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강세현에게도 나와 강기준만큼이나 질긴 인연이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예쁜 강세현의 전 여자 친구였다. 두 사람의 약혼 소식이 들렸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었다. 왜 하필 그녀일까. 너무 완벽해 보이는 상대에게 질투 아닌 질투를 했고, 또 한편으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그녀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이제 와서 따지려는 게 아니라 그저 파혼하게 된 경위가 궁금했다. 내가 아는 강세현이라면 분명 약혼까지 한 상대를 소중히 대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어떤 기분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건지 알고 싶었다.
강세현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파혼했어. 기사 봤을 거 아냐.”
“보긴 했는데, 재벌가에서 그런 결정 내리는 거 쉽지 않잖아.”
“그래서 3년이나 그 상태로 있었잖아. 그 정도면 할 만큼 했어.”
뭘…… 할 만큼 해? 대답을 듣고도 뭔가 속이 시원해지기보단 더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일단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이 쉽게 포기했어?”
“포기 안 하면 어쩔 건데.”
“…….”
“……왜.”
“좀 제대로 대답해 줄 순 없는 거냐.”
“제대로 대답한 거야.”
전혀 아니거든.
회피하는 듯 대답하길 꺼리던 강세현은 몇 번의 설득 끝에 결국엔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 없었어.”
“뭐?”
“약혼할 때부터 그게 조건이었어. 표면적으로 약혼해 주는 대신 다른 건 안 하겠다고. 식사도, 모임도, 연락도.”
“그래서 한 번도 안 했어?”
“어. 약혼하고 만난 건 아마 기사 낼 때뿐일걸.”
“그래도 상대는 계속 연락했을 거 아냐. 찾아올 성격이었잖아, 그분.”
“연락은 처음부터 비서 통해서만 가능하게 했고 찾아오면 안 만났어. 3년 되니까 먼저 파혼하자더라. 대신 집안에는 본인이 파혼한 걸로 해 달라 그래서 그렇게 했어. 그편이 나도 좋고.”
조금 전 했던 예상이 완전히 뒤집힌 듯했다. 약혼까지 한 상대를 소중히 대했을 거라니. 전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약혼은 왜 했어?”
다 듣고 나니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고, 파혼할 걸 알고도 그런 일을 벌인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크게 기사가 날 정도로 너무나 소란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파혼 이후 여러 번 화두에 올랐으니 강세현의 이름이 더 알려졌고, 동시에 현세기업의 주가도 소폭 감소했었다.
강세현에게도, 집안을 위해서도, 처음부터 약혼은 안 하는 게 좋은 거였다.
나름 심각하게 물어본 건데 걱정스러운 내 맘과 달리 강세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한 번은 시끄럽게 해야 결혼하란 소리 안 할 테니까.”
이어 ‘우리 아버지, 시끄러운 거 싫어하시거든.’ 그렇게 말했다.
약혼에 관한 것 말고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생각보다 더 오래전부터 날 지켜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게 숨긴 게 참 많다는 것도.
이야기를 끝낸 강세현은 넋 나간 듯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물었다.
“왜. 너무해?”
“아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긴커녕 오히려 감동했다. 전부 놓아 버리고 포기한 나와 달리 계속 노력해 왔으니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날 만날 준비를 해 왔다는 게 고마웠다. 어쩌면 볼 수 없어 괴로운 것보다 멀리서 지켜보는 게 더 괴로웠을 텐데 지금껏 숨겨 온 게 대단했다.
힘든 건 나뿐인 줄 알았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행복한 시간은 늘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시곗바늘이 곧 가야 할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넌 뭐 궁금한 거 없어?”
“있어.”
가족, 친구, 회사까지 아는 걸 보면 웬만한 건 전부 알고 있는 듯한데 내게 더 궁금한 게 남아 있다는 게 놀라웠다. 강세현은 완전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넌 내가 다시 너 찾아왔을 때 무슨 생각으로 받아 준 거야? 계속 와도 별말 안 했긴 하지만, 딱히 반가워한 것도 아니었잖아.”
“반가워한 거야. 내색을 못 해서 그렇지.”
“그게?”
“왜, 그럼 잘 지냈냐고 물어봤어야 해?”
“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네 안부를 물어.”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뱉는 말이 내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다. 잘 지냈냐거나 어떻게 지냈냐는 그 흔한 말은, 한 사람에게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설사 강세현이 나에 대한 감정을 전부 정리했다 하더라도 먼저 떠난 나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잠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다시 강세현을 바라보자 빤히 눈을 마주쳐 왔다. 갑자기 텅 빈 손안이 그득해지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온기가 찼다.
“그럼 이제 매일 물어봐.”
무심한 듯 툭 뱉은 그 말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만약 지금 또 불행이 온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매일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잠깐 찾아오는 불행은 어떻게든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세현은 9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을 하려고 따라 일어서자 돌연 뒤를 돈 상대는 또다시 나를 꽉 껴안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너는 안는 걸 참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강세현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참고 있는 거 안 보여?”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그래. 참 많이 참고 있구나.
“아까 말했지. 빨리 적응해.”
“일부러 기다려 주는 거야?”
“일단 주말까지만.”
“흠…….”
“왜.”
꽉 붙잡았던 팔을 풀고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꽤 살벌한데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까 말하는 걸 잊었는데,”
“……?”
“넌 예전에도 그렇게 오래 안 기다려 줬어.”
그러니까 키스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려 했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까슬한 입술이 닿았다. 곧바로 뜨거운 숨이 밀려들어 왔다.
여전히 다급하기만 한 입맞춤은 다정하지 않았다. 집어삼킬 듯이 빨아 당긴 입술이 아릿했고, 빗겨 나간 자리가 허전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색하기만 한 포옹과 달리 정신없이 몰아치는 입맞춤이 되레 익숙한 기분이었다.
뻣뻣하게 경직된 등을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도 좋지만, 목덜미를 움켜쥔 뜨거운 손이 더 강세현다웠다.
살짝 벌어진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숨결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또렷하게, 강세현을 다시 눈에 담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시.
꿈같은 말이지만 더는 꿈이 아닌 말.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앞으론 언제든 손을 뻗으면 강세현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
“이거 진짜 하는 게 맞는 거냐?”
퇴근 시간 무렵, 회의실 테이블에 꽉 찬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쉰 박 차장님은 같은 말만 벌써 세 번째로 하셨다.
“결정 난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하아……. 이거 날아가면 우리 전부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으니…….”
“잘될 거예요. 사장님도 자신 있어 하셨으니까.”
“그러니까 말야, 그게 제일 이상해. 뜬금없이 그런 결정하신 것도 그렇고, 이유 없이 자신 있어 하시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냐?”
“이유가 있으시겠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한성 쪽은 어때? 담당자가 별말 않디?”
“그냥, 뭐…….”
“뭐라고 하지?”
“……잘 아시잖아요.”
월요일에 그 일이 있고, 바로 연락 올 줄 알았던 강기준은 수요일인 오늘까지도 잠잠했다. 강세현에게 직접 그런 말을 들은 게 꽤 충격이었는지 전화는 물론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사양서 문제로 계속 날 괴롭혔던 업무 연락도 뚝 끊겼다.
대신 어제부터 이 과장에게서 수시로 연락이 왔다.
‘아니, 말마따나 우리 아니면 뭐 먹고 살라고 그래요?’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늘어놓더니 설득보다는 협박에 가까운 메일을 보냈다. 딱 봐도 위에서 시켜서 보낸 티가 나는 글을 읽곤 기가 찼다.
“아효, 재수 없는 자식들.”
“그래서 사장님도 거래 끊으려는 생각 하신 거 아닐까요?”
“에이, 그랬으면 진즉에 그러셨지. 다 직원들 생각하셔서 싫어도 버텨 오신 거야. 근데 갑자기 이러시니 내가 의심 안 하게 생겼냐?”
“그러면 뭔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러실 거예요.”
“그러니까 그 생각이 뭔지 속 시원하게 말해 주면 좀 좋아? 성하 너도 너무 맘 편하게 있지 마라. 회사 어려워지면 젤 먼저 하는 게 구조 조정이니까.”
이 회사에 다니면서 한 번도 잘릴 걱정은 해 본 적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솔직히 다른 회사를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정든 회사인 만큼 오랫동안 다니고 싶었다.
강세현은 알까. 본인 결정에 내가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걸.
나: [나 잘리면 니탓이다]
생각난 김에 메시지를 보냈다. 어차피 한창 바쁠 시간이라 당연히 지금은 못 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답장이 올까 봐 괜히 두근거렸다.
드르륵-. 드르륵-.
“어?”
전송한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강세현」
액정에는 기다리던 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서둘러 차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갔다.
“바쁜 거 아니야?”
- 바빠도 전화 걸 시간은 있어. 여태 그런 걱정 하느라 먼저 연락 안 한 거야?
“바쁜 사람 방해하면 되냐.”
- 넌 돼.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몇 마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심장이 널뛰었다.
- 드디어 먼저 연락했다 싶었더니 이건 뭐야? 잘리는 건 뭐고, 내 탓인 건 뭔지 설명해봐. 입찰 때문에 그래?
“어.”
사실은 강세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껄끄러웠다. 가까운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업무 이야기를 하는 걸 원치 않았고, 하물며 친구였어도 불편했을 텐데 연인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게다가 며칠 전 강기준이 그런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알면서 그냥 넘어가기도 참 어색한 부분이었다. 강세현도 이미 우리 회사가 입찰에 참여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혹시라도 신경 쓰이게 할까 봐 그러지 말라고 정확히 말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내 설명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세현은 한참 만에 말을 했다.
- 차라리 잘됐네.
“뭐가?”
- 잘리면 우리 회사 와.
“……미친.”
수화기 너머로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마 잘릴 일 없을걸.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자마자 좀 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강세현의 이실직고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입찰 조건을 바꾼 것도 우리 회사 때문이고…… 참여 안 할까 봐 뒤에서 몰래 사장님한테 연락도 했다고? ……그거 부정 행위 아냐?”
- 어. 맞아.
“강기준이 말했던 대로네?”
- 아니지. 네가 부탁한 게 아니라 자발적인 거니까 달라.
“그래도 어쨌든 네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한 건 맞잖아. 강기준 말대로.”
- 그래서 틀린 말은 안 했어. 그런 짓 안 하겠다는 소리는 안 했잖아. 그딴 기사 하나 못 막겠냐고 했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강기준이 했던 헛소리가 절대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자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대체 어느 선까지 날 감시하고 있는 거야?”
- 감시라고 하니까 이상한데.
“이유가 뭐든 지켜보고 있던 거면 감시 맞지.”
- 왜. 부담스러워?
우리 사이에 오가는 부담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단순히 어떤 의무나 책임을 진다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떠안고 갈 많은 문제를 감당할 수 있냐는 중요한 의미이기도 했고, 정상적 범위를 벗어난 상대의 행동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느냐는 의지이기도 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대답이 나오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어떤 부담도 7년 동안 겪은 괴로움보다 클 순 없었다. 강세현이 없던 공백의 외로움도 견뎌 냈는데, 감당 못 할 부담 따위 있을 수 없었다.
강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 아마 다 알게 되면 부담스러울걸.
“안 그럴 거야.”
- 그 말, 절대 무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