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68화 (68/96)

#68

“이야기라고 할 것도 없어. 그렇게 오랫동안 말 안 했어. 방금 말했잖아. 친구냐고 묻고, 사과한 게 다라고.”

“그래. 좋아. 근데 내가 도착한 후엔 대체 뭔데.”

“뭐가?”

“말렸잖아. 문까지 못 열게 하면서.”

“그러면 그냥 둬? 우리끼리 들어가 버리고?”

“안 될 이유 없지.”

강세현은 이해가 안 될지 몰라도 나는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가 애인의 전 여자친구라고 해서 꼭 냉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지금 내가 애인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도 없는 입장이었기에 그렇게 하기가 더 쉽지 않았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본인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지금 강세현이 나를 탓하는 게 짜증 났다.

“내가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집으로 들이라거나 바래다주라고 한 건 아니잖아.”

“그건 당연한 거고. 만약 그랬으면 내가 가만히 안 있었겠지.”

“솔직히 무시하는 건 좀 너무하잖아. 그렇게 들어가 버리면 남은 사람은 뭐가 돼.”

“누가 너한테 그런 거 신경 쓰래.”

상대는 내가 하는 말을 쉴 새 없이 받아쳤다. 그럴수록 스멀스멀 화가 올라왔다.

평상시라면 말을 꼭 그렇게밖에 말 못 하냐, 하고 농담처럼 넘어갈 일이었다. 말투는 좀 삐딱하지만, 강세현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나를 너무 생각하기 때문인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 정도 잔소리는 들을 거라고 예상을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다 알고도 이상하게 화가 났다.

“넌-”

넌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서 잘도 만난다. 아주 못된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동안 꽁꽁 숨겨 왔던 추악한 본성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다음번에 만나는 사람은 너랑 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너를 닮은 사람을 만나라고 했는데, 내가 이러면 너까지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다행히도 생각으로만 그칠 수 있었다.

“…….”

“…….”

“……그만할래. 오늘은 가야겠다.”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저런 말을 생각해 낸 것도 놀라운데 이대로 계속 대화를 이어 가다간 더한 말을 쏟아 낼 것 같았다.

절대, 이딴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걸터앉았던 소파 모서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그사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핫도그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탁.

“어딜 가.”

한껏 누그러진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붙잡힌 팔이 어찌나 아픈지 자동으로 인상이 쓰였다. 우뚝, 내가 걸음을 멈추자 팔의 악력을 조금 풀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집에 갈 거야.”

이번에도 왜냐고 물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나를 보던 강세현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지 마.”

누굴 미치게 하려고.

가까이에서 중얼거린 말은 또렷하게 귀에 꽂혔다.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났다.

“야, 강세현.”

“……어.”

“좀 전에 온 사람, 네 전 여자친구 아니냐?”

이미 둘 다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으니 의아한 눈빛이 들러붙었다. 강세현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얼굴을 찡그렸다.

“근데 왜 네가 미쳐. 미칠 사람은 나지.”

불안해할 사람도 나고, 기분 나빠야 할 사람도 난데.

억지로 팔을 떼어 내고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갔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감정이 꽉 막힌 고속도로에 올라서자마자 터져 버렸다. 욱하고, 성질이 났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겨우 이런 거로 오늘 하루를 망친 게 실망스러워서였다. 고작, 이런 일 때문에.

그렇게 나와 놓고 대체 무슨 심보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대화를 멈춘 사람도, 자리를 피한 사람도 나면서 왜 내가 화가 나는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싸우기 싫어 나온 건데 오히려 제대로 싸우고 온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뒤늦게 라디오를 켰다. 벌써 몇 주째 계속 나오는 지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맨날 똑같은 걸 틀어 줄 거면 디제이는 없는 편이 낫지 않겠냐던 이가 떠올랐다. 그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강세현은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미친놈이 된 것 같았다.

왜 또 생각나는데.

애꿎은 라디오를 탓하다가 라디오를 꺼도 생각나기에 결국엔 좀 전의 나를 원망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보고 싶을 걸 왜 그랬던 거냐.

가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밥시간이 지났는데 배도 고프지 않았고, 그렇다고 목이 마른 것도 아닌데 자꾸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한겨울에 찬 음료를 시켜 마셨다. 하지만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혹시 담배 때문인가 싶어 피워 봤지만, 그것도 역시 아니었다.

아주 나중에서야 갈급증의 원인을 알아냈다.

강세현이었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손길, 익숙한 품이 그리웠다. 아니, 필요했다.

내게 부족한 건 강세현이었다.

* * *

“왜 이렇게 늦어.”

“…….”

이게, 무슨.

반쯤 남은 커피를 들고 계단을 올라 복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ㄱ자로 꺾이는 코너를 돌자마자 커다란 그림자가 문 앞에 드리워 있었다.

걸음을 멈춘 채 그대로 굳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가 한참 동안 바라보았지만, 불쑥 찾아온 불청객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놀람이 먼저였고, 그다음엔 반가움이었다. 하지만 불과 두 시간 전 일어난 일 때문에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정반대였다.

오늘 진짜 왜 이러냐.

가는 곳마다 예상 못한 손님이 찾아오는 신기한 날이었다.

뭐가 이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굳어 있는 날 대신해 상대가 먼저 내게로 다가왔다.

“이 추운 날 왜 이걸 마셔.”

손안에 있던 얼음 컵이 사라졌다.

“장갑은 어쩌고.”

“…….”

“사 준 건 어디다 버렸어.”

제멋대로 나타난 커피 도둑은 팔과 가슴 사이에 컵을 끼운 채 양손으로 내 손을 덮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건 똑같은데 상대의 손은 따듯했다.

델 듯한 온기에 얼었던 정신이 돌아오자 상대에게 밴 체향이 훅, 가깝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와. 나는 어쩜 이렇게 학습 능력이 없지.

이 정도면 내 아이큐를 다시 측정해 봐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어딜 가냐고 물었을 때 집에 간다고 말해 주기까지 했으면서 왜 예상 못했을까.

도망가면 바로 따라올 게 뻔한데.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조금 전까지 했던 모든 우울한 생각들은 그저 웃긴 일에 지나지 않았다. 민망할 정도로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강세현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마치 예전에 나를 처음 껴안았을 때처럼. 선명한 눈동자 너머 감춰진 뜻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낮게 깔린 목소리가 담담했다.

“여기서 상상을 해 봤어.”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문제의 답을 찾는 사람처럼 강세현을 쳐다봤다.

“만약 네 전 애인이란 새끼랑 여기서 마주치면 어떨까.”

왜 들어가지도 않고 여기 서 있는 건지, 맨 처음 품었던 의문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있지도 않은 내 전 애인을 새끼라고 칭하는 강세현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어땠는데.”

“…….”

먼저 말을 꺼낸 녀석이 어땠냐는 내 물음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욕만큼은 하지 않던 강세현 입에서 씨발, 험한 말이 나왔다.

“미칠 것 같더라.”

미칠 사람은 바로 나라는 내 마지막 말을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 몰랐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험한 얼굴을 할 정도로 심각해질 줄도 몰랐고.

강세현에게만 있고, 내겐 다른 연애 경험이 없어서 억울했었는데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니면 엄한 사람 한 명 범죄자를 만들 수도 있었겠구나, 그렇게 위로했다.

“잘못했어.”

강세현은 뭐가 아쉬워서 자꾸 이렇게 쉽게 용서를 구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내가 오히려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강세현.”

“어?”

“넌 내 어디가 그렇게 좋냐.”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네가 이렇게까지 하냐는 말을 돌려서 한 것뿐, 진심이었다면 이보다 더 유치한 질문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훨씬 더 유치했다.

“다.”

나는 늘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얻었다. 맨 처음 시작은 새아버지가 생겼을 때였다.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가 생겼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싫어함을 넘어 나를 증오했다. 신기하게도 계속 그렇게 행복과 불행이 교차했다. 외로운 유학 생활이 적응될 때쯤 계속 공부할 기회를 얻는 대신 빚도 함께 얻었고, 소라라는 좋은 친구와 주변 사람의 관심 덕에 행복해지려 하자 의붓형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서 강세현과 사귀게 되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연애를 시작하긴 했지만 평범하지 않은 만큼 좋은 추억도 남겠지만 나쁜 기억도 생기겠지. 그런데 이러면 나쁜 기억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지금의 내겐 행복밖에 없어서.

이렇게 계속 행복만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불행이 한꺼번에 찾아올까 봐.

“어떻게 해야 하냐, 널.”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 난.

네가 미치도록 좋은데.

* * *

불안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바로 그다음 날 알았다.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 ……성하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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