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73화 (73/96)

#73

퇴근 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올라타면서부터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학교 기숙사로 가는 버스 안. 전처럼 학생 카드를 내밀 이유도 없고, 세 정거장만 지나면 내려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때와 같은 거라곤 네 바퀴로 굴러가는 버스라는 사실 뿐인데 오르는 순간부터 추억에 잠겼다.

그러다가 내려야 할 곳이 나오면 습관처럼 몸이 움직였다. 오늘은 일부러 사는 곳에서 다섯 정거장 빨리 내렸다.

나만의 운동법이었다. 게으른 탓에 따로 운동을 다니지도 못해 날이 괜찮은 날엔 이렇게 일부러 집까지 걸어갔다. 최근엔 계속 날이 추워 못 했었는데 오늘은 그나마 기온이 조금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고작 10분 만에 후회했다. 역시 초라곤 해도 12월에 밖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 건 무리인 듯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뽀얀 입김이 공중에 흩어졌다.

중간쯤 갔을 때 하늘에서 하얀 알갱이가 떨어졌다. 눈이었다. 올해 벌써 세 번이나 왔으니 비록 첫눈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맞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싫었던 눈도 이렇게 보니 새삼 반가웠다.

너도 지금쯤 이걸 보고 있을까.

조금씩 내리던 눈은 이내 거짓말처럼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총각 꼴이 왜 그래.”

겨우 집 근처에 도착해 마트에 들렀다. 몰랐었는데 눈 때문에 코트가 꽤 젖었는지 나를 안쓰럽게 보시던 아주머니가 계산대 아래 숨겨 둔 홍삼 음료수 한 병을 손에 쥐여 주셨다. 별일 아닌데 하필이면 소주를 사는 바람에 더 이상해졌다.

“이거 챙겨 먹고, 술 먹을 땐 꼭 빈속에 먹지 마.”

“감사합니다.”

소주 두 병과 달걀 한 팩, 그리고 홍삼 음료수 한 병을 들고 3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건물 맨 꼭대기 층이 내가 사는 곳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1년 후, 나는 미뤄 두었던 군대에 갔다. 생각보다 빨리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새아버지가 출소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 조만간 나온다더라.’

‘그럼 만나러 가야겠네.’

‘…….’

‘어차피 싫어서 헤어진 것도 아니었잖아.’

내겐 죽을 만큼 싫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엄마를 위해 살 사람이란 건 인정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힘들 때 스스럼없이 먼저 이혼을 하자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기가 빠른 사람이었다. 비록 잘못된 선택으로 한순간에 내려앉았지만, 출소 후엔 지인과 함께 택배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 전처럼 많은 걸 누리진 못해도 적어도 당장 먹고살 걱정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맘 놓고 엄마를 두고 군대에 갈 수 있었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곧바로 집을 나왔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나였다.

‘다 컸는데 같이 살기 불편해.’

물론 엄마는 반대했다. 하지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새아버지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방 하나 구할 보증금은 될 거다.’

통장에는 2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당연히 받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어 들리는 말이 너무나 단호했다.

‘갚을 필요는 없다.’

그 말이 꼭 받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우스웠다. 언제는 갚으라더니 이제는 갚을 필요 없다니.

손에 쥔 부와 명성이 사라지자 새아버지의 옆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자식조차도. 의붓형은 그날 이후로 여태까지 연락이 없었다. 그 사람을 다시 찾은 건 나와 엄마뿐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바란 적도 없다. 여전히 그 사람은 내가 싫을 것이고, 나 역시 그 사람이 싫다. 어쩌면 보기 불편하니까 나가라는 의미로 쥐여 준 돈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100원도 빚이라고 말하던 사람이 갚을 필요 없다 하며 주는 돈은 특별했다.

결국, 난 또 돈 앞에서 그 사람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는 집은 그때 그 돈으로 보증금을 내고 맨 꼭대기 층이라는 이유로 월세 5만 원을 깎아서 구한 곳이었다. 지어진 지 오래된 곳이라서 어쩔 수 없이 외풍은 좀 들어오지만 주인이 직접 수리한 내부도 꽤 괜찮고, 위치도 좋은 곳이었다.

달칵-.

아침에 보일러를 틀어 놓고 나갔는데도 집안이 썰렁했다. 그래서일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잊고 있던 피로가 밀려왔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와 혼자 작은 상을 폈다. 저녁을 먹으려고 보니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아까 뭔가 더 살 걸 그랬나.

어쩔 수 없이 오늘 저녁은 달걀 두 개를 넣은 라면이었다.

아까 사 온 녹색 병 하나를 꺼내 왔다. 좀 궁상맞다는 걸 알면서도 간혹 조용히 마시고 싶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맥주도 마셔 봤는데 아무리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아 나중엔 소주로 바꾸었다.

아. 또 생각났다.

씁쓰름한 술이 목으로 넘어가자 또다시 생각났다. 처음 같이 술 마시던 기억.

역시 처음은 소주가 아니냐는 내 말에 독할 거라며 비웃던 강세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지막한 그 목소리도. 여전히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기억 때문인 줄 알았다. 버스를 탔기 때문에, 눈이 왔기 때문에, 술을 마셨기 때문에 생각나는 줄 알았다. 추억이 너무 많아서, 과거와 관련된 것들을 보면 생각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버스를 타지 않아도, 눈이 오지 않아도, 술을 마시지 않아도 생각났다. 길을 걷다가도, 계단을 오르다가도, 심지어 설거지를 하다가도 떠올랐다.

티브이 광고에서 나오는 작은 허밍 소리, 달력에 적힌 관련 없는 숫자 하나, 책을 보다 눈에 띈 글자 하나까지도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로 아무 이유 없이.

매일 이런 하루의 반복이었다.

눈떠서 잠드는 순간까지 그저 강세현만 생각하는 하루.

어제도, 오늘도, 나의 하루는 매일 똑같았다.

* * *

밤새 계속 눈이 내렸는지 아침엔 제법 쌓여 있었다. 시카고에 있었던 때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이유는 그때처럼 직접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30분 일찍 집을 나서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탔다.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다행이었다. 숨 막힐 정도로 사람이 가득한 출근길 지하철과 만원 버스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강세현의 집안이 대단하다는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곳곳에서 광고를 발견할 때마다 새삼 다시 느끼곤 했다. 티브이에서는 수시로 광고가 나오고 매일 가는 버스 정류장에도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심지어 4년 전부터는 자동차 사업까지 진출하는 바람에, 지나갈 때마다 현세 자동차가 한두 대씩 보이더니 지금은 회사 주차장에만 열 대가 넘게 서 있었다.

오늘은 일부러 요리조리 잘 피했는데도 지하철 엘리베이터에서 현세기업 마크를 발견했다.

이 정도면 좀 억울했다. 상대는 날 잊어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테니까.

이것이 내가 널 차 버린 벌인 걸까.

오늘도 내 머릿속엔 온통 강세현이었다.

“어! 성하야. 마침 잘 왔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원래 출근이 빠른 데다 오늘은 30분이나 일찍 출발해서 당연히 1등일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지각 대장 사장님이 나보다 미리 나와 계셨다.

“무슨 일 있어요?”

“한성 사장님 곧 출발하신다네. 나도 좀 전에 전화 받고 바로 왔어.”

“연락하시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너 일찍 올 것 같아서.”

우리 회사에 오는 주목적은 불분명하지만 어떤 이유로 오건 중요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사무실 공장동 할 것 없이 출근 직후부터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금방 오겠다는 사장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고, 다시 전화를 걸자 곧 도착한다고만 말했다. 그리고 또 30분, 한 시간이 지나 연락하자 같은 말을 반복했다. 금방 도착할 거라고.

결국, 출근 전부터 모두를 귀찮게 했던 주인공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등장했다.

“여- 김 사장.”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한성 사장은 아주 뻔뻔하게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왜 사장들은 다 저렇게 생겼을까.

신기하게도, 우리 회사 사장님을 빼곤 지금까지 봤던 거래처 사장들 얼굴은 하나같이 다 비슷하게 생겼다. 반은 사기꾼처럼. 내 인상은 어딜 가나 착하단 소릴 들으니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사장되기 힘들 것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사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사장님이 먼저 90도로 허리를 숙이자 뒤에 있던 직원들도 자연스레 허리가 굽었다. 한성 사장은 그 모습을 보곤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장부터 둘러보시겠습니까?”

“아니, 그건 밥 먹고 하고…….”

공장 견학을 마치 식사 후 산책과 같은 투로 말한 사장은 슬쩍 우리가 서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단번에 나를 찾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럼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역시 눈치채신 사장님이 한성 사장을 접견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5분쯤 지났을까, 사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성하야. 잠깐 보자.”

“네.”

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저러지.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사장님, 이 친굽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따가운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왔다. 마치 상품을 세워 두고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꼼꼼한 눈빛이었다.

“음. 김 사장 말대로 인상은 참 좋네.”

분명 칭찬인데도 기분이 좋질 않았다. 인상은 좋다는 말이 꼭 인상 빼고는 다 별로라는 것 같아서. 그쪽은 인상도 안 좋아요. 차마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말을 꾹꾹 눌렀다.

“여기 잠깐 앉아 봐.”

게다가 처음 본 내게 반말하는 것까지. 생긴 것부터 하는 짓까지 모든 사장은 왜 이런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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