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소리가 들리는 쪽은 분명히 칵테일 바였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누군가 혼자 앉아 있었다. 널따랗고 단단한 등을 보자 그게 누군지 단번에 알아채고 말았다.
“응?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강세현이 여기에.
방금 그건 뭐였을까.
나밖에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었다. 간혹 황당할 때 습관처럼 뱉는 한숨이었다.
“그럼 일단 들어갈까요?”
“그럽시다. 얼른 주문해야지. 우리 부장님하고 차장님 드시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오늘은 제가 대접할 테니.”
놀라는 것도 잠시, 그러고 있을 새도 없이 사람들에게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별도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 8인용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실내 예약석은 신발을 벗을 필요는 없지만, 룸 형식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정말 예전 그대로였다.
그 이후엔 평범한 접대가 이어졌다. 빈 술잔이 보이면 열심히 채웠고, 누군가 채워 주는 술잔을 열심히 비웠다. 이렇게 독한 술이 부장의 취향인지 담당자의 취향인지 모르겠으나 신이 난 세 사람은 조금 빠른 페이스로 술을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우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드님도 술을 잘 드시네요.”
“그럼요. 그것도 다 절 닮은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도저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잠시 쉴 타임이 필요했다.
“담배 좀 피우고 오겠습니다.”
“아까 우리 피울 때 같이 다녀오지.”
“그러는 김에 회사에 전화도 좀 하고 오려고요.”
핑계를 댈 수 있는 게 그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갑자기 사장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또 자기를 닮아서 일밖에 모른다느니 너무 열심히 한다느니 헛소리를 하길래 억지로 웃어 주고 나왔다.
맨 처음 눈이 간 곳은 강세현이 앉아 있던 칵테일 바였다. 그새 집에 간 건지, 잠시 어딜 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허무함과 허탈함이 밀려왔다.
다시 못 볼 사람을 한 번 우연히 보게 된 것도 대단한데 두 번은 더 귀한 기회다 보니 아쉬웠나 보다. 이래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지.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별생각 없이. 바로 그게 문제였다. 강세현이 없다는 실망감에 눈이 멀어 그 생각만 하느라 너무 주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 이곳이 내가 일했던 곳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너무 당당히 걸어 나가 버렸다.
“어……? 성하야!”
입구로 나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팔을 붙잡혔다. 몇 년이나 함께 일했던 직원 누나였다.
“……와, 누나.”
나를 보고 무언가 말하려던 누나는 갑자기 인상을 썼다.
“야. 너, 진짜. 와나……. 엄청 열 받는데 이 얼굴 보니까 화를 못 내겠네. 뭐가 좋아 웃냐, 이 자식아.”
“반가워서요. 아직도 일하는구나.”
“그래. 난 여기 뼈 묻을 거라고 그랬잖냐. 그나저나 넌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우선 가서 사장님한테 인사부터 해.”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가기 전에 인사드리려고 했으니까 좀 이따 할게요.”
“지금 타임 손님 다 끝나서 하나도 안 바빠. 여기 있어 봐. 내가 불러올게.”
“아, 그럼 누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요. 피우고 와서 할게요.”
어차피 사장님과 다른 직원들에게는 반드시 인사를 드리려고 했다. 다만, 지금 내 입장이 단순 접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들 행세를 해야 해서 미리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이왕 들켰으니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 방에 있을 때 얼른 인사하고 입막음을 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절대 그냥 가지 말라는 누나에게 몇 번이나 같은 말로 약속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역시 시카고였다.
밤이 되자 기온이 더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도 춥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를 체감했다.
양복 위에 다른 걸 입을 수 없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꽤 두꺼운 옷인데도 역시 한겨울엔 코트만으로 부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껴입을걸. 후회해 봤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담배를 서둘러 피우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서둘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순간 시원한 향이 머릿속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돌았나. 이걸 왜 펴.
오늘만 해도 몇 번째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내가 피우는 담배가 아닌, 다른 담배를 입에 물고서.
충동적으로 사게 된 이 담배는 강세현이 늘 피우던 것이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멘솔이라니.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게 비슷한 게 많았던 우리였지만 담배에서만큼은 취향이 확연히 갈렸다.
싫을 걸 알고도 일부러 이걸 산 이유는 헛된 바람 때문이었다. 혹시나 이걸 피우면, 강세현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지 않을까 해서. 비행기에서 맡았던 옅은 그 향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그 재회로 그리움만 커지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같은 담배를 피운다 한들 내게서 강세현의 향이 날 리 없었다. 그저 예상했던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인 채 맛없는 담배를 피웠다.
아깐 밥 먹으러 왔던 걸까.
누구랑 왔을까.
몹쓸 욕심이 또 궁금해해서는 안 될 걸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강세현을 생각하고 있는데.
“뭐 하는 거야?”
투둑, 물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못 들었다고 하기엔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내가 아는 사람 중 나보다 큰 사람은 몇 안 되는데, 그중에서도 이렇게 생긴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뭐 하는 건데.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강세현은 내 어깨를 무언가로 덮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본인이 입고 있던 두툼한 패딩이었다.
대체 뭐 하는 거냐고 물은 사람은 나 아닌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따져 묻지도 못하고 나도 모르게 툭 대답을 뱉었다.
“담배, 피우는데.”
강세현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니. 안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식당 입구를 한 번 쳐다봤다. 역시 아까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맞구나. 나는 접대 중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전혀 예상 못 한 질문이 날아왔다.
“아버지랑?”
경사 없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멈춰 선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리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분명 지금 타이밍에 떨어트렸을지도 모르겠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거짓이라는 걸 눈치채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묻는 건지. 예전이었다면 전자라고 확신했을 테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강세현이 여전히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장담하긴 어려웠다.
“왜 그런 걸 엿듣고 그러냐.”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길래 들으라고 그러는 줄 알았지.”
“…….”
“아버지가 목소리가 상당히 크시더라. 웃음소리는 더 크고.”
“…….”
“인상 좋은 건 닮았는데, 그건 안 닮았나 봐.”
알고 이러는 건가.
일단 그런 거 다 제쳐 두고 머릿속에 물음표 수십 개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내가 누구랑 뭘 하든, 아버지를 닮았든 안 닮았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행기에서는 그렇게 모른 척을 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을 건다고?
달칵-.
지포 라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강세현은 몇 모금을 피운 담배를 대뜸 내게 내밀었다.
이걸 어쩌라는 거지.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이번엔 불쑥 입으로 다가왔다. 허락도 없이, 무척 뜬금없었다.
물려 준 담배를 몇 모금 피우고 나자 정신이 좀 들었다. 그래도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돼 얼떨떨해하고 있었는데, 강세현은 이런 내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한테 인사드렸어?”
“아니. 이거 피우고 가서 드리려고.”
“흠…….”
본인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해 줬으면 그에 대한 반응을 해 줘야 하는데, 강세현은 그냥 나를 힐끗 쳐다보는 게 끝이었다.
진짜 왜 이러는데.
말을 걸어 줘서 반가워야 할 타이밍에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내 것 피웠으니까 네 걸로 한 대 더 피우고 들어가.”
한참 만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짧아지는 담배를 보며 아쉬워하던 중 깜짝 놀랐다. 혹시 내 마음을 들켰나 해서.
획, 고개를 돌리자 강세현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는 왜 왔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고 꺼낸 말이었다.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조금이라도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빨리 뛰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혹시 너 있을까 해서.”
심장이 다시 난리가 났다.
7년이나 지났는데 왜 이놈의 심장은 아직도 제대로 작동을 안 할까.
그리고 이 미친놈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애인도 친구도 아닌, 이제는 ‘전’ 애인이 되어 버린 내게.
다른 사람이 했으면 농담일 수 있는 말도 강세현이 하면 그 무게가 달랐다. 강세현이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라면,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하는 놈이 아니었다.
“……있어서 만족하냐?”
“어.”
이런 내 속도 모르고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뚝뚝한 대답 그 한 마디는 또 뭐가 그렇게 좋은지 미칠 것 같았다. 그동안 좀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던 내 학습 능력은 여전히 바닥이었다.
“만족은 해. 설마 혹을 달고 올 줄은 몰랐지만.”
그 혹한테 다른 혹도 있다는 걸 알면 아마 놀랄 거다.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얘길 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피우던 담배를 끄고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분명 이름도 겉모습도 완전히 똑같은 담밴데 조금 전 강세현이 준 것보다 배는 맛이 없었다.
“강세현.”
“왜.”
묻고 싶었다. 왜 온 거냐고. 왜 내가 있었으면 했냐고. 혹시 너도 내가 궁금했었냐고.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질문을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그게 왜 중요해. 궁금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는데.
결국, 난 또 포기했다. 또 모른 척.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다.”
그렇게 말하자 강세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괜히 목이 말랐다.
“넌 여전하네.”
“뭐가?”
“안 물어보는 거.”
“…….”
“궁금한 척 안 하는 것도.”
추궁하는 듯한 말투였다. 예전과 똑같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과거에도 강세현은 이런 말투로 얘기했었다.
나한테 차일까 봐 전전긍긍하며 서운하다고 말했던 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