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5화 (5/124)

5화

십여 년 전, 한주.

한주는 팔대 세가중 하나인 강씨 세가의 본관으로 이번에 해월이 일할 곳이기도 했다.

현재 가주인 강석요에겐 조카가 하나 있는데 이름은 강연진으로 선대 가주의 친아들이다.

그런 조카가 원인 모를 광증에 걸려 백난국 각지의 의원이 모였지만 그를 치료하는 데 실패했고, 악귀가 씐 것이라는 어느 무녀의 말에 강석요는 악귀를 쫓을 퇴마사를 찾는다는 방을 붙었다.

그 방을 본 해월은 지체 없이 한주로 가는 나룻배 위에 몸을 실었다.

강씨 세가가 아무리 저무는 해라 해도 다른 가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의 재화가 있었다. 당연히 조카에게 씐 악귀를 퇴마하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포상금을 내걸었다.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금액이라 눈독 들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아직도 성공한 자들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더욱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벌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기꺼이 가는 해월이었다.

해월이 탄 나룻배가 물살을 가르고 한주의 나루터에 다다랐다.

“사공, 여기 삯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어린 공자님.”

“…예.”

약관(스무 살)을 넘긴 지도 몇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어린 공자 소리를 듣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키가 아주 작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저를 어리게 보는 데엔 앳된 얼굴이 큰 몫을 했다.

해월은 오해받는 일이 하도 많으니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중이었다. 대체로는 실이 더 많지만 때때로 득이 되기도 했으니까.

“머리라도 길면 나았으려나.”

해월은 짧은 제 머리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걸을 때마다 길고 흰 도포 자락이 휘날렸다. 하얀색은 해월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자 그의 상징이었다.

해월은 꽤 유망한 퇴마사였다. 뛰어난 실력으로 없애지 못하는 악귀가 없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 모든 명성은 오로지 해월 자신의 힘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해월의 목표는 오직 하나.

돈을 벌어야 했다.

그의 고향인 단곡은 이방인들의 마을로, 흔히 말하는 가난뱅이 마을이었다. 하루하루 풀칠하기에도 바쁜 생활을 보내는 주민들을 생각하며 해월은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럼 슬슬 일을 해 볼까.’

해월의 발걸음이 커다란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계십니까.”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하인 한 명이 나왔다.

“뉘쇼?”

“저는 퇴마사 선해월입니다. 댁의 공자님께 씐 귀신을 쫓아낼 자를 찾는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서신을 미리 보냈었는데 가주님은 계신지요?”

“…그쪽이 정말 퇴마사 선해월이요?”

“예, 맞습니다.”

하인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해월을 흘긋 보았다.

해월의 차림새를 유심히 보던 그는 떨떠름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으나 문을 열어 주었다.

서신에 적었던 인상착의와 찾아오기로 한 시각이 일치하는 까닭이었다.

“들어오십시오.”

“감사합니다.”

해월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문지방을 넘었다. 하인은 곧장 가주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해월을 이끌었다.

해월은 주위를 살펴보며 뒤를 따랐다.

언뜻 보기에도 아주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가옥이었다. 그 크기도 장엄했다. 도둑이 들어도 며칠은 눈치채지 못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다 못해 조금 눈이 따가울 정도에, 값비싸 보이는 장식까지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주 강씨는 대대로 무인 집안인 만큼 무예를 갈고닦는 연무장도 있었다. 연못이며, 정원이며 없는 것을 찾는 게 더 쉬워 보였다.

아무리 강씨 집안이 저물어 가는 해라지만, 그래도 해는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 가주의 무능함 탓에 명예는 쇠했으나, 돈이라도 많은 게 어딘가. 당장 이 집 문밖을 나서면 명예도, 돈도 없이 궁핍하게 사는 백성들이 천지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가주가 지내는 안채에 다다랐다.

“여기가 가주님이 머무시는 안채입니다.”

“고맙습니다.”

해월은 섬돌 위에 신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바닥재로 쓰인 나무마저도 최상품인 듯 결과 광택이 살아 있었다.

‘아주 돈 칠을 하셨구먼.’

어쩐지 냉소적인 생각이 들었다.

“가주님, 퇴마사께서 오셨습니다.”

“들이거라.”

방 안에서 늙은 사내의 허락이 들려왔다.

해월은 방안으로 걸어가며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넓은 방 안엔 한눈에 보기에도 고귀한 장식품들, 거대한 천장, 곳곳을 치장한 어여쁜 단청들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인의 위치가 어떤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해월은 상석의 맞은편에 있는 방석에 앉았다.

“퇴마사 선해월입니다. 한주 강씨 가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정말 그쪽이 퇴마사가 맞소?”

“예, 맞습니다.”

강석요는 제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해월을 쳐다보았다. 워낙 앳된 외모인 터라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생각보다 훨씬 젋어 보이는구려. 듣기론 청년의 나이라 하던데….”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 반응이면 양호한 편이었다. 퇴마사를 불렀는데 웬 애송이가 왔냐며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으니.

“원하신다면 필체를 확인시켜 드릴 수 있으니 의심은 거두어 주십시오. 가주님.”

해월은 단적으로 자신을 증명할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자 강석요는 고개를 한 번 저으며 거부인지 수용인지 모를 행동을 했다.

“됐소. 퇴마사 선생이 가짜라면 겁도 없이 내게 거짓을 고했다는 것일 텐데, 그런 자가 있을 리 없지.”

강석요는 오만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진실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다.

해월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이 댁 강연진 공자님이 귀신에 씌어 고역을 치르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말도 마시오. 내 하나뿐인 조카가 이른 나이에 고생을 치르고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

해월은 의아함을 느꼈다. 강석요의 말에서 일말의 진심도 느껴지지 않는 탓이었다.

대충 듣기에도 퉁명스럽고 가식적인 어투였다. 해월의 앞에서 그럴듯한 표정을 꾸며내는 시늉조차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뭔가 이상한데.’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현재 공자님의 상태는 어떠십니까.”

“제정신이 아니라오. 온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헛소리를 하며 기이한 행각을 벌이지.”

“그것이 참말입니까? 하면 상당히 위중한 상태로군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아이의 상태가 그렇다 보니 하인들도 그 애에게 다가가기를 꺼린다오.”

“…혹 제가 잠깐 뵐 수 있겠습니까?”

강석요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이 의심이 단순한 기우일지는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다.

“내 조카지만 성정이 아주 포악해졌소. 지금껏 찾아온 이들도 모두 쫓아냈고. 숙부인 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선생이 무얼 할 수 있겠소?”

해월을 무시한다기보단 그의 조카를 욕보이고 있는 말이었다. 이에 해월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공자님께 씐 귀신을 쫓아 드려야 하니 한 번은 뵈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뵐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강석요는 입을 다문 채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오.”

“감사합니다.”

간단하게라도 정말 퇴마사 선해월이 맞는지 확인할 거라 예상했건만, 정말 아무런 식별도 없이 들여보내 주니 아리송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정말 가짜가 와도 쉽게 드나들 수 있겠어….’

잠시간 의심하던 해월은 이내 잡생각을 떨쳐 버렸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리는 것뿐. 도움 되지 않을 것을 의심해 봐야 남는 것은 없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떠올렸던 의문 하나가 마음속을 계속 간지럽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

겨울의 흰옷을 벗은 세상은 한층 아름답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엄혹한 겨울 끝엔 언제나 봄이 있기 마련이었다. 땅끝에서 봄이 오고 있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제법 온화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래도 초봄인지라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우면 여전히 한기가 찾아온다. 그전에 일을 끝내고 가는 게 좋겠지.

“…….”

해월은 시선을 올려 마른 가지 끝에 매달리듯 피어난 꽃봉오리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작고 위태로운 봉오리. 그 여린 것이 의지하고 있는 메마른 가지가 해월의 눈동자에 담겼다.

“…꽃이 피면 좋을 텐데.”

잠시 중얼거린 해월은 다시 발을 움직여 강연진 공자가 머물고 있다는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직접 안내해 주겠다는 하인의 권유에도, 해월은 집안 구조에 대한 설명만 받고 홀로 움직였다. 작은 호의일지언정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엔 익숙하지 않은 터였다.

여태껏 떠돌이 생활을 한 덕에 길눈은 훤했다. 해월은 단숨에 고래 등 같은 건물들 사이에서 비교적 초라한 별채를 찾아냈다.

안으로 통하는 정문을 힐끔 보니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출입을 통제하는 듯했다.

외부에서 내부를 막는 건지, 내부에서 외부를 막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사실상 유폐한 것으로 보였다.

가주의 허락을 받았기에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들어가면 될 일이지만, 간만에 호기심이 생긴 해월은 곧장 담을 넘었다.

유폐당한 공자의 실상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정말 악귀가 들긴 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괜히 일이 꼬이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간만에 든 호기심이었다. 어쩐지 이 호기심을 풀고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본적인 체력과 근력은 약해도 몸은 날쌘 그였다. 담을 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꽤 넓네.’

비교적 초라하다는 것 말고는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오히려 없을 만한 것도 있었다. 별채에도 연못이 있을 정도니, 강씨 세가가 얼마나 부유한지 더욱 체감되었다.

더 볼 것도 없이 해월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움직임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장 커 보이는 방의 문을 열자 또 다른 문이 보였다.

끼익.

오랫동안 열지 않은 것인지 문을 여닫을 때마다 음산한 소리가 났다.

가옥 구조상 마지막 방문으로 보이는 문이 철옹성처럼 해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던 순간, 덜컥 소리가 나며 문이 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에서 무언가로 잠근 것 같았다.

“누구냐.”

“…….”

방안에서 들려온 낮고 묵직한 음성. 그 음성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해월은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을 죽였다.

“상은 밖에 두었으니 가져가거라.”

그의 말에 해월은 옆으로 눈을 돌려 바닥에 있는 음식상을 쳐다보았다. 비워지지 않은 찬그릇만 가득해 거의 새 밥상이나 다름없었다.

‘안 먹은 건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냐.”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해월이 못마땅한지 사내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해월은 그제야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강연진 공자님이시지요?”

“…누구냐.”

사내는 처음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선 날이 느껴져 왔다.

“혹 의원이냐.”

“의술을 조금 할 줄 알지만 안타깝게도 의원은 아닙니다. 저는 퇴마사 선해월이라고 합니다.”

“의원이든 퇴마사든 썩 꺼지는 게 좋을 것이다.”

사내는 본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리 나오니 해월 역시 같잖은 예의를 차릴 생각이 사라졌다.

애초부터 그럴 마음도 없긴 했지만.

“싫습니다. 공자께 씐 악귀를 퇴치해야만 제가 돈을 벌 수 있거든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