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회의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자 어느덧 세 시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었다.
회의에 참석 안 한 나머지 사람들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슬쩍 물어봤지만, 그냥 생산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고만 했다.
‘이 일은 결정 날 때까지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다른 사람들이 물어봐도 말하지 말고, 한성 담당자한테 연락 와도 모른 척하고.’
다른 사람들을 못 믿는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적은 편이 더 좋았다.
“아, 권 대리님.”
이번에 막내로 들어온 사원이 뒤에서 등을 두드렸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호칭은 들을 때마다 괜히 기분이 간지러웠다. 몇 년 동안 막내였다 보니 직함을 달고도 계속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누군가 대리님이라고 높여 주는 게 아직도 어색하기만 했다.
“조금 전에 한성에서 연락 왔어요.”
“언제요?”
“한…… 30분 전?”
“누구라고 하던가요?”
“이 과장이라고 하던데요. 그렇게 말하면 알 거라고. 꼭 다시 전화 달라고 했어요.”
혹시나 소식을 듣고 전화한 건가, 순간 심장이 떨렸다.
“고마워요.”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한참 가던 신호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 이창진입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 아-아! 성하 씨.
대리 직함을 단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날 성하 씨라고 부르는 이 과장은 영업부 소속으로 현세에서 받은 사양이나 설계 쪽 요구 사항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와는 가장 연락을 많이 주고받는 사람이었다.
“전화하셨다면서요. 회의하느라 이제야 전달받았어요.”
- 어쩐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오나 했지.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네, 하하.
반응을 보아하니 절대 입찰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랬으면 좀 더 심각한 목소리였을 텐데 오히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입찰과는 전혀 상관없는 용건을 말했다.
- 다름이 아니라, 담당자가 좀 바뀌게 됐어요. 앞으로는 나 말고 내 후임이 연락할 거예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쉬운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차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아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그런 빈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상대는 성격이 나쁜 사람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갑질하는 쪽이 편하다고 생각할 만큼 은근슬쩍 사람을 무시하거나 무안 주는 사람. 애당초 한성 담당자 중엔 괜찮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타입이었다.
- 무슨 일? 우리 성하 씨는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바로 이런 거였다. 같잖은 농담으로 사람 무안 주는 거.
“아니요. 갑자기 담당자가 바뀐다고 하셔서 혹시 다른 프로젝트 맡게 되셨나 해서 물어봤어요.”
- 그렇다고 내가 다른 걸 더 맡게 되는 건 아니고, 지금 맡은 것도 너무 많아서 성진 일은 이번에 새로 온 대리한테 맡기려고요. 넘기고 나서도 당분간은 내가 지켜볼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 뭐, 담당자 바뀌어도 성하 씨가 힘들 거 없잖아? 어차피 우리가 넘겨주는 자료 받아서 사양서만 만들면 되고, 도면도 설계가 다 그려 주는데.
그게 제일 힘들다는 걸 모르나.
이 과장은 저렇게 말해 놓고 우리가 힘들게 만든 자료를 현세에 고대로 전달만 하면서 본인이 힘들었다고 생색을 낼 사람이었다.
- 어쨌든 이번 주에 한번 데려갈게요. 인사는 시켜야지.
“언제쯤 오실 겁니까?”
- 글쎄. 안 바쁜 날? 수요일이나 목요일쯤이 적당할 것 같은데 우선 좀 보고. 성하 씨 사무실 잘 지키니까 아무 때나 가도 되죠?
순간 화가 나 울컥하는 마음을 눌렀다. 찾아온다는 사람이 내 일정이 아니라 본인 일정에 맞춰 아무 때나 오겠다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저딴 말까지 듣자 내 입장을 잠시 잊을 뻔했다.
“……네. 그럼 오시기 전에 연락해 주세요.”
- 오케이. 그럼 수고.
뚜- 뚜-. 끊어진 전화기를 내려놓고 몇 초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짜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잠깐 바깥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근무 시간 중에 대놓고 농땡이를 피우러 나가는데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날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뒤늦게 담배를 피우러 나온 차장님은 내 이야길 듣고 웃으셨다.
“누가 오든 이 과장보다는 낫겠다. 잘됐다고 생각하자.”
***
수요일이나 목요일이 적당할 것 같다던 이 과장은 바로 그다음 날인 화요일에 찾아왔다. 분명 본인이 먼저 오겠다고 해 놓고 도착하자마자 바쁜 사람을 일부러 여기까지 불렀다며 다음부터는 돈 받는 사람이 오라는 재수 없는 소릴 날렸다. 그래놓고 뺀질뺀질한 외모로 웃으며 농담이라고 하는 것까지 그대로였다.
“새로 오셨다는 분은요?”
“주차하고 온다고 나 먼저 내렸어요. 곧 올걸요? 매번 느끼지만 여기는 사무실이 너무 답답한 것 같아요. 사장님한테 웬만하면 좋은 데로 좀 가자고 해요. 많이 버신 양반이 너무 직원들 맘을 몰라 주시네.”
불과 1년 전, 새로 개척되는 산업 단지로 이사 와 새 땅에 공장을 지었다. 사무 인원이 아주 적은데도 사무실은 4층이나 되고, 공장동에는 일용직 인부들의 휴게실까지 잘 마련되어 있었다. 어딜 봐도 훌륭한데 도대체 어디가 그리도 부족하다는 건지. 보나 마나 괜한 시비였다.
“새로 오신 분은 경력이 있으신 분인가 봐요. 대리라고 하셨죠?”
“대리는 맞는데 경력이 있는지는 몰라요, 나도. 이사가 갑자기 데리고 왔거든요. 알죠? 새파랗게 어린 사장 아들.”
“네.”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나이는 이사보다 몇 살 더 많더라고요. 참 웃기지. 누군 꼴랑 나이 서른에 이사고, 누군 넘었는데도 대리고. 역시 태어날 때 금수저로 태어나야 해.”
이 과장은 본인보다 열 살이나 어린데 이사 직함을 단 사장 아들 욕을 한참 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는 척했지만, 사실은 겨우 서른 살에 이사 직함을 단 다른 한 사람을 떠올리느라 제대로 듣지 않았다.
보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 우습게도 강세현이 보고 싶었다.
“박 차장님은?”
“안에 계세요.”
“그래? 그럼 먼저 들어가지, 뭐.”
기다리던 이가 늦는 것 같아 우리끼리 먼저 회의실로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과장이 슬쩍 턱을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어? 저기 오네. 강 대리! 여기! 이쪽이야.”
상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곧바로 뒤를 돌았다.
“……!”
얄팍한 눈매와 비죽 올라간 입꼬리를 보는 순간 바로 얼어붙었다.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점점 더 가까워지는 얼굴은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이쪽이 앞으로 연락할 강기준 대리.”
“…….”
“성하 씨, 뭘 멍하니 서 있어. 인사해야지.”
오랜만에 보는 상대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특히나 나를 깔보는 눈빛은 소름 돋을 만큼 그대로였다.
강세현과의 재회가 너무 행복해서 꿈 같았다면, 이번엔 반대로 너무 끔찍해서 꿈 같았다. 긴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지독한 악몽.
“안녕하세요. 권성하입니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았다. 어제 차장님이 하셨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가 오든 이 과장보다는 낫겠다. 잘됐다고 생각하자.’
아니에요, 차장님. 이보다 더 최악은 없을걸요.
이 와중에 눈치 없는 이 과장은 뭐가 재밌는지 실실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 악수라도 한 번 하지? 왜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굴어. 앞으로 자주 볼 건데.”
“과장님 말씀이 맞네요. 앞으로 지겹도록 볼 건데, 잘 부탁……합니다?”
강기준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오른손을 먼저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곧바로 잡지 않았다.
잠깐 본 것만으로 이렇게 짜증이 치미는데 앞으로 계속 연락해야 한다고? 그것도 이런 관계로?
이제 겨우 거지 같은 갑을 관계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거래처 담당자로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나도 여전히 상대는 나를 깔보았고, 나는 그걸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 이 과장, 오랜만이네.”
때마침 사무실로 올라온 공장장님 덕분에 악수 없이 이 끔찍한 재회를 끝낼 수 있었다. 손을 거둔 상대가 날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잘해 봐요, 권 대리님.”
담당자가 바뀐다고 했을 때 미리 이름이라도 들어 놓을걸. 그랬으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는데 한심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뒤늦게 후회가 됐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황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상대였다.
문득 아버지가 구속당했을 때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아오, 씨발! 쪽팔리게. 사람들한테 다 자랑하고 다녔는데 어쩔 건데!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내 오피스텔은? 내 오피스텔도 가져간대? 이 집은? 숨겨 놓은 돈이라도 있을 거 아냐!’
나에겐 최악의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본인의 친아들에게는 최고의 아버지였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 제 아버지가 힘들 때 맨 먼저 떠나간 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양심이 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원망할 수 있어도 강기준만큼은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그럼 여기까지 하고 이만 일어나 볼까. 이제 우리도 사무실 갔다가 퇴근해야지.”
회의는 그리 길지 않았다. 말이 회의지, 그저 담당자를 소개해 주러 온 거라서 한 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반 이상이 쓸데없는 수다에 가까웠다.
“강 대리. 잠깐 있어 봐. 나 화장실 좀 갔다가 가게.”
“나도 얼른 공장 좀 가 봐야겠다. 성하야, 뒷정리 좀.”
“네.”
원치 않은 상황이 왔다. 강기준과 내가 둘이 남겨지는 상황.
“넌 어떻게 이렇게 그대로냐.”
“…….”
“변한 게 없네, 변한 게.”
비아냥거림이 섞인 말투였다. 분명 시비를 거는 말인데 픽 웃음이 났다.
“진짜 변한 게 없는 사람이 누군데.”
나도 모르게 차가운 말이 튀어나왔다.
“여전하네. 본인이 가진 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목에 힘주고 다니는 거. 그러면서 남 무시하고 깔보는 거.”
“……뭐?”
“쪽팔린 줄 알아야 할 텐데 여전히 모르지? 멍청한 것까지 그대로라서 놀랍다.”
강기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이게 돌았나.”
돌아도 너보단 나을걸. 형편없는 쓰레기 주제에.
속 안에 있는 욕을 전부 다 꺼내지 못해 아쉬웠다. 장소가 장소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적당히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씨발, 뭐 잘못 먹었냐?”
“…….”
“뭐 잘못 처먹었냐고 묻잖아, 이 새끼야.”
반대로, 장소와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는 강기준은 이 과장이 돌아올 때까지 내게 아는 욕을 전부 퍼부었다. 여전히 어리석고 한심스러웠다.
이젠 내가 새아버지 재산을 가져갈 일도 없고, 본인 몫을 뺏을 일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억울할까. 단순히 열등감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우리도 참, 질긴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