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17. 다시
12시에 나가서 세 시간 만에 돌아온 사장님은 차에서 한참이나 내리지 않으셨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사무실로 들어온 사장님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허락을 받았다면 분명 먼저 말씀을 하셨을 거라 묻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눈치를 보던 모두가 조용히 제 할 일을 했다.
사장님이 잠깐 볼일을 보시러 외출하시고, 5시쯤에 사무실을 방문한 공장장님께서 어떻게 된 건지 모두에게 설명을 해 주셨다.
“한성에서 거래 끊겠다더라.”
“네?!”
“말 꺼내자마자 난리였어. 꼭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직접 참가하면 우리랑 거래 끊겠다는 소리부터 하더라니까.”
그 말을 들은 박 차장님은 분개했다.
“허……. 완전 미쳤네요. 솔직히 거래 끊으면 본인들도 손해잖아요. 자기들 단가 맞춰 줄 데가 우리 말고 어디 있다고.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그 물량 감당할 기업도 없잖아요.”
“하여간 한성 사장 새끼…… 말하는 꼬라지가 아주 못돼 처먹었어. 사장님한테 감히 네 주제에 나를 이겨 먹으려고 하냐고 노발대발…… 아효……. 말도 마. 저러다 재떨이 날아올까 봐 무서웠다, 아주.”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좀 특이해도 못 배운 사람은 아니라던 사장님의 말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사장님은 한성 사장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 같았다.
그 이후 회사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좋은 기회를 날린 게 속상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사장님께서 그런 취급을 당했다는 게 모두에게 매우 분한 일이었다.
퇴근 시간을 10분쯤 앞두고 사장님께서 돌아오셨다.
“다들 잠깐 모여 볼래?”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공장장님께서 사장님 앞에서는 다들 모른 척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건만 가장 크게 고개를 끄덕였던 박 차장님은 특히나 표정 관리를 못 하셨다. 내가 슬쩍 눈치를 주자 나름 노력하는 듯했으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외출하고 돌아오신 사장님의 표정은 좀 전보다 훨씬 괜찮아 보였다. 구겨졌던 미간이 반듯하게 펴지고, 잔뜩 내려갔던 입꼬리도 올라와 있었다.
“입찰 참가할 거니까 같이 준비 좀 해 보자.”
“……!”
“……!”
모두가 동시에 놀랐다. 조금 전 볼일이 있다고 나가셨던 게 다시 한성 사장을 설득하러 간 거였나? 아마도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성에서 허락한 겁니까?”
“아니.”
사장님은 자꾸만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다.
“……예? 그런데 어떻게…….”
“그냥 하기로 했어.”
“하지만 사장님, 그러면-”
“지금껏 우리는 할 만큼 했다. 더는 그냥 끌려갈 순 없어. 한성도 언제까지 현세 물량 받을지 모르는데 그것만 믿고 계속 가는 것도 위험한 일이고……. 당장은 우리 대신 제조 일정 맞춰 줄 업체도 없으니 우선은 괜찮을 거다.”
“그래도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입찰 성공해야지.”
“만약에 안 되면요?”
“잘못되면 내가 책임질 테니 한번 해 보자.”
공장장님은 처음부터 사장님 쪽에 힘을 실었고, 직원 중 반은 찬성, 반은 반대쪽 의견을 냈다. 많은 대화가 오가고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엔 사장님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입찰은 박 차장이랑 성하가 담당할 거지만, 필요한 자료 있으면 생산 팀에서 협조 좀 잘해 주고. 늦었네. 다들 퇴근합시다.”
“네.”
여전히 걱정하는 직원들과 달리 사장님은 후련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이셨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장님이 먼저 퇴근하신 후,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사장님의 심경 변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남아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
회의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퇴근이 늦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어느덧 9시였다. 밖은 벌써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유독 지루하고 지겨웠다.
몇 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다녔던 길인데 새삼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딱 하나. 아무도 없는 집에 가기 싫기 때문이었다.
강세현이 올 수 있는 날짜까지 아직도 며칠이 더 남아 있었다.
기다리는 이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매일은 기대로 부풀어서 기다림조차 행복이었다. 하지만 기다릴 필요 없는 어제나 오늘 같은 날은 오히려 실망감뿐이었다.
이럴 거면 약속을 안 정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욕심만 늘어서 바라는 게 점점 더 많아졌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낡은 건물 벽에 늘씬한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이런 조용한 동네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파란색 스포츠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운전석 문이 열리며 안에 타고 있던 주인이 내렸다.
“좀 빨리빨리 다니지? 꼴에 바쁜 척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이야?”
회사 일로 상대하는 건 귀찮고 성가셔도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적으로 불쑥 찾아오는 건 아무래도 짜증이 났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기는 싫었지만, 이런 식으로 요란한 손님이 오는 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주소는 또 어떻게 안 거야.
“아버지가 돈 줬다길래 얼마나 대단한 데 구했나 했더니 꼴랑 여기야? 구질구질하게.”
“보태 준 것도 없으면서 뭐라고 하지 마.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비웃음이 가득했던 강기준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씨발, 우리 아버지가 돈을 줬는데 왜 내가 자격이 없어?! 원래 내 돈인데!”
“아버지 빚은 본인 빚 아니라고 내팽개치고 도망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아버지 돈은 형 거야?”
“이 새끼가-!”
“소리 낮춰. 남들한테 창피하니까.”
차라리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멋대로 구는 양아치지만 그래도 남들 눈치는 보는 인간이라 보는 눈이 있으면 빨리 갈 수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리 늦은 밤도 아닌데 오늘따라 아무도 없었다.
“하아……. 대체 용건이 뭔데. 갑자기 찾아와서 시비 거는 이유가 뭐냐고.”
보나 마나 그냥 괴롭힐 상대가 필요해서 왔거나, 그게 아니면 며칠 전 엄마에게 뺨 맞은 게 억울해서 그 화를 내게 풀기 위해 온 게 분명했다. 계속 상대해 봤자 더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아 대충 기분을 맞춰 주다 보내려 했는데, 혼자 씩씩대며 욕을 중얼거리던 강기준 입에서 정말 뻔뻔한 말이 나왔다.
“내 돈, 돌려줘야겠다.”
“……하.”
아버지 돈도 아니고 내 돈이라니. 내 돈 돌려달라고?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할 일이 없어 왔나 했더니…… 진짜 제정신 아닌 사람은 형 아니야? 내가 그 돈을 왜 줘야 하는데.”
“이 새끼가 진짜……! 네 돈 아니잖아. 사람 돈을 빌렸으면 갚을 줄도 알아야지. 유학할 때부터 아버지가 너한테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그러고 또 뻔뻔하게 빌려 놓고 나 몰라라 해?”
“걱정 마. 그렇지 않아도 곧 갚을 거야. 내 돈 아니라서 돌려줘야 하는 거면 준 사람한테 줄 거지, 절대 형한테는 안 줘.”
어떤 욕이 날아와도 강기준에게 돈을 줄 생각은 없었다. 말했듯이, 내가 돈을 돌려줘야 하는 상대는 새아버지였다. 분명 갚을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엔 늘 빚으로 남아 있었기에 몇 년간 모은 돈으로 조만간 갚을 예정이었다.
“씨발, 짜증 나게.”
제 뜻대로 되지 않자 강기준은 지난번처럼 욕을 쏟아 냈다. 그걸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돈이 필요한 강기준이 맨 먼저 찾아올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보다야 제 아버지한테 먼저 갔었을 것이고, 택배 사업을 다시 시작한 걸 알면 바로 손을 벌렸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내게 찾아와 새아버지가 준 보증금을 내놓으라 하는 건 아마도 아버지에게 거절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엄마 집에서 강기준과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보증금 이야기도 아마 그때 들었을 텐데,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잘 안되자 내게 찾아온 모양이다.
“더 할 말 없으면 이제 가. 다시 오지도 말고. 마주치는 건 회사로 끝내자.”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나를 뚫어지라 노려보는 상대를 무시하고 그 옆을 지나가는데,
“강세현.”
소름 끼치도록 싫은 목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강기준은 비죽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강세현이랑 무슨 사이냐, 너?”
“…….”
“며칠 전에 보니까 꽤 사이좋아 보이던데. 아버지 집 앞에서 너 데리러 왔던 검은색 SUV, 강세현 맞지?”
“…….”
“내가 10년 전쯤 한 번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어서 얼굴을 알거든. 처음엔 정장 입고 있어서 긴가민가했는데, 얼굴은 그대로더라. 걔 맞지? 대답 없는 거 보니 맞나 보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사이좋아 보인다는 말이 그저 가까운 친구 사이 정도를 뜻한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함에 심장이 제멋대로 덜커덩거렸다.
“설마 재벌 중의 재벌이 너랑 진짜 친구를 해 줄 리는 없고, 뭐 약점이라도 잡았냐?”
강기준은 네 주제에 어디서 그런 돈줄을 물었냐며 비아냥거렸다. 당장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남이야 거지랑 알고 지내든 재벌이랑 알고 지내든 무슨 상관인데.”
“그거야 그냥 알고만 지내면 상관없지.”
“무슨 뜻이야?”
“너네 회사, 이번에 현세 입찰 참가할 거라며?”
“……그게 왜. 용건만 말해.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마음이 갑자기 회사와 현세가 동시에 언급되자 초조해졌다. 조금 전 결정 난 게 벌써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궁금했으나 그것보단 우리 회사가 입찰에 참여하는 것과 내가 강세현이랑 알고 지내는 게 무슨 관계인지가 더 중요했다.
“그거 네가 강세현한테 좀 붙여 달라고 한 거 아니야?”
“무슨 헛소리야.”
“뭐,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어. 그 입찰 성공하면 내가 기자한테 찌를 거거든.”
“…….”
“요즘 꽤 핫하잖아. 부정 채용 같은 거. 대기업 임원이 인맥 이용해서 입찰 성공시켜 준 걸로 하면 이미 뉴스거리 되는데…… 그것도 이미 유명한 강세현이라고 하면 아마 기자들 좋다고 달려들걸? 그리고 너네 입찰도 어떻게 될지 몰라. 기사 뜨면 물 건너갈지도.”
불과 몇 시간 전에 사장님이 한성 사장을 과대평가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 역시 여태껏 몇 년을 알고도 강기준을 과대평가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저히 쓰레기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치사한 놈이었다.
지금 저걸 협박이라고.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똑같은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마음대로 해.”
“……뭐?”
내내 히죽거리며 꼴 보기 싫던 표정이 드디어 사라졌다.
“강세현이랑 나, 친구라고 부를 만큼 그렇게 대단한 사이 아니야. 연락처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뭐? 입찰? 걔는 나 어떤 회사 다니는지도 모를걸. 그러니까 유치한 짓 좀 그만하고 가라. 잘 모르는 사이니까, 우리.”
“웃기지 마. 잘 모르는 사이면서 걔가 널 왜 데리러 와. 내가 그딴 거짓말에 속을 줄 알아?”
“거짓말이든 진짜든 맘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해. 대신 찾아오지 마. 뭐라고 협박해도 내가 그 돈 형한테 줄 일 없으니까. 입찰도 포기 안 할 거고, 돈도 안 줄 거야.”
이번에야말로 정말 집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시뻘게진 강기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후 뒤를 돌았는데,
“거지새끼. 에미나 자식이나 똑같이 빌붙어 사는 주제에.”
강기준은 끝까지 수준 낮은 말을 입에 담았다.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과거에 당했던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표정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무시해. 여태 내가 어떻게 참았는데.
아무리 다짐해 봐도 자꾸만 유치한 도발에 분노가 차올랐고, 그럴 때마다 괜히 내가 아닌 애먼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말해 봐.”
며칠 후에 온다던 강세현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