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내가 사는 곳도 상당히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비하면 시끄러운 편이었다. 오랜만에 가는 엄마 집은 사람들의 교류가 유난히 적은 동네 안에 있었다. 차로 고작 10분. 택시를 타면 만 원도 나오지 않는 가까운 거리니 가고자 하면 얼마든지 자주 갈 수 있는 곳인데도 거의 석 달 만의 방문이었다.
바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강세현 때문이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강세현을 매일같이 기다리느라 다른 누군가를 만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를 찾아뵙는 것조차 잊다니. 여태까지 잘해 오던 아들 노릇을 이렇게 쉽게 저버렸다.
내가 독립한 후 수시로 연락할 줄 알았던 엄마는 의외로 가끔 안부만 묻는 정도였다. 그리고 자주 오라는 재촉 대신 항상 바쁜데 무리해서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랬던 엄마에게서 어제 연락이 왔다.
‘요즘엔 좀 많이 바쁜가 보네, 우리 아들.’
그제야 엄마를 본 지도 석 달이 다 되어 간다는 걸 알았다.
마침 강세현도 며칠간 오지 못한다고 했으니 오늘쯤 가겠다고 하자 엄마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괜히 더 미안해졌다.
“이쪽에서 세워 주세요.”
익숙한 골목에 들어선 후 택시를 세웠다. 그리고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7년 전 거의 신축에 가까웠던 10층 건물에선 이제 제법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매번 느끼지만, 군대 가기 전 1년간 살았던 곳인데도 그 어디 하나 정겨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연락해 봐야 하나. 출발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래서 올라가기 전 다시 전화를 해 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어제 이미 가겠다고 했으니 굳이 다시 얘기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알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5층 가장 끝 집이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어, 아들.”
평소라면 훨씬 반갑게 맞았을 텐데 오늘따라 뭔가 이상했다. 엄마는 침착하다 못해 조심스러운 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지난번 미국 출장에서 돌아올 때 샀던 화장품과 집 근처 정육점에서 산 소고기를 건넸다. 이번에도 역시 고맙다며 포옹이라도 해야 할 엄마가 살짝 미소만 짓고 말았다.
“무슨 일 있어?”
목소리를 낮춰 묻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안방을 가리켰다. 뒤늦게 깨달았다. 이쯤 되면 등장해야 할 새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통화 중이셔?”
“아니. ……기준이 왔어.”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새아버지한테 연락 온 거야?”
“아니. 저 사람도 몰랐어. 어떻게 알고 왔더라.”
“무슨 얘기 중인데 방에서 해.”
“몰라. 그냥 둘이서 할 얘기가 좀 있대. 나더러 신경 쓰지 말고 있으라면서 오자마자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더라.”
만약 강기준을 회사에서 미리 만나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 놀랐겠지만, 한 번이라도 마주했다고 면역이 생긴 건지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래도 어이는 없었다. 또라이 짓은 나한테만 하면 되지. 갑자기 여길 왜 와.
혹시 날 봤다고 아버지 생각이 난 건가,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럴 효심이 있었으면 애초에 매정하게 연락 끊고 돌아서진 않았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배고프지? 먼저 밥 먹게 얼른 앉아.”
“아직 괜찮아. 나오면 같이 먹지, 뭐.”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그래. 벌써 들어간 지 한 30분은 된 것 같은데.”
“그랬으면 곧 나오겠지. 어차피 엄마도 나중에 먹을 거잖아.”
“아닌데? 우리 아들 불러 놓고 어떻게 혼자 먹게 해. 나도 지금 먹을 거야.”
엄마는 밥공기 두 개를 준비했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이었다. 전엔 어떻게든 가족은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서 식사해야 한다고 믿었었던 엄마다.
‘성하 네가 싫으면 엄마랑 둘이 살아도 돼. 엄마는 지금도 좋아.’
‘그래도 나 유학까지 시켜 준 사람이잖아. 모른 척 등 돌리는 거, 마음 불편해.’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으나 그 벌은 이미 감옥에서 받았고, 그런 일로 내가 그 사람에게 더 실망할 일은 없었다. 원래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여전히 엄마는 내가 유학 중일 때 새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모른다. 아니,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새아버지와 내가 서로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그 사람과 내가 서로에게 얼마나 정이 없는지를 어렴풋이 눈치챈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너무 티 나게 서로를 불편해했으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해 왔던 걸 수도 있다.
다만 전에는 그 사실을 알고도 무던히 그 사람과 나를 가족으로 만들려고 애썼다면, 지금은 반대로 새아버지와 나를 만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오늘도 밖에서 둘이 따로 만나자는 걸 내가 집으로 오겠다고 우겨서 온 거였다.
국을 데우는 동안 자리에 앉아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엄마가 갑자기 웃었다.
“바빠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 건 아닌가 했는데, 어째 얼굴이 좋아졌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저녁을 책임지는 사람이 있는데 좋아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많이 먹으라고 대놓고 강요하진 않지만, 젓가락질을 멈추면 꼭 입에 안 맞냐고 물었다. 그러니 늘 조금이라도 더 먹게 됐다.
“요즘은 잘 챙겨 먹고 다녀. 걱정 안 해도 돼.”
“맨날 밖에서 먹는 건 아니지?”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밖에서 먹는 건 아니지만, 서너 번을 제외하곤 항상 식당에서 포장해 온 음식이었다. 그것도 외식 아닌가? 강세현이 가져온 음식들은 하나같이 뭔가 건강해 보이고 식당에서 만든 음식 같지 않아서 잊고 있었다.
“엄마.”
“응, 왜?”
“있는 반찬 몇 가지만 챙겨 줘.”
그 말에 엄마는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웬일이야? 맨날 가져가래도 됐다고만 하면서.”
“그냥.”
“그러면 미리 좀 말하지. 너 좋아하는 것 좀 많이 해 두는 건데. 다음번엔 꼭 미리 말해.”
엄마가 데워진 국을 푸는 동안 나는 그릇에 밥을 담았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막 자리에 앉았는데,
“―뭐?!”
뭔가 쿵, 바닥을 울리며 멀리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니?”
동시에 시선은 굳게 닫혀 있는 문으로 향했다. 분명히 방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왜요! 왜 안 되는데요?”
“왜냐고? 감히 그딴 말이 나와?! 네가 어떻게!”
몇 번 더 큰 소리가 났다. 이제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강기준이야 원래 그렇다 쳐도 새아버지는 절대 이렇게 소리를 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너무 놀랐다. 여태껏 내 기억 속의 그 사람은 늘 침착했고 냉정했었다.
들어가서 말려야 하나? 그런 고민할 새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더는 할 얘기 없으니 당장 나가라!”
강기준은 쿵쿵대며 시끄럽게 방에서 나왔다. 씩씩대며 욕을 중얼거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고개가 우리 쪽으로 획 돌아왔다. 엄마를 보고 한 번, 그리고 나를 보고 한 번. 강기준은 총 두 차례에 걸쳐 인상을 썼다.
“하, 씨……. 쌍으로 재수 없게.”
기가 막혔다.
지금 재수 없는 사람이 누군데. 본인이야말로 평온해야 할 저녁 식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이 상황에서 누구더러 재수 없다는 거야.
나한테만 하는 소리면 그냥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뭐 같은 분위기를 더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엄마까지 포함해서 이유 없이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엄마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여태 새아버지와 나를 가족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처럼, 엄마는 강기준도 식구라고 생각해 왔다.
“뭐-”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짝-!
살결을 때리는 찰진 소리와 함께 강기준의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
“……!”
어느새 자리를 옮긴 엄마는 강기준의 뺨을 힘껏 때렸다. 가까이서 본 나도 놀랐고, 멀리서 본 새아버지도 놀랐고, 당연히 맞은 당사자도 놀랐다. 강기준은 고개를 돌린 채 놀란 얼굴로 굳어 있었다.
“싸가지 없는 자식.”
욕은커녕 나쁜 말이라곤 평소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밖에 모르는 엄마는 저런 말을 할 때도 어설프고 어색했다. 그러나 이미 뺨따귀를 맞고 정신을 놓은 강기준은 한 마디 반항도 하지 못했다.
오늘 참…… 여러 번 놀란다.
조금 전 언성을 높이며 다투던 새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그 자리에 작은 체구로 온 힘을 다해 싸대기를 날리는 엄마의 모습이 들어섰다.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강기준이 도망치듯 집을 나간 뒤 상황은 종료되었다. 만약 거기서 강기준이 대들었다면 회사를 그만둘 생각으로 덤볐을 텐데, 다행히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입맛이 없다며 저녁을 거르겠다는 새아버지를 두고 결국 엄마와 나는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으나 어느 때보다 맛있는 식사였다.
“엄마, 이제 가 볼게.”
“벌써? ……에휴, 그래. 그럼 잠깐만 앉아 있어. 반찬 챙겨 줄 테니까.”
아무래도 오늘은 오래 있기가 좀 그래서 식사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새아버지의 상태를 살핀 엄마는 서둘러 반찬을 챙겼다.
드르륵-.
식탁에 앉아 가만히 엄마를 보고 있는데, 식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1개의 Message]
처음 보는 번호였다.
지금 시간에 누구지?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시간이라 회사 사람이 아니고선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이 없는데, 회사 사람이라면 당연히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문자함을 열자 액정에 선명한 글자가 떠올랐다.
[어디야]
놀랍게도 단번에 누군지 알아챘다.
그리고, 고작 세 글자밖에 안 되는 말에 이렇게 설렐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MINT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