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긴장한 탓에 평소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리던 계단도 숨이 찼다. 강세현은 5층이나 되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힘든 내색도 없이 따라왔다.
단 한 번도 누굴 초대해 본 적 없는 집에 손님이 온 것도 놀라운데 그 첫 손님이 강세현이라니. 한성 사장에게서 아들 대역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어이없고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미국에서 살던 아파트에 비해선 한없이 보잘것없는 곳이었다. 일단 좁았고, 건물 외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깔끔하게 해 놓았다고 해도 연식만큼은 속일 수가 없었다. 내 몇 달치 월세보다도 비싼 스카프를 걸친 사람을 이런 곳에 들이려니 괜히 미안하게 느껴졌다.
“들어와.”
강세현은 별말 없이 들어와 작은 공간을 슥 둘러봤다. 시선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 방석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시카고에서 강세현이 처음 불쑥 찾아왔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보다 나아진 건 방석밖에 없었다.
“뭐 마실 게 있을지 모르겠다. 올 줄 알았으면 뭐라도 사 오는 건데.”
“됐어. 빈손으로 와 놓고 그런 거 바랄 만큼 안 뻔뻔해.”
“싫다는 사람 협박해서 올 만큼은 뻔뻔하고?”
웃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도리어 강세현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더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냉장고를 열어 안을 확인하자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아주머니가 주셨던 홍삼 음료수라도 두는 건데. 이틀 전 잠깐 들르신 주인 할아버지께 드려 버렸다.
“진짜 마실 게 물밖에 없다. ……술이라도 마실래?”
이번에야말로 웃어 주길 바랐으나 이번에도 끝까지 웃지 않았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농담으로 던진 말에 설마 진짜 알겠다고 대답할 줄이야. 더 곤란해졌다.
“너 차 가져왔을 거 아냐.”
“어.”
“그런데 무슨 술이야. 남이 운전하는 차도 안 타는 놈이.”
미국에 있을 때도 강세현은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는 걸 꺼렸다. 가까운 형들이 운전하는 차에 타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로 까다롭게 굴었는데, 내게는 자기 차 운전을 맡길 정도로 물렀다.
골똘히 생각하던 강세현은 다행히 금세 술을 포기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내게 밥을 먹었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하자 반듯했던 이마가 구겨졌다.
“넌 먹었어?”
“당연하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이야.”
“오늘 일이 좀 늦게 끝나서. 집에 도착하면 바로 먹으려고 했어.”
“마실 건 없어도 먹을 건 있나 보지?”
“아니. 시켜 먹으려고.”
강세현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원래는 해 먹어.”
“…….”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런 거야.”
마음이 불편해서 도저히 제대로 마주 보고 앉을 수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비스듬히 자릴 잡았으나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손이 떨렸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빠르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밥부터 먹어.”
“지금 안 먹어도 괜찮아.”
“아홉 신데?”
“상관없어. 너 가면 시킬 거야.”
“그냥 지금 시켜. 나 있으면 못 먹어?”
“어.”
이 좁은 방에서 강세현과 마주 보고 혼자 배달 음식을 먹는다니. 절대 제대로 넘어갈 리 없다.
끝까지 거부하자 강세현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야겠다. 너 밥 먹어야지.”
오자마자 가겠다니.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왜 왔는데.
인상을 구기자 강세현과 눈이 마주쳤다. 초조한 나와는 달리 담담한 눈빛이었다.
여전히 고집 세구나.
결국, 강세현은 지금 밥을 시키는 조건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 시킬 건데.”
“그냥 샌드위치 같은 거 시키려고.”
“빵 말고 다른 거 먹어.”
지난번에도 내가 마시는 거에 그렇게 참견을 하더니 이번엔 먹을 건가.
이것저것 고르다가 그냥 치킨이나 시켜야겠다고 하자 강세현은 정색했다.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없는 거야?”
그거야 네가 없었으면 그랬겠지. 최소한 국이나 반찬을 먹어야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줘 봐.”
나 대신 메뉴를 확인하던 강세현은 도시락을 골랐으나 내가 내켜 하지 않자 또 한참 고민하다가 마지막엔 전복죽을 골랐다.
“넌 안 먹을 거야?”
“먹고 왔다니까.”
“알았어.”
본인이 먹을 것도 아니면서.
주문해 놓고 도시락을 기다리는 동안에 편의점에 다녀왔다. 강세현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밥도 혼자 먹어야 하는데 제대로 마실 거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잠깐 혼자 두더라도 그편이 나았다.
주스와 커피 몇 가지를 사 들고 다시 건물로 돌아갔다.
“제정신입니까.”
5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강세현은 통화 중이었다. 마침 문을 열고 나온 강세현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본 강세현은 들어가라는 눈짓을 한 번 하고 사라졌다.
사 온 것들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슬쩍 창을 내려다보자 강세현은 건물 밖에서 여전히 통화를 하고 있었다. 춥고 다리 아프다고 할 땐 언제고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강세현은 30분쯤 되었을 때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죽이었다.
“먹어.”
내가 먹는 동안 강세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 내가 먹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긴장 때문에 대체 무슨 맛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반의반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그런데도 강세현은 별말 없었다. 다만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는 걸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 볼게.”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내겐 강세현을 붙잡을 자격이 없었다.
아래층까지 배웅하려 했더니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뭔가 더 말하기도 전에 상대는 뒤돌아섰다. 또 보자. 이번에도 미련 없이 등을 보인 강세현은 그렇게 말하고 갔다.
도대체 왜 온 거야.
뒤늦게 우리가 제대로 된 대화라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나는 밥을 먹고, 강세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본 게 다였다.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막상 직접 보고 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밤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 공간에 강세현이 잠깐이라도 머물렀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계속 쉼 없이 두근거려서 잠을 잘 수 없었다.
***
그다음 날, 오전부터 꾸물꾸물 영 좋지 않던 날씨가 오후가 되니 더 심해졌다. 점심시간 이후에는 갑자기 비가 오더니 한 시간쯤 지나 그치고 나서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추웠으면 비 대신 눈이 내렸을 텐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뒤늦게 매서운 추위가 왔다. 예약 걸어 놓고 나온 보일러가 제발 잘 돌아가고 있기를 기도했다.
“내일 회식이랍니다.”
오후 4시에 외근에서 돌아온 과장님께서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말씀하셨다.
“어? 갑자기?”
“연말 되면 왠지 바빠질 것 같다고 사장님이 송년회 미리 당겨서 하자시네요.”
“하긴 작년에도 그렇게 했어. 그치, 성하야?”
“네.”
당장 내일 저녁 걱정을 덜었는데도 쉽게 기뻐할 수 없는 건 일찍 집에 가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반드시 일찍 퇴근하고 남아 있는 건 내일 하려고 했는데, 내일 회식이라는 말에 오늘 야근을 자처했다.
오늘도 역시 8시쯤 퇴근해 버스를 탔다. 동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어제가 생각났다.
강세현을 다시 보면 뭔가 좀 달라질 줄 알았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못 만나서 마음속에 계속 그리움이 쌓인 거라면, 재회하고 나면 그 그리움이 조금은 줄어들 줄 알았다.
전처럼 눈뜨자마자 생각나 눈감을 때까지 보고 싶지는 않겠지.
그런데 그건 그냥 내 착각이고, 바람일 뿐이었다.
그동안은 지금의 강세현을 직접 만날 수 없으니 계속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 왔다. 그래서 내가 그리워한 강세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가까웠다.
그런데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이가 실제로 눈앞에서 움직이는 걸 마주하고 나니 내가 기억하던 과거의 강세현의 모습에 현재의 강세현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지금까지는 7년 전 추억 속의 강세현을 그리워했는데, 이제는 성숙해진 서른 살의 강세현까지 보고 싶어졌다.
만약 강세현이 내가 이럴 걸 알고 일부러 찾아온 거라면 정말 똑똑한 놈이었다. 이만큼 확실한 복수는 없을 테니까.
집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어제 이 시각 그 자리에 강세현이 있었다는 기억만으로 두근거렸다. 이 정도면 병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낫지 않는 병.
괜히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모른 척하고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익숙한 건물이 보일 때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또 늦어.”
익숙한 인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는 왜 또 왔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찾아온 불청객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 봤다.
“밥 먹자.”
그의 손에는 처음 보는 상표가 그려진 종이 가방이 들려있었다.
강세현이 사 온 건 불고기였다. 바싹 구워진 언양 불고기. 깔끔하고 맛있었으나 다 먹지는 못했다. 혼자 먹는 것보단 나았지만, 여전히 마주 보고 먹는 게 편하지 않았다.
남은 음식은 강세현이 전부 먹었다. 그리고 배를 채운 강세현은 오늘도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말로 헤어졌다. 또 보자.
그다음 날, 회식 자리는 괴로웠다. 설마 오늘도 왔을 리 없는데, 혹시나 강세현이 와 있을까 봐. 연락처를 모르니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그리고 그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왜 이제 와.”
강세현은 아홉 시가 훌쩍 넘은 시간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회식이었다고 말하자 내일 아침에 먹으라며 종이 가방을 주고 떠났다. 이번에는 해물찜이었다.
그날 이후 강세현은 종종 연락 없이 불쑥 찾아왔다. 매번 먹을 걸 들고서.
조금 일찍 돌아온 날엔 귀신같이 알고 문을 두드렸다.
“밥 먹자.”
도대체 넌 무슨 생각일까.
기쁜데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심정. 마음이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