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75화 (75/96)

#75

출국을 하루 앞둔 일요일, 오랜만에 외출다운 외출을 하게 되었다.

회사 가는 걸 제외하곤 늘 동네 반경에서만 머물던 내 동선이 광역 버스를 타야 하는 먼 서울까지 닿았다. 압구정에 있는 백화점에 가기 위해서였다.

어제 한성 박 대리가 상품권을 주고 갔다. 이왕이면 근처 백화점 상품권이었으면 좋았을 걸, 하필이면 가장 가까운 지점이 서울에 있는 백화점 상품권이었다.

그냥 뒀다가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왠지 새 정장을 사 입으라는 용도가 뻔히 보이는 터라 어쩔 수 없이 백화점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지루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일자로 뻗은 도로와 그저 교차하는 차들뿐이었고,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딘가에 있을 강세현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단지 그 생각 때문에.

일부러 서울로 이사 가지 않은 이유는, 집값이 비싼 것도 있지만 어떻게든 서울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려 했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

강세현을 다시 만나는 상상.

무슨 말을 할까. 이렇게 말해야지. 혼자서 밤새 머리로 연습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게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깨닫곤 그때부턴 멀어지려 애를 썼다. 나도 모르게 품게 되는 헛된 희망을 완전히 버리기 위해.

버스가 서울로 들어서 꽉 막힌 도로로 진입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속에 점점 많은 사람이 들이차고 버스가 완전히 도심으로 들어섰다. 빽빽이 들어선 건물들 사이로 커다란 옥외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아, 저건 잘 어울리겠다.

깔끔하게 생긴 시계 광고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또 강세현이었다.

젠장.

이래서 더더욱 외출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걸 보고 많은 걸 듣고, 또 많은 걸 경험할수록 이상하게 더 떠올랐으니까.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야 할 것만 사고 나서 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당장 내일이 출국인데 여전히 미국에 간다는 사실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장이 준 상품권으로 새 옷을 사 입고 나니 정말 내가 터무니없는 사기극을 하러 시카고로 간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일이구나.

가슴 한편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돌아온 게 불과 1년 전인데 꼭 아주 오래전에 가 본 것처럼 느껴졌다. 정작 오래전 있었던 추억은 바로 어제 일어났던 것처럼 생생한데.

작년 여름, 다시 돌아간 캠퍼스는 낯설면서도 그리웠다. 기현 형이나 다른 형들 생각이 많이 났다. 한번 만나자고 해 볼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몇 년간 제멋대로 연락을 끊어 놓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할 정도로 염치없진 않았다.

그날 이후 내 주위에 남은 사람은 소라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남긴 지인이 소라밖에 없었다. 강세현과 엮여 있는 형들과는 미국 핸드폰 번호를 파기하면서 자연스레 연락을 끊었다. 형들에겐 미안했지만, 그땐 정말 어떻게라도 강세현의 흔적과 멀어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 건 강세현을 지우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으니까.

사라지진 않아도 옅어질 줄 알았던 기억은 잊으려 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

월요일 아침 공항은 흡사 보따리 장수로 가득한 시장통 같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과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성 사장과는 7시에 만나기로 했으나 처음부터 제시간에 올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딱 한 번 만난 사람이라도 이미 그를 향한 내 신뢰도는 바닥이었다.

사람 적은 비즈니스석 카운터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금 늦어도 비행기를 놓치진 않겠다고.

“어이야.”

그런데 놀랍게도 사장은 제시간, 아니,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어머? 이 친구야? 자기 말보다 백배는 더 괜찮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혹을 하나 달고 나타났다.

“어, 인사해. 여기는 내 와이프.”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부인이라는 사람은 사장보다 최소 스무 살은 어려 보였다. 아무리 봐도 40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서른 살이나 된 아들을 둔 사람이라고 보기엔 심하게 무리가 있었다.

같이 오는 건 상관없지만 미리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리 같은 회사 직원이 아니라 해도 여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이 좀 황당했다.

“아, 같이 가고 싶다고 하도 성화를 부려서.”

“젊은 사람이랑 같이 간다길래 내가 좀 욕심내 봤어요. 방해는 안 할게요.”

이미 온 것부터가 방해인데 상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뒤늦게 떠올랐다. 사장에게 두 번의 이혼 경험과 재혼 경험이 있다는 것을.

“어, 그리고 그, 항공권 봤나?”

“네.”

“내가 특별히 프레스티지로 끊어 주랬어. 오래 가느라 힘들 텐데 그런 거라도 있어야지.”

항공권을 확인했냐는 물음에 일정을 물어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저 본인이 더 비싼 항공권을 끊어 준 것에 대한 내 생각을 물어보는 거였다. 굳이 이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이유는 내가 아닌 잘 보이고 싶은 상대 앞에서 생색을 내기 위해서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일부러 부인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럴 땐 조금 더 과장된 표현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몇 년 동안 일해도 이것만큼은 잘 고쳐지질 않았다. 거짓으로 기쁜 표정을 짓는다거나 억지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건 여전히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옷도 감사합니다.”

너무 담백한 인사에 조금 불만족하던 사장은 내가 한 마디를 더 붙이자 갑자기 소리 내서 웃었다. 슬쩍 곁눈질로 부인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음, 어쩐지 오늘 좀 귀티가 난다 했더니. 역시 사람도 포장지가 참 중요해. 그렇지?”

진짜 명품을 입어도 가짜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 그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체크인 절차를 밟고 안으로 들어간 후에는 면세점 쇼핑에 시간 대부분을 할애했다. 면세점 쇼핑을 원하는 부인 때문에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건 조금 귀찮았지만 그래도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만약 사장과 단둘이었다면, 라운지에서 억지로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내가 방해꾼이 된 것 같아서 지도 역할을 해 줄 때를 빼고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면세점 쇼핑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중간에 잠깐 커피를 산 것 빼고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돌아다녔더니 나중에는 발바닥이 아팠다.

일단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 후였다.

“배가 좀 고픈데.”

“그러게.”

탑승 시간까지 채 30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식당에 가는 것까지는 무리라서 카페에서 샌드위치 같은 걸 먹자고 권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인상이 동시에 구겨졌다.

“가면 어차피 내내 빵 먹어야 할 텐데 여기서도 빵을 먹으라고?”

“아니면 간단한 롤이나 초밥 도시락을 파는 곳도 있어요.”

“에이, 날도 추운데 좀 따뜻한 걸 먹어야지.”

결론은 꼭 한식을 먹어야겠다는 말이었다.

“곧 탑승 시작하는데 시간이 좀 빠듯할 것 같아서요. 들어가서 이륙하면 얼마 안 있다가 바로 밥 줄 거고요.”

“어차피 우리 짐 부쳤잖아. 그러니까 우리 안 타면 비행기 못 떠. 좀 기다리라고 하지 뭐.”

귀를 의심할 정도로 어이없는 소리였다. 테러 가능성 때문에 사람이 탑승하지 않으면 수화물만 싣고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이용해서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다니.

두 사람은 나의 만류에도 푸드 코트에서 김치찌개와 백반 정식을 먹었다. 제발 가만히 먹는 데 집중이라도 하지 먹을 때도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며 늑장을 부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쯤 방송이 나왔다. 당장 게이트 앞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출발도 전에 집에 가고 싶었다.

결국, 탑승 마감 직전에 겨우 도착했다. 새파래진 직원들 얼굴을 보고도 일등석이라며 당당히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럼 좀 있다 보자구.”

“네.”

일등석과 프레스티지 푯말이 적힌 곳에서 드디어 헤어질 수 있었다. 그나마 반나절이라도 그들과 떨어진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었다.

이미 일반석과 연결된 통로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예상했지만, 전 좌석이 만석이라서 프레스티지 칸도 다 차 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전부 짐을 올려 놓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쪽에서는 승무원이 뜨거운 물수건을 나누어 주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무장이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내가 들어서자마자 다가온 승무원은 다급히 내 티켓을 확인한 후 자리로 안내했다. 조금 전 여파로 정신이 없어 자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승무원의 안내를 따르기만 했다.

“아, 잠시만요.”

앞서가던 승무원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조금 전 보았던 사무장이 바로 앞에 있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알려 주십시오. 좌석이 조금 불편하실 텐데, 하필이면 일등석까지 만석이라서…….”

아무래도 내 자리는 사무장이 이렇게 따로 인사할 만큼 신경 쓰는 주인공의 옆자리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쪽에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이 항공을 애용하는 고객 중 한 명이겠지. 그런 생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딱 한 발자국 남았을 때,

“괜찮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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