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나를 거의 노려보는 듯한 강세현의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이지러진 얼굴은 화가 났다기보단 슬퍼 보였다.
조금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몇 번 말을 꺼내려던 강세현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동시에 드는 많은 감정과 싸우고 있는 듯했다. 그 속엔 자신을 향한 원망이 섞여 있었다.
떠난 건 난데 끝까지 본인 탓을 하는 착한 녀석이었다. 그런 놈을 잊지 못하고, 이미 충분히 좋아하는데도 또 반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너무 늦었다고 했지?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옆에 없었다고.”
대답 대신 든직한 시선이 따라왔다.
“아직 안 늦었어, 너.”
“……뭐?”
완전히 구겨진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새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이런저런 일이 겹치고 겹쳐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 그 순간을 이겨 내는 건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고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씩 해결할 방법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지나가니 별거 아니었다. 힘들었지만, 결국 이겨 냈으니까.
하지만 다른 게 전부 괜찮아지고 나니 마음에 생긴 구멍이 그제야 보였다. 힘든 일은 전부 지나간 줄 알았는데, 가장 힘든 순간은 그때부터였다.
“나한테는 네가 없는 게 제일 힘들더라. 그러니까 나한테 가장 힘든 순간은 아직 안 지나갔어. 네가 와야 끝나.”
뒤늦게 의미를 알아챈 강세현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놀란 듯 커다랗게 뜬 눈 안에 내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하냐.”
단 한 순간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괜찮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바보 같은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쉽게 포기하고 도망치는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행복하고 싶었다.
“지금부터는 옆에 있어 줘.”
1초, 2초, 서로를 말없이 바라만 봤다. 말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심장이 마치 귓가에 있는 것처럼 요란하게 뛰었다.
탁-!
텅 빈 어깨에 갑자기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이번엔 후회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널 만난 걸 후회한 적 없는데.
단숨에 나를 꽉 끌어안은 강세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뱉었다. 정돈되지 못한 호흡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차가운 뺨에 닿은 뜨거운 숨결이 지나치게 생경한데도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바로 어제 스쳤던 것 같은, 너무나 그리웠던 온기였다.
천천히 손을 들어 너른 등을 쓸어내렸다. 꼭 해 주고 싶은 대답이 있었다.
“내가 한 후회는 그때 너랑 헤어진 것밖에 없어.”
너무나 많이 아팠고, 많이 괴로웠다.
그러니 후회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기나긴 헤어짐 끝에 드디어 다시 만났다.
우리가, 다시.
***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이었다.
혹시 모든 게 꿈인가 싶어 핸드폰을 열었다. 이 나이에 유치하게 지나간 메시지를 계속 확인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 열한 시쯤 주고받은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강세현: [일찍 자]
다행히 꿈은 아니었다.
사실 진짜 꿈이길 바라는 일은 따로 있었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난 뒤.
‘이 뒤는 나중에 하자. 가 봐야 돼.’
‘지금?’
‘어. 화상 회의가 하나 남아서.’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밤 열 시에 무슨 일인가 했지만, 해외라는 걸 알고 곧바로 납득했다.
‘또 언제 와?’
당연히 아쉬움에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 건 나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한 강세현 때문이었다.
일단 깊은 한숨을 내뱉더니 ‘젠장’ 낮게 욕지거리가 들렸다.
‘연락할게.’
거기까지는 물론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일단 너 데려다줄 테니까 가자.’
‘됐어. 코앞인데 무슨. 얼른 가기나 해, 바쁘다며.’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강세현에게 괜찮다며 등을 떠밀자 웬일로 순순히 가는 듯했다. 그런데 기다란 다리가 막다른 골목 반대편으로 가지 않고 엄한 곳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서 있던 까만 승용차였다.
언제부터 저런 차를 좋아했던 거지?
폭이 넓은 각진 세단은 멀리서 봐도 강세현의 취향은 아니었다. 차고가 높은 SUV가 아니면 세단 중에서는 좀 더 매끄러운 쪽을 선호했으니까.
근데 그 순간, 운전석이 열리며 누군가 내렸다.
망할.
그때부터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가 강세현의 개인 비서라는 걸 알았고, 주말을 제외하곤 거의 매번 함께 왔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우리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앞에서 그 난리를 피웠으니. 결국 포옹으로 화해한 유치한 사랑싸움으로 보였겠다는 생각이 들자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생각해 보면, 차에 누군가 있는 걸 알고도 그쪽으로 데려가 그 꼴을 보이게 한 강세현이 제일 나빴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친…….”
그때, 손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강세현: [일어났어?]
혹시 어디서 보고 있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다 픽 웃었다.
강세현: [오늘 추워]
강세현: [따뜻하게 입어]
다정한 메시지를 보자 예전 생각이 났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제 더는 예전 기억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
불과 며칠 전, 하루가 일 년 같다며 투덜댔는데 이번엔 그보다 더했다.
강세현: [오늘 끝나고 갈게]
왜 하필 그런 메시지를 오전에 보냈을까.
오전 10시부터 나의 시간은 멈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더디게 흘러갔다. 고작 5분이 지나는 동안 급한 머릿속은 서너 시간을 앞질러 가고 있었다. 하필 꼭 이런 날엔 바쁜 일도 없었다.
바쁜 일이 없었으니 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켜 집으로 갔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7시가 넘자 갑자기 심장이 시끄럽게 굴었다. 자리에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8시가 다 되어 갈 때 즈음, 강세현에게 메시지가 왔다.
강세현: [차막혀서 8시 좀 넘어서 도착할거야]
강세현: [그리고 오래는 못있어]
갑자기 서운함이 밀려왔다.
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매일 와 주기만 해도 더는 바라는 거 없겠지 싶었는데 이제는 온다 해도 서운하다니.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나: [혹시 어제 그분도 같이 와?]
단순히 궁금해서 물었다. 오래 있지 못한다는 건 오늘도 역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뜻했고, 그러면 오늘도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올 것 같아서.
그런데 생뚱맞은 답장이 도착했다.
강세현: [그게 왜 궁금해]
이런 건 궁금해하면 안 되는 건가? 잠깐 혼란이 온 사이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세현: [다른 놈한테 관심 두지마]
강세현은 못 본 새 더 미친놈이 되어 있었다.
똑똑.
드디어 길고 긴 기다림이 끝이 나고, 강세현은 말끔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왔어?”
일부러 소파에서 조금 느지막하게 일어섰다. 현관에 선 다리는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오늘도 끈질기게 따라왔다.
앞으로 모든 부담을 떠안고 가기로 했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간 심장이 한 달도 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보는 것 좀 그만해.”
“그동안 못 본 거 메꾸려면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민망함에 돌아서자 커다란 손이 어깨를 당겼다. 분명 몇 초 전에 그렇게는 못 하겠다 해 놓고 금세 생각을 바꾼 건지 이번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날 꽉 껴안았다.
어제는 그저 좋기만 했던 포옹이 오늘은 영 어색하고 민망해 자동으로 몸이 굳었다. 그러자 어깨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많이 분발해야겠다, 권성하.”
“내가 뭘?”
“어색해 죽을 것 같잖아, 너.”
“……안 어색한 게 이상한 거야.”
전엔 단순 친구 사이에서 연인이 되는 바람에 어색했고 모든 게 처음이기에 망설였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상대에겐 안 어색한 게 이상한 거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은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지금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미 다 겪었던 일인데 꼭 처음인 것처럼.
겨우 잠깐 포옹을 한 것만으로 굳었으니 강세현이 웃는 것도 이해가 갔다.
“열심히 적응해. 이번에는 오래 못 기다려 줘.”
‘이번에는’이라는 건 과거 있었던 일을 되짚어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항상 직진이었던 강세현이 그 당시 자신의 참을성을 전부 끌어모아 나를 기다려 줬으니 그걸 토대로 반대 의견을 낸 거였다.
그땐 뭣도 모르고 사귈 만하다는 소리나 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내 생각은 변함없는데, 그래도 사귈 만하다는 소리는 앞으로도 못 할 것 같았다. 이제는 고작 그런 말로 강세현을 표현할 수 없었다.
“알겠으니까 일단 앉자. 할 말 있잖아.”
한쪽에 자릴 잡은 소파를 가리켰다. 벌써 몇 주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볼 때마다 이 집과는 참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질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을 앉자마자 바로 물었다.
“약혼은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