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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8화 (8/124)
  • 8화

    “…당신….”

    연진은 해월의 코를 가리키며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곧 무언가가 흐르는 것을 느낀 해월은 아무렇지 않게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 냈다.

    “아이고, 코피네.”

    어쩐지 조금 어지럽더라. 해월이 중얼거렸다.

    “꽤 많이 나잖아.”

    “별거 아니야 원래 자주 나거든. 순간적으로 영력을 크게 소모해서 그런가 봐.”

    근래 들어 코피가 자주 나긴 했었다. 체력이 떨어지거나 영력을 급격히 소모할 때마다 이런 상황을 겪은 터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럼 그런 걸 왜 쓴 거야. 그냥 맞게 내버려뒀으면 됐을 텐데.”

    “어떻게 맞게 내버려두냐? 나 때문에 네가 맞을 뻔한 건데. 그리고, 저자가 날 붙잡았을 때 뿌리칠 수 있었어. 그걸 안 해서 결국 네가 나선 거고. 그러니 내 책임이 조금은 있는 거고, 그래서 쓴 거야.”

    해월은 연진이 저를 보호하려고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까의 까칠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연진은 꽤 걱정스러운 얼굴로 해월을 바라보았다.

    “그게 왜 당신 책임이지? 나선 건 나잖아.”

    “왜 그게 내 책임이 아니야? 내가 저 공자의 손을 뿌리쳤더라면 안 벌어졌을 일이잖아.”

    “…….”

    “뭐 전적으로 저놈 탓이긴 하지만, 내가 판단을 잘못한 부분도 있고. 공자가 맞는 꼴을 보기도 그렇고. 가주 아들을 때려눕히기도 그렇고. 이게 가장 평화적인 방법인 것 같은데?”

    해월의 대꾸에 연진은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당신 어디 모자란 구석이라도 있는 거야?”

    연진은 상식적으로 해월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 필요하다고 속물적으로 나왔을 때가 불과 조금 전 일인데, 누가 봐도 강석철의 잘못인 일을 일부 떠안아 책임지려 하다니.

    잠깐이지만 견문이 넓고 비범하다고 생각했는데 크나큰 오산인 듯싶었다. 해월은 그저 바보, 아니면 호구 같았다.

    “뭐? 왜 갑자기 시비야?”

    해월이 그런 생각을 알 리 없었다.

    “…모르면 됐다.”

    “뭐야 싱겁긴.”

    코피를 대충 닦아낸 해월은 싱긋 웃었다. 그러고 쓰러져 있는 강석철의 품을 더듬어 작은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역시 있을 줄 알았어.”

    해월은 호리병의 마개를 따고 냄새를 살짝 맡아 보았다.

    “이거 되게 귀한 술이네.”

    해월은 대뜸 입구에 입을 댔다. 꿀꺽꿀꺽 두어 번 목 넘김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해월의 행동에 연진은 또 한 번 기함했다.

    “그걸 왜 마셔…!”

    “곧 해가 지잖아. 봄밤의 추위를 견디려면 약주 몇 잔은 마셔 줘야지.”

    제법 논리정연한 듯싶었지만, 알맹이는 딱히 없는 말이었다.

    해월은 남은 술을 곧장 강석철의 옷 위로 뿌렸다. 순식간에 온 방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이렇게 해 두면 술 취해서 난동 부리다가 쓰러진 것쯤으로 둘러댈 수 있겠지.”

    “…….”

    강석철의 모습이 누가 봐도 고주망태인지라 연진은 곧 수긍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응?”

    “왜 무리하면서까지 날 도와주는 거냐 묻는 거야.”

    “목숨을 건 것도 아닌데 무리랄 것까지야…. 그리고 딱히 도운 것도 아닌 걸, 그냥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던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단할 것도 유난스러울 것도 없다.

    “이 자에게 희롱당하고, 코피까지 흘렸는데. 그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해월은 어쩐지 제게 따져 묻는 투로 말하는 연진이 퍽 귀여웠다. 이렇게 감정을 드러낸 모습을 보니 딱 그 나이대의 소년 같아서.

    작금의 연진만 보았을 때는 사내보다 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우리 공자 은근히 착한 구석이 있었네. 꼬맹이라고 한 건 좀 기분 나쁘긴 했지만… 나머진 별일 아니었으니 상관없어.”

    연진은 실소를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곱상하다며 희롱당한 것보다 꼬맹이라고 무시당한 게 더 기분 나쁘다고?”

    “사람마다 제각기 중요한 게 다른 건데 너무 뭐라 하지 말아 줘.”

    사뭇 진지하면서도 태평한 어투였다. 곧이어 해월은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갈게.”

    “잠깐, 이대로 간다고?”

    연진의 말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조금 전만 해도 나가라고 염불을 외더니, 이젠 붙잡는 거야?”

    장난스러운 물음에 연진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게 아니라 당신 지금 안색이 하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저를 보고 걱정하는 연진을 향해 해월은 부러 농을 했다.

    “내가 원래 하얀 편이야.”

    “그 말이 아니잖아.”

    해월도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더 머물 수는 없었다. 강석철의 거친 행동을 보아하니 연진도 이래저래 곤란한 게 많은 것 같은데, 그걸 무시하고 무리한 부탁을 할 정도로 무뢰한은 아니니까.

    해월은 연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연진은 순간 얼음처럼 굳었다.

    “죽상인 건 공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강연진 공자님.”

    해월은 장난스러운 말 한마디와 함께 곧장 창문을 열었다. 바깥쪽 문 주변에 강석철의 하인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잠깐…!”

    연진이 손을 뻗었지만, 해월은 이미 창문을 지나 담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

    술 냄새가 진동하는 방에 연진은 덩그러니 서 있었다.

    ***

    아직은 초봄인지라 해가 일찍 저물었다. 어둠이 드리워지자 해월을 둘러싼 공기가 싸늘해졌다. 추위를 느낀 해월은 양팔을 감싸 안으며 최대한 온기를 보전하기 위해 애썼다.

    “으으, 추워.”

    추운 것은 둘째치고 찬 공기를 오래 쐬면 폐에 좋지 않다. 서둘러 머물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은화 한 닢이라도 남겨둘걸. 너무 대책 없이 굴었군.”

    한주 사람의 인심은 어떠려나. 빌붙다 보면 어디 묵을 곳 하나쯤은 있겠지. 정 안되면 노숙이라도 하면 될 일이다.

    혹시 고뿔이라도 들면 며칠 고생 좀 하겠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

    그런데 한기 서린 밤은 유난히 길었다.

    해월은 한주 곳곳의 객잔에 들러보았으나 무일푼 객은 당연히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해월은 어느 담벼락에 기대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밖에서 하루 쉬어 가는 것은 제게 아무 일도 아니다. 언젠가 험한 산세에 갇혔을 때는 인가가 나올 때까지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던 적도 있다. 엄혹한 겨울도, 뜨거운 여름도 견뎠는데 이깟 봄밤 하나 못 지새울까.

    하지만 영력을 크게 소비한 터라 확실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영력과 체력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아무래도 내일은 조금 고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이번 일은 허탕을 쳤으니 다음 행선지로 갈 여비를 마련할 때까지 소일거리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돈이 좀 모이면… 단곡으로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해월은 앉은 채로 얕은 잠에 빠졌다.

    ***

    다음 날 아침, 강씨 세가가 발칵 뒤집혔다.

    이유인즉슨 가주인 강석요가 아끼는 보석이 없어진 것이다.

    망나니짓을 일삼는 강석철이 아비의 보석을 기생들의 환심을 사는 데 사용했으리라, 가솔들은 그렇게 추측했으나 불똥은 당연히 엄한 곳에 튀었다.

    처음 범인으로 지목받은 것은 연진이었다.

    “강연진.”

    “예, 숙부님.”

    연진이 오랜만에 숙부의 부름을 받고 온 자리였다. 그를 맞이한 것은 싸늘한 분위기, 두려움에 떠는 문생들과 하인들 그리고 숙부의 차가운 눈빛뿐이었다.

    “내 각별히 아끼는 보석이 어젯밤 사라졌다. 누구의 소행이라 생각하느냐.”

    “송구합니다만, 저는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연진의 말에 강석요는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구든 짐작 가는 구석이 있다면 어서 고하거라.”

    “…….”

    “…….”

    하인들과 문생들은 저마다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연진은 마당에 서 있는 문생들과 하인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건도 보나 마나 강석철의 짓인데, 그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 입을 다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자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어리석은 것들.’

    동시에 씁쓸했다. 연진 또한 강자 앞에 고개를 숙이는 어리석은 이들 중 하나였기에.

    그때, 어느 하인 하나가 손을 들었다.

    “가, 가주님! 제가 고할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어제 오후에 왔다 간 퇴마사 선해월 말입니다. 제가 안내하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혼자도 괜찮다며 제 말을 거절했었습니다. 홀로 다니다 보석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에 들렀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

    연진은 생각했다. 지금 강석요에게 있어 보석이 없어진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아무리 아끼는 보석이라 한들 그것이 수십 수백 개가 있으면 그저 그런 보석이 될 뿐이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강석요가 일을 이리 크게 벌이는 것은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연진은 얼마 전 강석요가 명문 세가 가주들의 모임에 나갔던 것을 기억했다. 아마 거기서 망신을 당했겠지. 즉 강석요는 그저 명문 세가들 사이에서 낮아진 자신의 자존심을 세울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강석요의 눈빛이 먹잇감을 발견한 굶주린 짐승처럼 번뜩였다. 위협을 느낀 연진이 상석에 앉은 강석요에게 예를 갖추며 목소리를 냈다.

    “숙부님, 제가 그 퇴마사와 오래 마주하고 있었으나 달리 이상한 낌새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자는 범인이 아닐 겁니다.”

    “우리 가문 하인의 말보다 어제 잠깐 본 퇴마사의 말을 믿는 게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심증만으로는….”

    짝!

    거센 마찰음이 장내에 퍼지며 연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뺨 위로 붉은 자국이 번져 나갔다. 연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그저 제 숙부를 응시했다.

    평범한 사람은 뺨을 맞았을 때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하나 연진은 그러한 감정에 무뎌진 지 오래였다. 체념에 익숙했고, 이 집안에서 제게 허락된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연진은 그의 분수를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여기서 네 말 따위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내 물건을 누군가 훔쳐 갔다는 것이고, 의심 가는 범인이 있다는 것이지.”

    “…….”

    “내 말이 틀렸느냐.”

    “…아닙니다.”

    연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강한 힘인지 손톱이 손바닥 사이를 파고들었다. 강석요는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장 그 퇴마사를 잡아들이거라. 서두르지 않으면 네 놈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예,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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