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86화 (86/96)

#86

16. 약속

권성하

오늘따라 강세현은 말이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건 본인이면서 날 보고 놀라질 않나, 집에 들어와서도 계속 멍하니 있질 않나. 잠깐 그럴 줄 알았는데 꽤 오랜 시간 멍하니 말이 없었다.

“저녁을 아직 안 먹었어?”

“어.”

어쩌다 못 먹었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누가 봐도 강세현은 회사에서 바로 온 차림이었다. 밤 열 시가 되도록 밥도 안 먹고 여태 일했으면 그냥 집에 가지. 분명 피곤할 텐데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게 안쓰러우면서도, 날 보러 일부러 와 준 것 같아 기뻤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모든 직원이 가족 또는 연인과 식사하러 일찍 퇴근했지만, 만날 사람이 없는 나는 오늘 같은 날 일찍 퇴근하는 게 싫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어딘가 기대하고 있었다. 혹시나 와 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하지만 여덟 시가 넘도록 강세현은 오지 않았고, 결국엔 기다림을 포기하고 혼자 밥을 먹었다. 설마 지금 시각에 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뭐 먹을래? 아직 연 식당 있을 수도 있어.”

“됐어. 혼자 무슨.”

“나는 뭐 좋아서 사람 앞에 두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셨냐? 내가 그럴 땐 박박 우겨 놓고.”

강세현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펴고 웃었다.

“밥은 됐고, 그냥 치킨이나 시켜 먹자.”

몇백만 원짜리 명품 정장을 빼입은 사람 입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저런 말이 나왔다. 마치 여러 번 그래 본 것처럼.

“근데 오늘 좀 오래 걸릴 거야. 직접 가지러 가면 좀 나을 테니까 잠깐 나갔다 올게.”

“그럼 같이 가. 나간 김에 술도 좀 사게.”

“술 마시려고?”

“어. 너 다시는 혼자 마시기 싫다며.”

“오늘 술 마신다는 소리 안 했는데?”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려고? 두 병씩만 마시자.”

샴페인이라도 따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소주라니. 과거에 수차례 함께 마셨어도,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기에 어색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너 차는?”

“가져왔지.”

그러면 어쩌려고,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다음 말이 들려왔다.

“재워 줘.”

“…….”

“그러려고 보낸 거야, 저거.”

강세현은 벽 한쪽에 놓인 접이식 소파를 가리켰다.

그래. 왠지 네가 보냈을 것 같더라, 저거.

이틀 전 갑자기 도착한 물건은 주문한 이름 역시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보낸 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포장을 뜯어 보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시카고에 있을 때만큼 집이 넓지 않아서 소파도 그리 크지 않지만, 그래도 색깔이나 디자인이 무척 비슷했다. 이런 걸 갑자기 보낼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이렇게 하나씩 제 물건을 늘리던 강세현.

전과 똑같은 절차를 밟는 것 같은 건 단지 내 기분 탓인가.

아무래도 오늘은 절대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강세현은 꾸준히 찾아왔다.

저녁 8시만 되면 심장이 뛰었다. 불안한 마음과 기대가 섞인 두근거림이었다.

오늘도 오려나, 그런 기다림이 괴로웠고 오지 않는 날에는 보고 싶은 마음에 사무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도 강세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 행복해서, 오지 않는 날의 실망감을 자꾸만 잊었다.

왜 날 찾아와? 왜 계속 날 보러오는데.

오는 횟수가 빈번해질수록 몹쓸 기대가 피어났다.

“가 볼게.”

저녁 9시, 오늘도 강세현은 같은 시각 현관문을 나섰다.

“운전 조심해.”

“어.”

짧은 대답 후 상대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오늘따라 유독 널따래 보이는 등을 보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저기.”

모르는 사람처럼 부르지 말랬는데.

기억이란 녀석은 너무나 간사해서 꼭 잊고 싶은 기억만 선명하게 떠올렸다.

“왜.”

강세현은 다시 뒤를 돌았다. 살짝 접힌 미간을 보고 괜히 붙잡았나 순간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 무를 수가 없었다.

“내일 올 거면 아무것도 사 오지 마.”

잘생긴 눈썹 아래 깊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상당히 놀란 듯했다.

“주말이니까 집에서 해 먹으려고 하는데.”

“…….”

“술도 한잔하려고.”

강세현과 나는 매번 약속 없이 만나고 약속 없이 헤어졌다. ‘지금 갈게’ ‘빨리 와’ 이런 연락도, ‘또 올게’ ‘다시 보자’ 이런 인사도 없이.

생각해 보면 연인일 때 우리의 헤어짐도 그랬었다. 한 명이 떠나가고 다른 한 명은 붙잡지 않는 헤어짐. 그저 안녕, 하고 돌아서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그런 이별.

처음엔 강세현이 왜 연락하지 않고 찾아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주소도 간단히 알아냈으니 분명 전화번호도 알고 있을 게 뻔한데. 그래서 차라리 연락을 미리 달라고 할까, 생각했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약속 같은 걸 해 버리면 정말 희망을 품어 버릴까 봐. 다음에 대한 확신이 도리어 두려웠다.

그런데 강세현은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한 해의 마지막 날에도, 주말에도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난 그때마다 강세현을 기다렸다. 마치 약속한 것처럼.

문득 궁금해졌다. 예전의 강세현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계획도 없이 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약속 같은 걸 하지 못할 정도로 바쁜 걸까. 아니면 단지 나와는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일부러 나를 애태우려고 그러는 거면 당연히 성공이었다.

“…….”

강세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럴 걸 예상하고 용기를 낸 거라서 크게 실망스럽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 거야. 지난번처럼 괜히 고생할까 봐.”

이제 가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툭툭,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자 갈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것도 한참이나.

“왜?”

답답해진 내가 결국 먼저 입을 열자 꾹 다물린 입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강세현은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그냥 올게. 내일 봐.”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던진 강세현은 바로 문을 나갔다. 쾅. 현관문이 닫히고 난 뒤에도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약속을 잡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도, 잡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강세현은 그냥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 주기를.

쿵쿵. 심장 소리가 시끄러웠다.

***

강세현과의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나의 하루는 점점 짧아졌다.

행복한 순간은 빨리 지나가니까. 지금의 나는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뜻이었다.

바쁜 연초, 좁은 사무실 안에서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바빴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 약속한 것처럼 밀려드는 전화를 붙들고 있는데 조금 소란스럽게 문이 열렸다.

“다들 바쁜가? 잠깐 모였으면 좋겠는데.”

손님과 약속이 있다며 외출하셨던 사장님이었다.

“저희 전부 다요?”

“한성 담당하는 사람은 전부. 혹시 사무실에 없는 사람 있으면 빨리 오라고 하고, 공장장도 좀 불러 줘.”

여태 봐 온 사장님은 이렇게 즉흥적으로 회의를 소집하는 분이 아니셨다. 웬만한 일에도 침착하신 분이 상당히 들떠 있는 듯해 의아했다.

나를 포함한 사무실 직원 4명과 공장장님은 한쪽에 마련된 회의실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이미 10분 전부터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무슨 일 있습니까?”

공장장님께서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그러자 사장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조금 전까지는 기뻐서 상기되어 있으셨는데 그새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좋은 소식이긴 한데……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어서…….”

“뭔데 그러세요? 한성이 물량 늘려 준대요?”

“그런 거면 생산 계획 어떻게라도 조정해 봐야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야.”

“네?”

동시에 여러 명이 같은 소릴 냈다. 물량을 늘려 주는 일의 반대라면 오히려 줄어든다는 건데, 그러면 절대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었다.

“조만간 현세 입찰 공고문 뜰 건데, 이번에 현세 쪽에서 입찰 조건을 좀 바꿀 예정이래. 입찰 품목도 전보다 세부적으로 나누고 은행 보증 금액도 2/3수준으로 낮추고.”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기연 사장. 그쪽은 한성 말고 다른 업체랑도 거래하잖아. 그 업체가 이번에 참가하는데 담당자가 사장한테 언질 준 모양이더라고.”

기연은 우리와 같은 한성의 하청 업체였다. 유압 기계뿐 아니라 다른 기계에 들어가는 밸브 종류를 다양하게 제조하는 곳으로 거래하는 곳이 상당히 여러 군데였다. 기연 사장님과 우리 회사는 전 사장님이 계실 때부터 알고 지내는 인연이라고 하니 괜한 말을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보증 금액을 그만큼이나 낮춘 건 좀 파격적이네요.”

“우리 같은 작은 기업도 참가하라고 편의를 많이 봐준 거지. 다른 중간 업체 끼우지 말고 직접 하라고.”

분명 좋은 소식인데도 무작정 좋아할 수 없었다. 다들 나처럼 걱정이 앞서는지 누구도 섣불리 기뻐하지 않았다.

“기연은 어떻게 한대요?”

“직접 참가할 거래.”

“허……. 용기 있으시네요.”

“그쪽은 한성한테 받는 물량이 적잖냐. 기껏해야 본인들 매출에 몇 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포기하기도 쉽겠지.”

“그래도 몇 퍼센트가 어디예요.”

“매출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현세랑 직접 거래하면서 다른 길도 트려고 하는 걸 거야.”

“아…….”

문제는 우리 회사였다. 한성 사장이 직접 접대까지 하며 이번 입찰에 꼭 참가하고 싶어 했는데, 우리가 한성을 빼고 직접 참가한다고 하면 절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기연처럼 한성에서 받는 물량이 적을 경우에는 과감히 거래를 끊을 수 있겠지만, 물량이 많은 우리 회사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만약 되면, 정말 좋은 거 아니에요?”

“어. 이번에 자동차 라인 늘리면서 추가로 발주할 양이 기존의 거의 두 배래.”

“와……. 저희 그것까지 하면 매출 몇 배로 뛰는 거네요.”

“그것뿐이냐. 잘하면 기존 물량도 직접 발주받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이익도 엄청나다. 지금은 한성 영업 이익 늘려 주느라 우리도 그만큼 손해 보고 있으니까.”

한성이 발주한 제품은 다른 거래처에 나가는 단가보다 20%나 더 낮았다. 그래서 물량이 적은 다른 거래처들과 비교했을 때 물량 대비 이익 면에서 엄청나게 차이가 나진 않았다. 물량이 많아도 그렇게까지 낮춰 주는 건 말도 안 된다며 몇 번이나 단가를 올려 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주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는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한성이 저희한테 발주 주는 거 전부 현세에만 들어가는 거잖아요. 다른 업체 발주분까지 저희한테 주면 모를까, 그런 거 아니면 저희가 현세랑 직접 거래해도 되는 거 아닐까요?”

“그래도 그게 쉽지 않지. 입찰을 성공하면 좋은데 만약에 안 돼 봐. 한성이 다시 우리랑 거래하겠냐? 기존에 발주받는 물량 끊기면 우리 회사 망해.”

“……그러네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다들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앞에 놓인 커피는 차갑게 식어 갔다. 긴 침묵을 깬 건 사장님이셨다.

“일단 공고문 뜨면 한성 사장님께 연락드려야겠다. 그때 돼서 좀 뵙자고 해야지.”

“만나서 뭐라고 하실 겁니까?”

“우선 운을 띄워 보고 상황 봐서 눈치껏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입찰 조건 쉬워졌으니 다른 업체들도 많이 참가할 건데……. 한성도 이번 입찰 성공할 거라는 보장 없으니까 저희도 좀 해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허락해 줬으면 좋겠다는 공장장님의 말에는 공감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성 사장을 떠올렸을 때 절대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욕심 많은 사람이 과연 허락해 줄까.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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