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권성하는 오늘도 놀랐다.
아니, 특히 오늘 더 놀랐다는 말이 정확했다.
“…….”
“…….”
일부러 10분쯤 있다가 초인종을 누르자 문을 열고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 추운데.”
“아, 미안. 들어와.”
그렇다고 미안할 것까진 없는데.
집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잔잔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책상 위 놓여 있는 노트북에서 나는 소리였다. 영화를 보던 중인 것 같았는데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권성하는 서둘러 화면을 정지시켰다.
열 평쯤 되어 보이는 작은 공간. 현관 왼쪽 옆으로 욕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바로 주방이 연결되어 있었다. 항상 잘 정리되어 있던 싱크대 위에 도마와 냄비가 나와 있었다.
“아……. 올 줄 몰라서.”
권성하는 여전히 눈치가 빨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내 속을 알고 미리 답을 내놓았다. 아마 주말인 오늘 내가 올 거라고 생각 못 해서 혼자 밥을 먹으려 한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급하게 내려놓은 식칼도 삐딱하게 놓여 있었다. 그 아래 감자가 가지런히 썰려 있었다.
“치우지 마.”
서둘러 정리하려는 걸 말렸다. 순간 멈칫, 손을 멈춘 권성하는 어느 때보다 곤란한 표정이었다.
“하려던 거 마저 해.”
“꼭 지금 안 먹어도 되는데.”
흔들리는 눈동자가 내 손에 든 종이봉투로 향했다.
“이것도 지금 안 먹어도 돼.”
“그래도 일부러 사 온 거잖아.”
“사는 것보다 하는 게 더 힘들어. 일부러 하려던 거면 해서 먹는 게 낫지. 이건 내일 먹어.”
가져온 음식을 내밀자 권성하는 마지 못한 표정으로 받았다. 국과 반찬통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면서도 몇 번이나 아쉬운 듯 눈을 떼지 못했다.
남이 해 준 음식 따위 전혀 아쉽지 않은데.
유명한 쉐프가 아무리 정성껏 만든 음식이라도 내겐 권성하가 내어 주는 즉석 카레만도 못했다.
잠깐 앉아 있으라며 방석을 건네준 권성하는 작은 상을 앞에 펴고 노트북을 들고 왔다.
“좀 걸릴 것 같아서. 이거 보고 있어.”
하얀 손이 마우스를 몇 번 건드려 조금 전 보던 영화를 맨 앞으로 돌렸다.
이미 봤던 영화였다. 권성하가 비행기에서 여러 번 돌려 보던 영화.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때가 생각나 곧바로 찾아봤었다.
그때도 몇 번이나 돌려 보더니 이걸 또 봐? 그럭저럭 괜찮아도 이렇게 단기간에 여러 번 볼 만큼 취향은 아니었기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영화가 계속 재생되는 동안 권성하는 요리를 했다.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부산스럽게 느껴질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작은 움직임 하나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제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닌데도 내 마음만 처음 사랑에 빠진 그때에 머물러 있었다.
“아, 마실 거 줄까?”
“내가 꺼낼게.”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쁜 주인을 대신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겉보기엔 아주 평범해 보였던 냉장고 안은 지나치게 텅 비어 있었다.
조금 전 내가 가져온 음식을 제외하곤 대부분 마실 것뿐이었다. 영양가 없는 탄산음료와 각종 과일 주스. 그리고 한쪽엔 소주병 2개가 가지런히 서 있었다.
그나마 오늘 장을 본 게 이 정도라니.
“왜 마실 것밖에 없어?”
“사다 두면 자꾸 버리게 돼서 그날그날 사 먹어.”
“술도?”
내내 도마에서 눈을 떼지 않던 권성하는 그제야 눈을 마주쳐 왔다. ‘뭐, 그렇지.’ 답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민망한 듯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자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었다.
예전 습관이 그대로 드러날 때마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여전히 내가 아는 권성하, 내가 그리워하던 권성하 그대로라는 안도감과, 모든 게 그대로인데 변해 버린 건 오직 우리 사이뿐이라는 안타까움.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도 내 마음을 억눌러야 한다는 현실에 막막해졌다.
예전엔 쉬웠었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던 그때는 처음 알게 된 감정에 잠깐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그 설렘을 따라 쉽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가올 일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며 무턱대고 권성하에게 직진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계속 봐 왔고, 기다렸고, 이제야 말을 걸었지만 그게 다였다. 한순간도 너를 잊어 본 적 없으니 다시 잘해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이어 섣부른 고백에 권성하가 당황할까 봐 그렇다고 좋게 포장했지만 사실은 거절당할 게 두렵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만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런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나서.
어쩌면 철없이 무작정 다가가던 그때가 오히려 더 어른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걸 알아 버린 지금은 친구가 되자는 말조차 쉽게 할 수 없어 이런 식으로밖에 찾아가지 못했다.
“다 됐어. 잠깐 멈출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권성하는 노트북을 가져가고 그 자리에 냄비 받침을 놓았다. 넙데데한 냄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간장으로 양념된 닭고기와 야채가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미국에 있을 때 권성하가 종종 파스타나 토스트를 만들어 준 적은 있지만, 한식은 항상 식당에서 포장해 먹었기 때문에 권성하가 직접 만든 한식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무 멀뚱히 쳐다본 탓일까, 상대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든 사람 민망하게 뭘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어. 먹을 거야, 말 거야.”
“먹어.”
“못 먹을 정도는 아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하는데.
사람이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지만,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었다. 내겐 그게 요리였다. 아무리 쉬운 레시피를 봐도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반면 권성하는 요리에 꽤 소질이 있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레시피를 보고 대충 만든 파스타도 항상 맛있었다.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그쪽으로는 센스가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역시 상당히 맛있었다.
“술은?”
“어?”
“그날그날 사 먹는데 지금 냉장고에 있다는 건 오늘 마시려고 사 놓은 거 아니야?”
“……맞아. 근데 됐어.”
“왜.”
“아까 말했잖아. 오늘 올 줄 몰랐다고.”
아무리 봐도 다른 이가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내가 없을 때 마실 예정이었다는 건, 결국 혼자 마시려고 했다는 뜻이었다.
“내가 온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냥 마셔.”
“나 혼자 무슨.”
“나 없었으면 어차피 혼자 마시려고 했던 거잖아. 있으니까 더 잘됐네.”
“잘되긴 뭐가 잘돼.”
술을 놓고 잠깐 실랑이를 했다. 그러다 내가 냉장고에서 녹색 병을 직접 꺼내 들고 오자 권성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잔만 마실 거야.”
“그러든지.”
권성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잔을 받았다.
“따른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표정 좀 펴. 맛없어?”
“너라면 있겠냐?”
갑자기 좁아진 미간이 권성하의 심정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었다. 권성하는 날 두고 저 혼자만 술을 마시는 게 말도 안 된다며 인상을 썼지만, 내가 없을 때 혼자 마시고 있을 걸 상상하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더 마셔. 너 두 병은 거뜬하잖아. 다 마실 때까지 있다 갈게.”
“……오늘은 안 바빠?”
“어.”
“왜 이런 날 안 바쁘냐.”
“빨리 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주말인데 왜 안 바쁘냐고.”
권성하는 잠시 말을 멈추곤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도 없냐, 넌.’
“너 만나러 왔잖아.”
나한테 이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어딨다고.
차마 뱉지 못한 뒷말을 삼켰다.
갑자기 수저를 내려놓은 상대는 술잔을 들었다. 더 마시라는 내 말이 통한 건지 한 잔만 하겠다던 결심을 깨고 한 잔을 더 비웠다.
“그러게 왜 귀한 주말에 날 만나러 와.”
그럼 누굴 만나야 하는데.
지금껏 악착같이 일에만 매달렸다. 주말이든 휴일이든, 달력에 있는 빨간 날이 내겐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회사를 가는 날에도 일했고, 가지 않는 날도 일했으니까.
시간이 없는 것도 이유였으나 일단 누굴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즐겁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좁았던 나의 인맥은 점점 더 줄었고, 그러다 보니 말수도 점점 더 줄어들었다.
내겐 오직 권성하를 보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로 나뉘었다. 참다 참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을 때, 아주 멀리서 한 번쯤 보고 나면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었다.
한 번은 나도 모르게 차에서 내릴 뻔한 적도 있었다. 그날 권성하는 유난히 지쳐 보였고, 유난히 힘들어 보였다. 내가 위로해 줘야 하는데.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그런 뻔뻔한 생각으로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
조금만 더 참아야지. 그렇게 작은누나가 매달린 자동차 사업을 구현해 내는 데 몇 년을 투자했다. 이것만 성공하면 명분이 서겠지.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누굴 만나. 널 보러 올 시간도 모자라는데.
여태까지 내가 사적인 약속에 참석한 건, 일부러 기자를 불러 두고 가졌던 식사 자리 한 번뿐이었다.
‘너랑 약혼은 할 거야. 대신 다른 건 바라지마.’
표면으로만 세워 뒀던 약혼자와는 그때 그 자리를 마지막으로 따로 만나지 않았다. 거짓으로라도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옆에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내 옆에만 다른 누굴 둘 수 있을까. 예전에도, 지금도, 함께 있어 즐거운 건 한 사람뿐인데.
하지만 시간을 내어 줄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걸 설명하기엔, 약혼까지 한 나를 믿어 줄 리가 없었다.
권성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알잖아. 나 친구 없는 거.”
싱겁게 웃으며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소주병이 바닥을 보이고, 찰랑거리던 술잔도 텅 비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게.”
날 따라 다급히 일어선 권성하의 얼굴이 조금 발개져 있었다.
“운전 조심해.”
“어.”
비좁은 현관에 서서 항상 같은 인사를 반복했다. 오늘도 그게 다였다. 잘 가라고 하면 알겠다고 하는 말이 끝. 다음에 대한 약속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