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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2화 (2/124)

2화

해월은 떠돌이 퇴마사였다.

돈을 벌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백난국의 각지를 떠돌며 안 가본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정처 없는 삶이었다.

와중에 특별히 오래 머문 곳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은 한주. 바로 강연진이 사는 곳이었다.

연진과 사제 간의 연을 맺고 일 년 남짓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자신이 죽고 난 후, 그저 잘살고 있겠거니 짐작만 했다. 그리고 언젠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제 처지 탓에 이내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

해월은 잘게 떨고 있는 연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도 성숙한 외모였지만 지금은 더욱 성장한 듯했다.

단정한 검은 머리칼. 짙은 눈썹과 눈매. 오뚝한 콧날과 그 아래 굳게 다문 입술. 사내다운 미를 뽐내는 날카로운 턱선까지.

예전에 비해 선이 굵어지긴 했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나 장성한 제자의 모습에 뭉클해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해월은 떨어진 삿갓을 빠르게 주워 눌러 쓴 채 뒤돌아섰다.

걸음을 옮기려 발을 내딛던 순간, 연진이 그의 손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연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손목을 비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단순한 완력으로는 연진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해월은 자신의 손목으로 사기를 흘려보냈다.

“……!”

손바닥을 찌르는 강한 사기에 연진은 순간적으로 손을 뗐다.

연진의 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무섭게 해월은 다시 부채를 꺼내 들어 바람을 일으켰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매서운 칼바람이 해월과 연진 사이를 갈라놓았다.

“사부!”

연진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해월은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거센 바람 소리와 가쁜 호흡소리가 해월의 귓가를 가득 메웠다.

“헉…헉….”

이런 식의 만남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꼬여 버린 걸까.

***

“콜록, 콜록.”

단백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살아나도 몸은 그대로인 건지 반요가 되어서도 여전히 폐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뛰는 일도 웬만해선 하지 않았는데, 조금 전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심장이 북을 치듯 요란한 고동 소리를 냈다.

한참이 지났지만, 호흡이 진정되지 않았다.

“하아….”

길게 숨을 내쉰 해월은 침을 꼴깍 삼키며 가슴께를 문질렀다. 심호흡을 반복하자 폐가 아리던 것이 천천히 가라앉아 갔다.

뒤이어 걱정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연진을 마주친 것도 모자라 정체까지 들켰다. 연진은 영력이 강한 만큼 제가 어떤 상태인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원과 한에 맺혀 살아가는 요괴가 됐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그것이지만 마물은 주변에 불행을 몰고 오기에 누구도 가까이해선 아니 된다. 언제든, 어떤 방식이든 결국엔 불행해질 것이다.

해월은 다시는 누군가 불행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연진이라면 더욱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죽은 줄 알았을 텐데….”

해월이 작게 중얼거리며 발치에 걸린 돌멩이를 걷어찼다.

다시 만난 연진의 충격 어린 낯빛이 잊히지 않았다. 재회하는 상상을 종종 해보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언젠가 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때 찾아가서 말할 계획이었는데 시작부터 어그러진 것 같았다.

하필이면 혼백을 먹고 길을 나서는 순간에 만나다니.

‘날 어떻게 볼까.’

한때 스승이었던 인간이 마물이 되었으니 싫어하겠지. 그런 인간이 스승이었다는 게 창피하거나.

연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그의 반응을 예상하기 어려웠다.

하나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연진의 생각이 어떻든 다시는 함께할 일이 없을 테니.

아쉽지만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털고 일어나려던 순간, 해월은 가슴속에 화기가 깃드는 것을 느꼈다.

“윽…!”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열화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런, 오랜만에 사기를 쓰는 바람에 조절이 안 됐군….’

사기를 쓰는 일은 정신과 육신 모두에 부담을 준다. 그것은 마물이 된 몸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아직 반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것을 보고 아직 몸에 인간이 남았다며 좋아해야 할지, 몸이 아프니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다.

열로 어지러운 동시에 한겨울 추위와도 같은 한기가 전신을 감쌌다. 털썩 주저앉았던 해월은 겨우 몸을 추슬러 풀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지만 만에 대비해야만 했다. 없는 기력을 소모한 탓에 오는, 지나가는 고뿔과도 같은 것이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시만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조금만 쉬면 될 거야.’

아주 조금만.

***

백난국엔 팔대 명문세가로 불리는 가문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한주 강씨 가문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주 강씨는 그 위신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당시 가주인 강석요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인물인 데다 그 아들인 강석철 또한 아비와 같은 작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석요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조카인 강연진이 가주의 자리에 오르자 상황은 뒤바뀌었다. 연진은 뛰어난 언변과 통솔력으로 장로회를 휘어잡았고, 나아가 다른 가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런 가문의 문하생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문하생의 수는 곧 가문의 힘. 최대한 많은 문하생을 두는 것이 세력을 키우는데 가장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연진은 문하생을 함부로 들이지 않고 엄히 선발하였다. 해서 한주 강씨 문하생들의 눈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들 중 하나인 평윤과 도원 역시 강씨 문하생으로서 가주를 섬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평소 연진을 존경하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평윤, 너는 가주님이 왜 이런 산골에 자주 오시는지 알아?”

문하생이 되었던 시기는 비슷했지만 평윤이 조금 더 빨랐기에 하는 질문이었다.

평윤은 도원을 흘긋 보다 이내 답했다.

“…나도 들어서 아는 얘긴데, 여기가 가주님의 돌아가신 사부님이 계신 곳 근처래.”

“응? 가주님께 사부님이 계셨어?”

“몰랐어? 가주님이 가주가 되시기 전부터 유명했는데?”

도원은 처음 듣는 얘기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듣기론 그분은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더라. 아무튼 가주님은 사부님이 돌아가신 뒤로, 심란하실 때마다 이곳에 오시는 것 같아.”

이미 강씨 세가에서는 유명한 얘기였다.

“그래?”

“원래는 문생들더러 따라오지 말라 하시고 혼자 다녀오셨는데, 몇 해 전부턴 우리 같은 문생들도 함께 오게 됐지.”

그 이유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진이 문생들을 물리지 않았다.

그래도 멀찍이 떨어져 있으란 명이 있어 사실상 거의 따로 다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사부님이라는 분은 대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길래 가주님이 이렇게 정성이신 걸까.”

“잘은 모르지만, 생전에 두 분이 아주 막역한 사제 간이었다는 건 알고 있어.”

“우리 가주님을 가르치실 정도면 그분도 굉장한 실력자였겠다.”

도원은 제가 모시는 가주의 사부가 문무를 모두 겸비한 인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생각은 평윤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주님!”

“가주님.”

발랄하게 소리를 내며 다가가는 도원과 차분한 평윤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연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가주님…?”

저를 부르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고 나서야 연진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너희들….”

“가주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연진은 굳은 얼굴로 해월을 붙잡았던 제 손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사기에 찔려 영력으로 보호하고 있던 몸임에도 손이 저릿했다.

“…….”

무슨 일… 있었다마다.

제 사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무려 십 년 전에 죽었으니까. 심지어 시체조차 남지 않아 그저 이 일대에서 죽었다는 정보 외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단곡은 학살사건 이후로 마을의 형태를 잃고 빈 터만 남아 있었다. 연진은 가끔 단곡의 빈터와 그 이웃한 마을에 방문하곤 했다.

동설귀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얼마 전이었다.

소년같이 앳된 외모에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가진 귀신이 나타났다는 소문. 연진은 그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소년같이 앳된 외모’라는 표현에 누군가를 떠올렸을 뿐.

그런데 오늘 해월의 모습을 한 자를 보았다.

짧은 흑색 머리칼이 백발이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십 년 전과 다른 것이 없었다. 작은 얼굴, 커다란 눈, 오뚝한 코, 선홍빛 입술. 올망졸망한 생김새가 그대로였다.

무엇보다 투명하게 빛나는 검푸른 눈동자가 변함없는 그의 사부, 선해월이었다.

한쪽 눈을 가리고 있어서 온전한 모습을 본 건 아니지만 틀림없는 해월이다. 착각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기운은 분명히 악귀의 것이기도 했다.

악귀가 해월의 시신에 빙의한 것일까.

드물지만 생전 고인의 기억과 능력을 고스란히 쓸 수 있는 악귀도 존재한다.

그 악귀가 해월의 기억에서 저를 본 것이라면. 퇴마사인 저를 보고 사색이 된 그 얼굴도 이해가 가능하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선 다시 그를 만나야 했다.

“너희들은 저 주막을 수습하거라. 난 찾을 사람이 있어 가 봐야겠다.”

연진은 그 말만을 남긴 채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

“가주님!”

평윤과 도원이 애타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

나무에 기대어 앉은 해월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벌써 반 시진쯤은 지난 것 같은데 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 일대에서 정체가 드러난 이상 이곳에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아무래도 일정을 앞당겨 당장 떠나야 할 것 같았다.

해월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거동이 불편하긴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무거운 발을 힘겹게 내디뎠다.

다행히 나루터까지 걸을 힘 정도는 남았고, 수중에 있는 돈이면 배를 타고 다른 관내로 이동하기에 충분했다.

해월은 비틀거리며 풀숲 사이를 걸었다. 눈이 반쯤 감기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어 발을 움직였다.

그때, 눈앞에 커다란 인영 하나가 드리워졌다.

강연진이었다.

“……!”

“멈춰.”

난데없는 연진의 등장에 해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분명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런 보람도 없이 들킨 모양이었다. 멀쩡할 때 상대해도 만만치 않은 녀석인데 지금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해월은 부러 냉혹한 목소리를 내었다.

“비켜.”

“너야말로 비켜.”

“…뭐?”

누가 봐도 연진이 길을 막고 서 있는데 누구더러 비키라는 건가.

“네가 지금 빙의한 그 몸이 대체 누구 것인지 알긴 하느냐.”

“…….”

‘쟤 지금 뭐라는 거야… 내 시신에 악령이 깃들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긴, 금술에 대해 아는 자가 적은 만큼 금술의 저주에 대해 아는 자는 더더욱 전무 하다시피 했으니까.

게다가 연진은 제가 풍술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까지 목도했다.

연진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추론이었다.

해월은 굳이 연진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누구 몸인지 왜 모르겠어. 네 사부의 몸이잖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나 그럴듯한 어투와 표정인지라 놀랄 지경이었다.

‘내가 이렇게 거짓말을 잘했던가.’

물론 감탄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고도 그 몸에 계속 빙의하고 있겠다고.”

연진이 낮게 으르렁댔다. 그 모습에 감동을 느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어차피 주인 없는 몸인데 내가 쓴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

해월은 비릿한 조소를 입에 올렸다. 연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연을 끊는 편이 훗날엔 이득이 될 터였다.

혹시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해월은 오른쪽 눈을 덮고 있던 천을 풀었다. 사악한 기운이 담긴,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연진을 향했다.

연진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혹시나….”

“…….”

“죽은 사부가 살아 돌아온 게 아닐까 했는데… 어리석은 생각이었군. 사부는 너 같은 악귀와 달리 죄 없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테니까.”

“…….”

맞는 말이었다.

과거의 해월이라면 분명 죄 없는 타인의 기와 혼을 뺏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 몸은 사념으로 뭉쳐져 있다. 그래서인지 이전의 마음가짐 같은 건 흐려진 지 오래였다.

타인을 해치면 안 된다는 이성이, 살려면 흡기해야 한다는 본성을 이기지 못했다.

그나마도 간신히 제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젠 이타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은 사라졌고, 그런 제 모습에 괴로워하기엔 현실은 너무 각박했다.

해월은 이미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였다. 어떤 힐난을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연진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날 없애려고?”

“아니.”

“…뭐?”

당연히 없애겠다고 얘기할 거라 예상했기에 해월은 저절로 반문했다.

“차라리 잘됐어.”

“…….”

“나를 아는 것도 그렇고, 풍술에 능한 것도 그렇고. 넌 사부의 기억을 갖고 있는 거잖아. 난 그 기억이 참 궁금하거든.”

해월은 서늘한 미소를 짓는 연진에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거 왠지….’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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