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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7화 (7/124)

7화

밤의 찬 공기는 폐가 약한 해월에게 치명적이었다. 찬바람을 쐬며 묵을 곳을 알아봤다간 며칠은 고뿔로 고생할 게 뻔했다.

“당신은 이 집 사람도 아니니 그냥 숙부께 부탁하면 될 일 아냐.”

“나더러 ‘당신 조카는 멀쩡하니 제가 할 일은 딱히 없군요. 하지만 갈 데가 없으니 방을 내어 주십시오.’ 그러란 말이야?”

누구 멍석말이 당해 쫓겨날 일 있나.

“가주의 성품은 조카인 공자가 더 잘 알 텐데? 나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꼴 보고 싶어?”

“…내 알 바 아니야.”

‘이 자식 이거 생각보다 더 매정하네.’

나름 동정심을 자극하려 애썼는데 연진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마지막으로 없는 눈물을 짜내어 나름대로 불쌍한 눈으로 연진을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안 통해. 나가.”

연진의 딱딱한 경고가 떨어졌다. 해월은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안 통하네… 그래도 기껏 몰래 들어왔으니 한 식경만 있다 갈게. 그 정도는 봐 줘.”

해월의 말에 연진은 눈썹을 까딱였다.

“몰래… 들어왔다고?”

“하인이 따라붙어 있으면 불편해할까 봐.”

“그게 지금 소란을 피운 사람이 할 말인가.”

“너도 알잖아. 여기 하인들, 소란 피운다고 들어올 사람들 아닌 거. 딱 보니까 누가 들어오는 거랑 네가 나가는 것만 감시하는 것 같던데? 안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고.”

연진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근데 나 배고픈데, 밖에 남아 있는 음식 먹어도 돼?”

“남이 먹던 걸 왜 먹어.”

“남이 먹던 거면 양반이지. 배고프면 나무껍질도 벗겨 먹을 판국인데.”

해월은 대충 대꾸하며 방 밖에 있던 잔반 상을 들고 들어왔다.

“…진짜 먹으려고?”

수저를 드는 해월을 보고 연진은 기함했다. 아무리 배고프다지만 남이 남긴 것을 먹다니 연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가짜로 먹어? 먹을 땐 개도 말 안 시키니까 조용히 해 줘.”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내가 먹던 것인데….”

“그게 뭐. 네가 아까운 줄 모르고 다 남긴 건 나도 알아. 아, 혹시 독이라도 든 거야?”

독 있으면 조금 곤란한데. 해월이 중얼거렸다.

“…됐어.”

서로 간 대화의 요점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달은 연진은 이내 할 말을 잃었다.

일각 정도가 지나자 해월은 밥그릇을 완전히 비웠다. 달고 짠 음식을 좋아하는 해월에겐 다소 심심한 맛이었지만 명문가의 밥상인 만큼 확실히 혀가 즐거운 식사였다.

“…….”

연진은 여전히 황당한 눈길로 해월을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안 보는 게 더 어렵지 않나.”

“……?”

해월은 의아했다. 연진이 저를 쳐다볼 이유가 딱히 없어 보이는 까닭이었다.

“하아….”

연진은 길게 한숨 쉬었다.

“다 먹었으면 어서 가.”

“아직 한 식경 안 지났어. 그리고 먹고 바로 움직이면 힘들잖아.”

해월은 벽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허기는 채웠으니 한시름 덜었다.

연진이 입을 열었다.

“한데 왜… 아무것도 안 묻는 것이야.”

“응? 무얼?”

“귀신에 씐 것도, 미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왜 여기 머무는 건지… 그런 것 말이다.”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캐물으면 안 되지. 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묻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니까.”

터놓고 말해서 호기심이 있긴 했다. 하지만 왜인지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은 감이 느껴져 묻지 않는 것이었다. 대강 눈치채고 있기도 했다.

강석요는 선대 가주가 죽자마자 그 아들인 연진이 어리다는 이유로 가주의 자리를 빼앗듯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조카의 성장을 두려워한 나머지 선택한 것이 바로 ‘괴기스러운 소문’이 아닐까.

그렇다 한들 해월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런 일에 신경 썼다가 피해를 입는 건 되려 제 쪽이 될 테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게 빤한 일에 뛰어들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오늘 하루 이상한 호기심에 끌려 평소의 저답지 않은 행동을 하긴 했으나, 이건 오늘 하루로 끝내야 할 일이다. 어차피 눈앞의 가여운 공자와 자신의 연은 이것으로 끝일 테고, 이 이상의 참견은 아까 제가 말했듯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었다.

‘가여운 공자라….’

누가 누굴 가여워하는 건지, 새삼스레 우스웠다. 자조적인 웃음이 작게 흘러나왔다.

“어찌 웃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해월은 즉각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여기 더 있다간 되지도 않는 감상에 빠져들 것 같았다.

해월은 자신의 옷을 가볍게 털고 자리를 정돈했다.

“문 부순 건 미안해. 언젠가 다시 돈이 모이면 수리값을 보내줄게.”

만에 하나 정말 귀신에 씌었으면 어쩌나 싶어 문을 부쉈는데, 괜히 수리값만 물어주게 생겼다.

“됐다.”

“싫어, 보낼 거야.”

해월은 빚을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자들에게는 아무리 폐를 끼쳐도 양심의 가책이 덜하지만, 이런 경우는 달랐다.

이걸로 가여운 도련님과는 작별이다.

“…….”

연진은 어이가 없었으나 그냥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해월과 대화할수록 어쩐지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해월은 미련 없이 그곳을 나가려 발을 내디뎠다.

그때, 맞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해월과 연진은 동시에 닫혀 있는 회랑의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

한주 강씨 가주인 강석요에겐 아들이 하나 있다.

문란하기로 소문난 강석요는 혼외자가 많았으나 정식으로 호적에 올라와 있는 아들은 하나뿐, 바로 강석철이었다.

들리는 이야기론 아비를 닮아 사치스럽고, 방탕하고, 문란하며 우락부락한 생김새를 가진 사내라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해월은 저의 세 배는 곱한 것 같은 풍채의 강석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연진과 사촌지간임에도 둘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미남형인 연진과 달리 그는 누가 보아도 호색한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난데없는 그의 등장에 놀란 것은 해월뿐이었다. 연진은 딱히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대체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런 반응일까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진은 해월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형님.”

“너야말로 이게 다 뭔 일이냐. 저 꼬맹이는 뭐고?”

강석철은 주위에 나뒹구는 문의 잔재와 해월을 보곤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

‘꼬맹이….’

짜증이 팍 나 강연진 때와 마찬가지로 내뱉으려 하다가, 곧 떠나야 할 몸이라는 것을 겨우 자각했다.

“꼬맹이 아니고 퇴마사입니다.”

“아, 오늘 온다고 했던 퇴마사 선해월이 당신이야?”

“예, 예 맞습니다.”

“엄청 곱상하게 생겼네. 소문대로 짧은 머리칼에 백색 옷을 입었군.”

“하하. 그런 소문이 있었군요.”

해월은 작위적인 웃음을 지었다.

연진은 제 뒤에 있는 해월을 흘끔 보고 다시 강석철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내 집 별채 들어오는데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나.”

“그런 얘기 아닙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줄처럼 예민한 대화였다. 해월은 어쩌다 그 틈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래서. 네게 씐 귀신은 드디어 쫓아냈느냐.”

“…….”

연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강석철과 연진을 번갈아 본 해월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주 대놓고 조롱을 하는구나.’

이런 멸시에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연진이 되레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때 강석철의 시선이 해월에게로 옮겨졌다. 이윽고 솥뚜껑 같은 손이 해월의 가는 팔목을 붙잡았다.

“……!”

느닷없이 팔목이 잡혀 당황한 한편, 강석철은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퇴마사 선생 몇 살이야? 꽤 어려 보이는데.”

해월은 그의 시선이 마치 뱀의 혀 같다고 느꼈다. 밑에서부터 핥아 올리는 듯한 더러운 시선에 불쾌감이 일었지만, 혀를 깨물어 겨우 차분한 음성을 낼 수 있었다.

“스물다섯입니다.”

“오, 보기보다 나이 많네? 얼굴도 반반하고.”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순간, 해월의 머릿속에 한 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강석철은 사내든 여인이든 가리지 않고 색을 즐기는 문란한 자라고 했었지….’

그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잡힌 팔에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읏!”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해월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소리도 좋네.”

“하, 이런 미친놈이….”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려 했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그만 본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여간 이놈의 입이 문제다.

“너, 너 지금 뭐라 그랬어?”

강석철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때 연진이 해월을 잡고 있는 강석철의 팔을 붙잡았다.

“이 손 놓으시지요.”

“너…!”

강석철의 얼굴이 붉어졌으나 연진은 조금 더 힘을 주어 그의 팔을 떼어냈다. 그리고 해월의 소매를 걷어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은 건가?”

“어? 어어….”

희고 뽀얀 팔목에 빨간 손자국이 생긴 것을 확인한 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게 함부로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외부 사람한테까지 손대지는 마시지요.”

“네가 뭔데 참견질이지? 썩 비켜.”

강석철은 아예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연진은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형님께 더는 추악한 오명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 이게 진짜!”

강석철이 손을 올렸으나 연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피하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이대로라면 연진이 저 두툼한 손에 맞을 게 뻔했다. 해월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강석철에게 수면술을 걸었다.

강석철의 몸이 허공에 손을 든 채로 멈추었다.

“어라… 왜 이리 졸립….”

이윽고 그의 거구가 갸우뚱 기울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쿵.

“……!”

연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해월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월은 쭈그려 앉아 검지로 강석철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이런… 너무 심했나.”

술법이 심히 잘 먹혔는지 아주 깊이 잠든 듯했다.

수면술은 큰 영력 소모를 필요로 해서 어지간한 위급 상황 아니고서야 쓰지 않는다. 하지만 강석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 이 상황을 해결할 묘수가 떠오르지 않아 저도 모르게 써 버리고 말았다.

연진은 눈앞에서 쓰러진 강석철과 해월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 뭐 한 거야?”

“아, 수면술 반나절은 잠들어 있을 테니 조금 이따 하인을 불러 치워놓는 게 좋겠다.”

해월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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