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대체 싫은 이유가 뭐야.”
“만나기 싫은데 굳이 다른 이유가 필요해?”
“누가 계속 만나라 그랬어? 딱 한 번만 만나 보라는 거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정말 오랜만이었다. 냉랭한 목소리와 매몰찬 말투. 강세현은 옆에 있는 일행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자신의 페이스대로 앞서 나가고 있었다. 조금 멀찍이 떨어진 두 사람은 꽤 큰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안 되는 줄 알면서 손가락이 제멋대로 창문을 내렸다.
“정말 마음 없으면 못 만날 이유 없잖아. 어차피 만나도 달라질 거 없다며.”
강세현과 강세현의 큰누나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걸 알아볼 만큼 서로 닮아 있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함께 있는 걸 봐선 작은누나일 텐데 그 어디에서도 닮은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큰누나 쪽이 전체적으로 큼직해서 시원시원한 느낌이라면 이쪽은 좀 더 오목조목한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생김새는 달랐지만, 미인임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안 만나는 거야. 만날 필요조차 없으니까.”
“―야, 강세현.”
누나의 부름에 결국 강세현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뒤를 보는 표정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혹시라도 내가 보일까 봐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출입구 벽에 가려져 그쪽에서 내 차가 다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효민이만큼 너한테 어울리는 애 있어? 얼굴도 예쁘고 집안도 좋고. 그리고 너도 알 거 아냐. 걔만큼 너 좋아하는 애도 없어.”
한 번만 만나 보라길래 누군가를 억지로 소개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익숙한 이름을 듣고 그게 아님을 알았다. 모르는 사람을 소개하는 그런 자리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강세현의 주변에 효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전 여자친구 한 명뿐이었다.
“그래. 근데 내가 걜 안 좋아해.”
“오래 좋아했었잖아. 다시 못 만날 이유 없다고 보는데.”
“아니. 다시 만날 생각 없어.”
“그러고도 얼굴 보면 다시 좋아질 수 있잖아.”
“그럴 일 없어. 그러니까 제발 적당히 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밖에 말 못 해?”
“하아…….”
강세현은 한숨을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게 정말 날 위한 거 맞아?”
“그럼 내가 뭐 때문에 이러는데.”
“체면 때문이겠지. 그 집안 이름 필요한 거 아냐?”
“웃기지 마. 우리가 뭐가 모자라서? 지금도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데랑 자리 만들 수 있어.”
“그러면 일 때문이야? 세진한테 업혀 갈 아이템이라도 있나 보지?”
“강세현!”
주차장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험악하게 변한 상대의 표정을 보고도 강세현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이었다.
“어제오늘 누나가 원하는 대로 해 준 대가가 이거야? 몇 번을 말해도 똑같아. 다시 만날 일도 없고, 좋아할 일도 없어. 누나가 효민이랑 가깝게 지내는 건 상관없지만 거기에 날 개입시키지 마.”
“그렇게까지 거부하는 데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무슨 이유.”
“설마 다른 사람 생긴 거-”
“누나.”
강세현은 상대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잘 생각하고 말해. 본인이 생각했을 때 말이 되는지. 그 질문의 상대가 나라는 것도 좀 생각하고. 내가 먼저 건 조건인데, 어길 리 없잖아.”
그 조건이 정확히 어떤 조건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생겼냐는 말을 부정하는 건 확실했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무척 담담한 말투였다.
강세현은 내 앞에서 늘 티 나게 거짓말을 했다. 일부러 알아챌 거짓말만 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이제야 강세현이 진짜 거짓말에는 아주 능숙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 이번 건 내가 좀 지나쳤어.”
방금까지 흥분했던 상대는 강세현의 말을 듣고 조금 진정한 듯 보였다.
“근데 그러면 정말 다시 안 만나 볼 이유 없지 않아? 꼭 사귀진 않아도 그냥 친구로 지내도 되잖아.”
“조금 전에 누나 입으로 말했지, 걔만큼 나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그런 애를 상대로 친구로 지내라고?”
“물론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러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알겠네.”
목소리를 낮춘 두 사람의 대화는 조금 전처럼 또렷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다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어차피 모른 척하고 못 지낼 사이야. 세진이랑 우리, 이미 어른들부터 다 연결돼 있는 거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 없어. 그냥 잘 지내라는 거야.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지내라고. 그러려면 효민이랑 일단 만나서 풀어야 할 거 아냐.”
“풀어야 할 게 있어야 풀지. 걔가 누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몰라도 마지막에 잘 지내라고 하고 끝냈어, 우리. 애초에 연인이었다가 친구로 지내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돼도 해. 네가 언제부터 하고 싶은 대로 했어?”
강세현은 또 한숨을 쉬었다. 많이 지쳐 보였다.
“피곤하니까 일단 타. 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가면서 해.”
곧이어 강세현이 먼저 운전석에 타고 뒤이어 상대가 조수석 쪽으로 갔다. 익숙한 차가 코너를 돌아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듣지 말아야지 해 놓고 멈출 수 없었던 나쁜 짓은 두 사람이 떠난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세진그룹.
어떤 그룹인지 너무나 알고 있다. 항공 사업을 주로 하지만 알려진 사업 부문만 여러 개였고, 그 아래 계열사만 해도 수십 개였다. 내가 일 년에 몇 번씩 타는 비행기도 전부 세진 그룹 것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자 수백 개의 사진 중 강세현의 전 여자친구 얼굴이 있었다. 6년 전 사진이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지만 새하얀 피부가 유독 빛이 났다. 맨 처음 봤을 때, 왜 낯이 익었는지 이제야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한때 포털 사이트에 잠깐 이름이 오르기까지 했었는데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금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혔다. 그리고 나 또한 반짝 뜬 기사를 대충 읽고 그냥 넘겼었다. 어차피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그런 사람과 이렇게 엮여 있다. 강세현을 두고서 과거와 현재로.
그 사실이 기가 막혀서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왔다.
‘다시 만날 일도 없고, 좋아할 일도 없어.’
정확한 거절이었다. 전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라고 설득하는 누나의 말을 누구보다 차가운 말로 잘라 냈다. 역시 강세현다운 대답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와중에 강세현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게 싫었다. 효민이, 우리, 이런 말을 직접 듣는 건 괴로웠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된 거지.
우리 사이에 있어 더 감정적인 사람은 항상 강세현이었다. 시큰둥하다가도 나와 관련된 일에만 열을 올렸고, 언제나 자신의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좋다, 싫다, 누가 봐도 알기 쉬울 정도로 감정에 솔직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감정이 벅차올랐던 건 처음에만 잠깐 그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매 순간 쿵쿵대던 심장 소리는 조용한 두근거림으로 변했다. 펄펄 끓는 물처럼 뜨거운 게 강세현의 연애라면 내가 하는 연애의 온도는 그것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거라고 믿었다.
과연 정말 그랬던 걸까.
사실은, 한밤중 깨어나 날 안고 있는 사람이 강세현이라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보고 싶어 빛을 가로막은 어둠이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다. 함께 있다가도 문득 입을 맞추고 싶어 손을 뻗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믿음이나 확신이 있어도 질투나 불안함이 불쑥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그러면 담담해지려 노력하지만, 그 순간 괜찮은 듯 넘어가도 실은 나중에 혼자서 속앓이를 했다.
진실은, 나는 겁을 내고 있었다.
강세현을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그 감정을 꾹꾹 누르며 모른 척하려 애쓰는 겁쟁이였다.
이미 이렇게나 좋아져 버렸는데 바보처럼.
한동안 멍하니 차 안에 있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강세현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출발할 수 없었다. 보고 싶은 얼굴을 봤고,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역시 안 하던 일은 하는 게 아닌데.
***
집으로 돌아와 시험공부를 했다.
물론 잘 될 리가 없었다. 2시간 동안 넘어간 페이지 수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거짓말까지 해 놓고 강세현을 만나는 것도 실패. 책상 가득 요란하게 책을 펼쳐 놓고 공부도 실패.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대체 기분이 왜 이래.
사방이 조용한데 내 마음만 어수선했다. 나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닌데 다른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소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담배도 피워 보고, 음악도 들어 보다가 겨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씨를 쳐다보고 있는데.
똑똑.
두 번의 노크 소리, 그 이후 정적이 이어졌다.
보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다 하다 이제는 노크 소리로도 심장이 떨리는구나. 현관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차피 누군지 알고 있어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역시나 강세현이었다.
“……왔어?”
아. 이번에도 실패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일부러 평소와 같은 말을 뱉었는데 말을 꺼낸 타이밍도, 표정 관리도, 모두 실패했다.
내 표정이 절대 괜찮지 않다는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기가 조금 껄끄러워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마주한 강세현은 계단을 걸어 올라왔는지 조금 숨이 차 보였다.
“미안.”
얼굴을 보는 순간 쌓여 있던 서운함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착한 척을 해 놓고 이제 와서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괜찮은 척을 하려 했는데, 허무하게도 괜찮은 척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아져 버렸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얼굴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