아래가 물에 젖은 흙처럼 질척이게 느껴졌다. 발이 푹푹 빠져서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감각이 계속되었다.
‘이거 좀 위험한 것 같은데….’
해월은 미간을 찡그린 채 걸었다. 근래에 이만큼이나 상태가 별로였던 적이 없었다. 일단 어디 약방이라도 들려 구걸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고개를 떨군 채로 힘겹게 나아가는 해월의 시야에 군청색의 천 자락이 보였다. 군청색의 옷은 강씨 세가의 상징이었다. 문하생인가 싶어 지나가라고 슬쩍 몸을 비틀자 그만큼을 따라온다. 그 의도적인 움직임에 해월은 제 앞을 막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한주 강씨 문하생 맞는 것 같은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의아해하던 찰나 문생이 다짜고짜 질문을 했다.
“당신이 퇴마사 선해월입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당신에겐 물을 자격이 없소.”
제게 할 말이라도 있나 싶어 친절히 신분을 밝혔건만, 문생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대화를 요청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그가 대뜸 제 팔을 붙잡더니 멀리 있는 다른 문생들에게 소리쳤다.
“이봐! 찾았다!”
“……!”
해월은 저를 포박하려는 팔을 재빠르게 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하나 다시금 사내가 팔을 뻗어 제 몸을 붙잡으려 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틀어 사내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날처럼 세운 손으로 사내의 어깨를 내리치자 그는 고통에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으윽…!”
그 틈을 타 해월은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
공교롭게도 반대편에서 또 다른 무리가 해월을 쫓고 있었다.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조차 없이 다른 길로 내달렸다.
“헉헉…!”
폐가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뜀박질은 삼가야 하건만…. 이러나저러나 해도 지금은 멈출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쫓아오는 거야…!’
열이 있어서 어지러운 마당에 달리기까지 하니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라면 영력을 사용해 가뿐히 제압했을 테지만, 오늘처럼 상태가 말이 아닌 날엔 영력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기에 상대하기 버거웠다.
백색 옷자락과 짧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거기 서라!”
‘그렇게 험악하게 쫓아오는데 서겠냐!’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달리는데 어째선지 길이 점차 좁아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이 길이 아닌 것 같았지만, 이 마을 지리에는 익숙하지 않은 터라 갈피를 못 잡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해월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막다른 길을 마주한 탓이다.
제 앞을 막고 있는 높은 벽에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버렸다. 고개를 위로 젖히자 조금 숨통이 트여 호흡을 고르기 편해졌다.
“하, 하아….”
폐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이 계속되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쫓아온 문생들이 절 포위하며 다가왔고, 뭐라도 해 보자 싶어 바짝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날 쫓아오는 것이오.”
“퇴마사 선해월을 잡아 오라는 가주님의 명이 있으셨다.”
“그러니까 강석요 가주님께서 날 잡으라고 명하신 이유가 무엇이냐 묻지 않소.”
해월은 강석요에게 밉보일만한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설마 어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간 것을 책망하려는 건가.
하나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도로 강석요가 제게 관심 있어 보이진 않았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건 네놈이 알 바가 아니지.”
“죄인에게도 죄명은 알려주는 법이오. 나는 죄인도 아니니 더더욱이 알려줘야 하지 않겠소?”
“시끄럽다. 어서 끌고 가라.”
문생들의 대장 격인 자가 명하자 다른 문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월은 더는 물러날 공간이 없는 뒤쪽을 힐끔 보고는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자세를 낮춘 해월은 빠르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손날을 세워 사내 둘의 명치를 찔렀다.
“커헉!
“으악!”
급소를 찔린 이들이 복부를 부여잡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약하지만 영력을 담아 찔렀으니 아마 한동안은 허리를 펴지 못할 것이다. 해월은 쓰러진 사내들의 옷 춤을 뒤져 단도를 빼앗았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풍술을 사용했다간 민가에 피해를 줄 수 있으니 될 수 있는 한 육탄전으로 가야 했다. 게다가 영력도 거의 안 남아서 술법을 쓸 수가 없었다. 수적으로도 제가 훨씬 불리했다.
하물며 그들은 무인 가문의 문하생. 그 기개도 풍채도 모두 남다른 자들이다.
해월은 낮게 숨을 고르며 단도를 오른손으로 그러쥐었다.
“피를 보기 싫다면 가까이 오지 마시오.”
서슬 퍼런 칼날 끝을 본 자들이 잠시 주춤했다.
“뭣들하고 있어! 저깟 꼬맹이 하나 못 잡고!”
“예!”
“…꼬맹이 아니라니까 글쎄.”
해월은 헛웃음을 지었다.
“으아아!”
한 사내가 크게 소리치며 해월에게 달려들었다. 해월은 기름처럼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고 동시에 칼등으로 사내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아….”
이미 몇 번이나 반격해 놓고 아차 싶었다. 달려드는 기세가 너무 형형해 본능적으로 방어하고 있긴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영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지금 제가 문생들을 전부 때려눕히고 도망갈 힘이 남았던가? 때리기만 하고 도망가질 못하면 일이 더 커지기만 하는 꼴 아닌가?
후회가 막급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으윽!”
사내는 복부를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해월은 가볍게 뛰어올라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장정들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윽…! 네, 네놈 대체 정체가 뭐야!”
작고 어려 보이는 외모에 방심했던 문생들은 여럿이 쓰러지고 나서야 경각심을 느끼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해월에게 윽박지르는 모습에선 당황이 가득했다.
해월의 움직임은 결코 평범한 퇴마사 같지 않았다. 무술의 개념 없이는 불가능한 몸놀림이었다.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장정들이 단신인 해월 앞에 우후죽순으로 쓰러졌으니 그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흔한 퇴마사지.”
“말도 안 돼! 무슨 퇴마사가 무예를 익혀!”
어떤 문생이 반쯤 분노 섞인 음성으로 따져 물었다.
“퇴마사는 무예 수련하지 말라는 법 있소? 뭘 그리 화를 내고 그러시오.”
말은 능청스레 했지만 사실 해월도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눈앞이 핑핑 돌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인내하는 중이었다.
순간,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해월이 잠시 휘청했다.
그때, 해월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장정 하나가 해월에게 달려들었다.
“…윽!”
충돌해 오는 거구의 몸체에 해월은 힘없이 넘어졌다.
“지금이다, 어서 잡아!”
“예!”
문생들이 해월의 손목을 결박했다.
“이거 놓으시오!”
해월이 소리쳤으나 멈출 이들이 아니었다. 손목부터 발목까지 꼼꼼히 밧줄로 묶은 장정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장 덩치가 큰 장정 하나가 해월을 어깨에 둘러업었다.
안 그래도 어지러워 죽을 지경인데 시야가 뒤집히니 머리에 열화가 모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장 내려…놔….”
그 말을 끝으로 해월은 의식을 잃었다.
***
한주 강씨 저택의 연무장.
강석요는 턱을 괸 채 정렬로 서 있는 문생들과 그들이 끌고 온 해월을 쳐다보았다. 강석요의 시선이 닿자 문생 하나가 해월을 거칠게 떠밀었다.
털썩.
바닥으로 던져진 해월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한주 강씨의 상징인 구름무늬 바닥이 보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으으….”
혼몽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해월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손발이 결박되어 있어 앉은 자세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주님.”
해월의 메마른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몸은 아파도 말은 바로 해야 했다. 강석요는 상석에 앉은 채 재밌는 유흥거리를 보는 듯 웃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소, 퇴마사 선생. 대체 내 보석은 왜 훔쳐 간 거요?”
강석요의 뻔뻔한 말이 이어졌다.
‘날 끌고 온 이유가 그런 거였나.’
한주 강씨 가주가 막돼먹은 짓을 한다는 소문은 한참 전부터 백난국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당연히 저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저 그 대상이 제가 될 줄 몰랐을 뿐이다.
눈앞의 강석요는 명문가의 품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땐 소문만큼 별로인 자는 아니라 여겼는데 이는 오산이었다.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한심한 인사.’
너무 한심해서 뭐라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이러니 가문의 위신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과거 한주 강씨는 강직한 무인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한데 지금은 어찌 이리되었을까. 해월은 그 원흉이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훔치다뇨. 제가 어찌 가주님의 보석을 훔치겠습니까.”
“시치미 떼긴… 어젯밤 내 저택에 들어온 외부인은 선생뿐이었소. 그런데도 발뺌할 것이오?”
“왜 보석을 훔쳐 간 범인이 외부인일 것이라 단정 짓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가진 물건 중에 보석이 없던데, 벌써 팔아넘겼나 보군. 내 선생이 그리 날쌘 줄 몰랐소.”
“보석을 훔치진 않았지만 날쌘 건 사실입니다. 한 번 보여 드릴까요?”
해월은 남은 영력을 최대한 짜내어 손발로 내보냈다. 날카로운 형태로 변한 영력이 순식간에 밧줄을 끊어 냈다.
영력은 수련하거나 기가 강한 자가 아니면 볼 수 없다. 덕분에 이곳에 있는 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아이고, 저려라.”
장내를 술렁이게 만든 장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손목을 털며 일어섰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감에 여전히 힘들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참아 내었다.
“저는 가주님의 하인도, 문하생도 아닌데 어찌 이리 함부로 대하십니까.”
“그래봤자 귀신이나 쫓는 천것 주제에 어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강석요는 제 앞에서 면을 낮추기 싫은 것인지 부러 목소리를 크게 냈다. 이젠 경어를 쓸 마음도 안 드는 듯 대놓고 하대까지 했다.
뭐 차라리 하대하는 것이 편했다. 자신이 고상해지고 싶어서 하는 존중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귀신을 쫓을 줄 안다면, 귀신을 부를 줄도 안다는 것을 어찌 모르십니까.”
해월의 말에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귀신을 부른다고?”
“그런 게 가능하단 말야?”
그 소리가 심기에 거슬렸는지 강석요가 서탁을 내리쳤다.
“조용히 하거라!”
“…….”
그의 높은 언성에 다시금 연무장에 고요가 찾아왔다. 와중에 해월은 제 흰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몸도 안 좋고 하니 이 사태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데 강석요가 협조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어리석고 아둔한 자다.’
그런 자들은 대개 겁이 많은 법이다. 그 심리를 조금 자극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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