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13. 작별
[와, 드디어. 나는 오늘로 끝이야. 너는?]
[난 내일 하나 더 남았지.]
[음, 이안. 너는 어때? ……이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현재로 복귀한 정신이 여전히 현실 구분을 하지 못한 채 허공을 날아다녔다.
[아. 뭐라고 했지?]
[나는 오늘 이 시험이 끝이고, 데이비드는 내일 하나 더 남았대. 너는?]
[나도 오늘까지야.]
[와우. 둘은 좋겠다.]
남은 수업은 논문 제출만 남았고, 오늘 시험 두 개만 치면 끝이었다. 평소라면 좋았을 일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지금 내게 시험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무척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성하야.’
어젯밤,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불안함이 엄습했다.
‘무슨 일 있어?’
‘…….’
‘엄마.’
수화기 너머로 울음을 참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어, 그래.’
차분해 보이려 억지로 애쓰는 목소리가 안타까웠다.
‘……아버지한테 일이 좀, ……생겼어.’
아버지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사고 같은 걸 떠올렸다. 혹시 교통사고라도 난 건 아닌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단지, 엄마가 의지하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 같은 건 없었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내 친아버지가 열차 사고로 돌아가신 후 엄마는 나를 기찻길 옆으로도 가지 못하게 할 만큼 트라우마가 크게 남아 있었다.
‘회사가 없어질 수도 있다더구나.’
그 소리를 듣자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맨 먼저 든 생각은 사고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괘씸한 부자를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거라던 소라의 말이었다.
‘어떡하니.’
자세한 걸 물어도 엄마는 전혀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해 일단 침착하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괜찮을 거라는, 진심도 없는 말만 여러 차례 했다.
사정을 알기는 너무나 쉬웠다. 전화를 끊자마자 인터넷에 회사 이름을 검색했다. 당연하게도, 이미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작년부터 추진해 오던 확장 사업이 얼마 전까지도 잘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허술함투성이였다. 무리하게 투자해 갑작스레 눈덩이처럼 커져 버린 손해를 메우기에만 급급했던 모양이었다. 자세한 건 여전히 조사 중이라는 말이 마지막 줄에 적혀 있었다.
기사만 본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회사가 망한 줄 알겠지만, 실제로는 꽤 오래전부터 사정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조만간 미국으로 출장 올 거라고 했나 봐. 뭐, 큰 건 하나 성공시킬 것 같다면서 완전 신났다던데? 그 오빠더러 한국에 나오기만 하면 본인이 취업시켜 준다고 큰소리 떵떵 쳤대.’
의붓형이 말했던 미국 출장이나 남의 취업 걱정은 과연 진실을 알고 한 거짓말이었을까, 혹은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무래도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그 사람이라면 제 자식에게도 자존심을 세웠을 것 같으니. 아니지, 그때까지도 수백억 원의 적자를 흑자로 돌릴 수 있다고 믿고 있었을지도.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땐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믿기 힘들어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시험이 끝났다.
카페에 들러 노트북으로 논문을 보낸 뒤엔 그곳에서 멍하니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핸드폰 액정엔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나 와 있었다.
강세현: [시험 끝났어?]
강세현: [끝나면 연락해]
짧게 답장을 보냈다.
나: [끝났어]
오늘 아침에 주고받은 메시지가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확인하자 소름 돋을 정도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언제 올 거냐는 강세현의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아, 우리 만나기로 했었지. 당연한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 [바로 집으로 가려고]
강세현: [왜]
나: [너무 피곤해서]
잠시 후, 강세현에게 전화가 왔다.
- 시험 잘 봤어?
“어, 뭐……. 그냥.”
- 망쳤어?
“좀, 그런 거 같네.”
- 그럴 거면 어제 왜 못 오게 했는데.
“그러게.”
집중하려고 일부러 혼자 있었는데. 학기 내내 어려웠던 수업이지만 어떻게든 반드시 A를 받아 보겠다고 꾀를 부렸는데, 결과는 이러나저러나 망한 것 같았다.
- 진짜 망쳤어?
- 목소리가 많이 별론데.
이럴 때는 귀신같이 알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는데도 소용없었다.
“잠을 많이 못 자서 피곤한 것도 있어.”
- 알았어. 그럼 오늘은 쉬어.
어제도 못 봤으니 당연히 오피스텔로 와서 쉬라는 소리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 내일 다 끝나면 내가 갈게. 어차피 그다음 날 거기서 공항 바로 가면 되잖아.
“알았어.”
- 딴짓하지 말고 바로 좀 자. 내일 아침까지 연락 안 할게.
감사했다. 강세현을 만나지 않아도 돼서. 어젯밤 혼자 있었던 것에 감사했고, 오늘도 혼자 있을 수 있어 감사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아주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
모든 걸 끝내고 집에 왔는데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점심도 먹지 못했는데 뭔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어제도 거의 밤을 새운 거나 마찬가지라 잠이라도 자면 좋으련만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천천히 다음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정확히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계속 미국에 남아 있는 게 맞는지, 혹은 바로 한국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금전적인 이유로 학비 지원이 당장 불가능할 경우엔 휴학계를 내고 일단 한국에 들어가야 하므로 휴학 신청서를 미리 다운받아 놓았다.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재학생은 방문 접수밖에 안 된다는 소리를 예전에 들은 것 같아서 다시 한번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휴학, 안 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강세현과 같이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늘 위기에 강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니 괜찮을 거라고. 그래도 나름 큰 기업이라서 법인으로 나간 대출은 법인이 책임질 테니 대표 이사인 새아버지가 책임지는 부분은 아주 심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법인 파산을 하더라도 모든 대표이사가 처벌을 받진 않을 테니까.
내가 생각해도 모순이었다. 그 사람이 죽도록 싫은데, 잘됐으면 했다. 그 이유가 오직 돈 때문이라니.
곧 나 스스로가 싫어졌다.
나밖에 생각하지 않은 벌일까. 다음 날 새벽,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본인이 직접 연락하진 않았다.
이럴 때까지도 당당히 비서를 시키는 이유가 단순히 내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창피해서 그런 건지 잠깐 생각해 봤는데 그래도 역시 답은 전자 쪽이었다. 그 사람이 내게 조금이라도 부끄러워 할 리 없으니까.
“바로 가야 하나요?”
- 네. 내일이라도 바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언제까지 휴학할지 모르는데 지금 사는 곳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요.”
- 음. 그러네요.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파트 계약은 위약금만 물면 바로 해지될 텐데 나머지 가구가 좀 문제라서…… 그냥 둘 순 없으니까요. 주변 사람들에게 맡기거나 팔아야 할 것 같아요.”
- 그럼 최대한 빨리 정리해 주십시오. 당장 들어오라고 하셨으니 아마 늦어질수록 화를 내실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 그리고 회장님께서는 지금 통화가 힘드시니 전할 말이 있으면 저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비서는 마치 한 번이라도 내가 그 사람과 직접 통화한 적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지금껏 그 사람을 대신해서 연락망이 되어 준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야 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말해 주지 않는 이상 그걸 어떻게 알아. 회사 내부 사람도 몰랐을 텐데.”
- 한 석 달 전부터 좀 이상했어. 집에 오는 시간도 늦어지고, 술 취해서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하고. 회사가 안 좋아져서 본인도 힘들었겠지.
“……괜찮을 거야.”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걸까. 엄마가 아닌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 성하야.
- 엄마가 어떻게든 너 졸업은 시켜 줄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알았지?
“그런 걱정 안 해.”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잠들기 전까지 내 걱정만 해 놓고.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웠다.
역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내 예상대로 계속 쌓여온 행복은 한꺼번에 불행을 불러왔다. 터무니없을 만큼 말이 안 되는 일이 나한테는 일어날 수 있다는 걸 각오했는데도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에 나는 그 어떤 마음의 대비도 하지 못했다.
이럴 땐 어김없이 한 사람이 생각났다.
그래서 빨리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당장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