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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6화 (6/124)

6화

“무어라?”

“본래 사람은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습니까. 문 좀 열 테니 혹시 문 앞에 계시면 멀리 떨어지십시오.”

쾅!

사내가 뭐라 말을 보태기도 전에 해월은 힘껏 문을 발로 찼다.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다 퇴짜맞을 바엔 강제로라도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한 행동이었다.

목재로 된 문은 강한 힘 앞에 속수무책으로 부서졌다. 한데 큰 소리가 났음에도 하인들은 달려오지 않았다.

가볍게 옷자락을 한 번 털어낸 해월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강연진 공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선해월입니다.”

“이게 무슨….”

그는 느닷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 해월을 보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오랜만에 발을 썼더니 깔끔하게 안 됐습니다. 부잣집이니 쪼잔하게 문 값 변상하란 얘기는 안 하실 거죠?”

해월은 부러 활짝 웃으며 이야기했다. 약 올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

연진은 황당함을 금하지 못했다. 그저 해월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느껴졌다.

“아, 잘 안 보이나? 이렇게 하면 보이십니까?”

해월은 손을 뻗어 풍술을 사용해 창문을 열었다. 이전까지 엷게 들어왔던 햇빛이 온전히 비추어지며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해월도, 연진도 서로의 얼굴을 가림없이 마주했다.

“…….”

“…….”

연진은 서늘한 인상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선이 짙고 깔끔한 외모였다.

해월은 무심코 생각했다.

‘열여덟이라 들었는데… 꽤 잘생겼네.’

멀끔하고 편안한 내의 차림이었음에도 화려한 옷을 입은 것처럼 근사한 이였다.

외모에서 앳된 기색이 조금 느껴졌으나 분위기가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폐인처럼 지낸다더니 내부 또한 꽤나 깔끔했다. 커다랗고 두툼한 나무 기둥, 단정하고 고아한 치장, 수수한 분위기는 방 주인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경계하는 자세를 하고 있던 연진이 대뜸 입을 열었다.

“뭐야, 이 꼬맹이는.”

“…….”

해월의 이마 어딘가에서 빠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주먹을 꽉 움켜쥔 해월은 분노로 새어 나가던 영력을 간신히 닫았다.

제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외모는 해월의 몇 없는 열등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연진은 그 열등감을 아주 제대로 건드렸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절 어리게 보는 것은 이제 익숙해져 그나마 괜찮았으나, 저보다 연식이 낮은 자가 그리 보는 건 마치 무시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어린 공자도 아닌 ‘꼬맹이’였다. 꼬맹이….

“꼬맹이 아니고 퇴마사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보다 일곱 살은 많으니 말 좀 높이지?”

이놈의 입은 잘 참다가도 항상 이렇게 터지곤 했다.

해월은 귀찮은 일을 싫어하면서도 은근히 막 나갈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대뜸 반말이 먼저 나갔다. 솔직히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어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눈앞의 연진은 어이가 없을 것이다. 한평생 해월 같은 신분을 가진 자에게 하대당해 본 적 없을 터이니.

퇴마사는 기본적으로 천한 축에 속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국법으로 허락되지 않은 직업이기에 업신여김을 당했다. 꼭 퇴마사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해월은 천출이었고, 연진은 백난국을 다스리는 팔대 세가의 자제이니 본래라면 말 섞을 일도 없었을 터이다.

“…왜 하대하는 거지?”

“내가 공자보다 일곱 살이나 많으니까. 연배가 높은 자에겐 보통 말을 높이지.”

해월은 그냥 뻔뻔해지기로 작심했다. 나름 믿을 구석이 있는 까닭도 있었다. 이 정도 막무가내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누가 몰라서 묻나?”

“설마 고리타분하게 신분이 어쩌고 하면서 깍듯하게 굴라는 얘길 할 건 아니지?”

괜스레 도발하듯 물었다.

“…아니야.”

연진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부정했다. 해월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해월은 인심 쓴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나랑 내기해서 내가 이기면 말을 놓고, 공자가 이기면 다시는 반말 안 할게.”

“갑자기 무슨… 게다가 내겐 별 이익이 없는 내기이지 않나.”

“이익이 없다니, 그럼… 만약 여기서 공자가 이기면 조용히 사라져 줄게.”

“…무슨 내기.”

연진은 꽤 솔깃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답게 팔씨름 어때?”

“팔씨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는지 연진이 조금 날이 무뎌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해월은 그 즉시 연진의 생각을 읽었다.

연진은 해월보다 체격이 다부졌다. 때문에 자신의 승리를 예상할 것이다. 하나 해월에겐 영력이 있었다. 부족한 근력을 영력으로 채운다면 천하장사라 해도 두렵지 않은 해월이었다.

그때, 연진이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당신 퇴마사라며, 영력을 체화하는 게 가능한 사람이라면 나 하나쯤은 거뜬히 이길 텐데 내가 뭐 하러.”

“…오, 예리하네.”

보통은 만만하게 보고 도전했다가 큰코다치는데, 연진에게는 간파당한 모양이었다.

“그래 맞아. 난 딱히 말 높일 생각 없어.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그냥 편히 말할게.”

“…마음대로 해.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의외로 순순히 반응하는 연진에 해월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잠시 생각하던 해월은 아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왕 막 나가기 시작한 거 계속 막 나가겠다는 막장 논리였다.

연진은 뭐라 대꾸하기도 싫은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병풍에 바짝 붙어 해월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계심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연진의 태도에 해월은 느긋하게 웃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내가 무슨 얘길 해야 하지? 쫓아내기 전에 당장 나가.”

“억지 부릴 일이 아닌데?”

해월은 그들 사이에 놓인 서탁을 흘끔 보곤 다시 말했다.

“독서 시간을 방해한 건 미안하지만 얼굴 오래 보기 싫은 건 피차일반이니 협조 좀 해 줘.”

“…….”

“재미없는 얘기 해 봐야 시간만 아까우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난 강 공자에게 씐 악귀를 퇴치하러 왔어, 포상금이 엄청 두둑하길래.”

“그런 이야기라면 더욱 가. 지금껏 누구도 해내지 못했으니.”

연진은 이제 말할 기력도 없는지 아래로 고개를 늘어뜨린 채 힘 빠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해월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랬겠지. 공자에게 씐 악귀 따위는 없으니까.”

“……!”

연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명백한 동요의 의미였다. 연진이 놀라 하는 이유를 짐작하진 못했지만, 해월은 우선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라고 변명할 생각도 하지 않는군. 뭐, 그럴만해. 보통 악귀 씐 인간이 이렇게 깔끔하게 살고, 저렇게 어려운 책까지 읽진 않거든.”

해월은 주변으로 까딱 고갯짓하며 이야기했다.

‘밥맛 없는 도련님이긴 하지만 악귀가 씐 것은 결단코 아니야.’

이래 봬도 퇴마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남들이 쉬이 알지 못하는 것을 해월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 집에 들어설 때부터 악귀의 기운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설령 악귀가 숙주의 몸에서 잠시 떨어져 나간 것이라 해도 어딘가엔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는 내내 악귀는커녕 제대로 된 음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줄곧 해월을 괴롭혀 왔던 의심과 호기심의 전말이었다.

“공자에게 악귀 같은 건 안 붙어 있어. 내 말이 맞지?”

“…내가 악귀에 씌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영안으로 보면 다 보이거든. 지금껏 찾아온 다른 사람들은 자세히 보기도 전에 쫓겨났으니 몰랐겠지만. 혹시 귀신에 씐 게 아니라 그냥 미친 게 아닐까도 생각했는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해월은 눈앞에 있던 서책을 훑어보며 중얼거리듯 말을 보탰다.

“이런 책은 미친 상태에서 읽기 힘들지. 아, 오히려 미쳐야 읽히려나.”

연진이 읽던 책은 옛 현인들의 말을 한데 엮어 놓은 고서 중의 고서였다.

웬만한 학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런 책을 아주 평화롭게 읽는 모양이니 연진의 학식도 보통은 아닐 것이다.

“뭐 멀쩡해 보여도 제정신이 아닐 때가 있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내 보기에 공자는 아니거든.”

“…….”

해월의 일목요연한 말들에 연진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의 말이 전부 맞았다. 연진은 귀신에 씐 것도, 미친 것도 아니었다.

연진은 그저 멍한 눈길로 해월을 쳐다보았다. 해월은 그런 연진의 코앞에서 손뼉을 한 번 쳤다.

연진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뭐 하는 짓이냐.”

“아, 고향에 있는 꼬맹이 가르치던 버릇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불쾌했다면 미안해.”

“…됐다.”

연진은 까칠한 태도로 일어났다.

“이만 나가거라.”

냉정한 목소리에 해월은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건 좀 곤란해. 내가 돈이 궁해서 포상금이 꼭 필요하거든.”

“귀신에 안 씐 것도, 안 미친 것도 알았는데 무슨 헛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상태를 보고 판단해 준 거면 타당한 일을 했다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귀족들이 기분 내킬 때 구휼미 같은 거 베풀잖아. 그런 거로 생각하고 한 번만 도와줘.”

돈 앞에선 자존심도 뭣도 없었다.

한주에 오기 전에 했던 예상과 다른지라 해월은 심란했다. 귀신에 씐 게 아니라 퇴마를 하지 못하니 포상금도 받을 수 없다. 애초에 줄 생각도 없던 것 같지만.

돈은 버는 족족 고향인 단곡으로 보내서 정작 해월은 무일푼에 가까운 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비를 들여 여기까지 왔다. 해월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어느 정도의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강석요는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 넓은 세상에 제 몸뚱이 하나 의탁할 곳 없겠느냐마는 그래도 저녁이면 날이 추우니까….

‘일단 부탁하자.’

해월이 연진의 소매를 붙잡았다.

“방도 많던데 퇴마한답시고 며칠만 묵으면 안 될까.”

“무슨 소리야.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난 그럴 처지가….”

연진은 말을 하려다 차마 잇지 못했다.

해월은 피식 웃었다.

“가주가 공자를 박대한다는 것쯤은 한주 땅 개미도 알겠던데 뭘 숨겨.”

애초에 이 넓은 저택에서 꼴랑 작은 별채 하나 내어 주었다는 것만 봐도 훤히 알겠다.

가주 강석요는 자신에겐 아낌없이 사치를 부리지만, 남에게는 조금도 베풀지 않는 인색한 이로 유명했다.

“이 집 가주가 날 불쌍히 여겨 하루 묵게 해 줄 양반 같진 않으니 네게 빌어 보는 거야.”

연진은 제 소매를 붙들고 있는 해월을 떼어 내려 했으나 그는 끈질겼다.

“이거 놔.”

“안 돼, 절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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