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일을 빼지 못한 금요일이었다. 원래라면 이번 겨울 방학 때 한국을 가지 않고 일해 주는 대신 이번 주부터 시험 끝날 때까지 스케줄을 비워 주기로 했으나, 손이 모자라는 탓에 오늘만 나와 달라고 매니저님께 부탁을 받았다.
서기현: [내일중국집콜?]
임정우: [세현이랑 성하 파이널아냐?]
서기현: [잠깐점심만먹으면되자나]
서기현: [못본지한참됫는데]
장기재: [몇시]
서기현: [그건애들한테물어보고]
어차피 내일이 주말이라서 끝나면 강세현의 오피스텔로 가려고 했는데 형들과 내일 점심을 먹기로 한 장소가 우리 집 근처였다. 그래서 내가 가는 대신 강세현이 아파트로 오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왔던 게 2주 전이니 아파트에서 보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나: [오늘 끝나고 포장해 갈게]
나: [뭐 먹고 싶은거 있어?]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올 줄 알았던 답장은 한참이나 오지 않았고, 거의 중간쯤 갔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 오늘 못 갈 것 같은데.
예상 못 한 말이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
- 누나가 갑자기 온다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 어. 6시 비행기래.
순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한국에서 출발하는 거라면 시카고까지 오는데 적어도 반나절이 걸릴 테니 지금 바로 출발해도 내일 새벽이었다. 그런 거면 차라리 공항과 가까운 우리 집에서 가는 게 낫기 때문에 못 올 이유가 없었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거야?”
- 아니. 뉴욕에서. 일 있어서 사흘 전에 출장 왔거든.
강세현은 유난히 가족 이야기에 말을 아꼈다. 예전에 큰누나가 한 번 가게에 방문했던 걸 빼면 지금껏 가족을 본 적도, 가족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 중 누군가 미국에 와 있다는 정도는 말해 줘도 됐을 것 같은데. 얄궂은 감정이 솟아났다. 서운함이었다.
“그때 그 누나분이셔?”
- 아니. 이번엔 작은 누나.
“저녁은 어떻게 하게.”
-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아니면 우리 가게 예약해 줄까?”
곧바로 들려올 줄 알았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강세현은 잠깐 뜸을 들였다.
- 아니. 그냥 근처에서 먹으려고. 알아서 찾아볼게.
또 느꼈다. 아까의 그 감정. 별거 아닌 일에 자꾸만 서운함이 느껴졌다.
강세현은 내게 좋게 넘어가려 하는 버릇을 고쳐 달라고 했지만, 그건 절대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이럴 때 더 자세한 걸 물어보면 좋으련만, 이번에도 나는 따져 묻는 대신 아닌 척 넘어가는 것을 택했다.
“오셨다가 언제 가셔?”
- 아마 내일 바로 갈 거야. 바빠서 어차피 오래는 못 있어.
“내일 약속 괜찮겠어?”
- 오전 중에 갈 것 같아서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그 전에 연락할게.
강세현은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통화였지만, 기분이 좀 이상했다.
조금 전 그 망설임은 대체 뭐였을까.
끊어져 버린 핸드폰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혹시 내게 뭔가 숨기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설마 그 강세현이.
***
강세현은 그 통화 이후 계속 연락이 없었다.
그동안 나는 일을 하러 갔고 유니폼을 갈아입은 후에는 전화기를 볼 틈이 없었다.
“아씨, 그냥 관둘게요.”
홀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직원들 사이에 흔히 있는 싸움으로 일식 홀을 담당하던 직원이 말리려던 매니저님에게 고함을 치고 나가 버렸다. 다른 날은 몰라도 금요일인 오늘 이러면 곤란한데.
갑작스러운 인원의 부재에 모자란 손을 메꿀 인원으로 철판 쪽 서버 한 명이 일식 홀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엔 철판 홀의 인원이 모자랐고, 그걸 메꿀 추가 인원은 당연히 없었다. 현재 있는 인원 중 테이블을 더 맡아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오래 일한 나밖에 없었다.
“성하 네가 해 주면 안 되겠냐.”
강세현은 내가 기현 형에게만 유독 약하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틀렸다. 그런 사람은 기현 형뿐만이 아니었다. 오늘도 나는 사장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끝나고 나왔을 땐 녹초가 되어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차에 타 몇 시간 만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락하겠다던 강세현의 연락은 없고, 다른 이의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엄마」
무슨 일이지? 평소에 이렇게 부재중 전화를 남기는 일이 거의 없어서 놀란 마음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꽤 한참 후 여러 번의 연결음 끝에 겨우 통화가 연결됐다.
- 성하야.
전화를 받는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기운이 없었다.
“전화 많이 했던데. 무슨 일이야?”
- 우리 아들 목소리 듣는데 무슨 일 있어야 전화하니? 그냥 전화했어.
단순히 그 이유로 이렇게 많이 전화했을 리 없는데.
계속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끝까지 엄마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안부를 묻고, 새 아버지에 관한 소식 한두 가지와 이틀 전 있었던 모임 이야기를 했다.
- 용돈은 안 부족해? 더 필요하면 이야기해. 엄마가 따로 보내 줄게.
“괜찮아.”
- 그러지 말고. 이번에는 안 들어오니까 맛있는 것도 못해 주는데.
목소리에서 섭섭함이 잔뜩 묻어났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겨울 방학 때는 한국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자 서운해한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엄마였고, 다른 한 명은 강세현이었다.
-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 안 들어오는 건 아니지?
“이유는 무슨 이유야. 그런 거 없어. 그냥 졸업 앞두고 이래저래 바빠서 그래.”
- 정말이니?
“정말이야.”
- 다른 사람들은 다 들어온다고 그러던데……. 4학년이라 해도 어차피 똑같다며. 시험 끝나고 방학하면 할 거 없다고 다들 들어온다더라. 그런데 우리 아들은 왜 안 들어오는지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해 봐.
“할 게 왜 없어. 난 선배들한테 다음 학기에 들을 강의 노트 미리 받아 놔서 그걸로 공부해야 해. 그리고 방학이라 해도 겨울 방학은 짧잖아.”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갈 텐데 이번엔 어째서인지 진짜라고 몇 번을 말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거짓말을 하는 건 마음이 불편한데, 오늘은 그것도 여러 차례 해야 했다.
- 엄만 혹시나 여자친구라도 생겼나 했지.
“절대 아니야.”
- 그래? 엄마 눈엔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데 왜 그럴까. 넌 아빠 닮아서 인기도 많을 텐데.
순간 깜짝 놀랐다. 엄마가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새아버지와 결혼한 후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참 예상 못한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전부 아빠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내 툭 건드리면 전부 입 밖으로 토해 낼 것 같은 말들을 꾹꾹 눌러 삼켰다.
- 성하야.
“어?”
- 졸업하면, 바로 한국으로 올 거지?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렇게 믿고 있을 텐데 대답을 알고도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가야지. 갑자기 왜 물어?”
- 그냥 너무 오랫동안 나가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싫다고 할까 봐 걱정돼서. 엄마는 사실 좀 후회해. 그때 보내지 말 걸 그랬어.
“덕분에 남들 부러워하는 유학도 왔잖아. 그리고 졸업하면 바로 들어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 그래. 다행이네.
“엄마. 정말 무슨 일 없는 거 맞아?”
혹시 새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절대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그냥 오늘따라 우리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이상한 날이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고, 평범하게 통화하는데도 계속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강세현도 그랬고, 엄마도 그랬다.
- 어쨌든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엄만 이제 데리러 와서 끊을게. 다시 전화할게.
전화가 끊어지고도 한참을 차 안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찝찝한 기분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그런 날이 있다.
유난히 지치고 유난히 버거운 날.
이런저런 일이 한꺼번에 겹쳐 아무리 노력해도 버티기 힘든 최악의 하루.
하지만 그 긴 하루 끝에 단 하나의 기쁨이 생긴다면, 최악의 하루가 순식간에 그래도 괜찮은 날로 바뀐다. 그리고 내게 그 하나의 기쁨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강세현이었다.
그런 강세현이 없는 날이었다.
강세현을 볼 수 없는 날.
하필이면 그게 오늘이었고, 하필이면 오늘 나는 최악의 상태였다.
불 꺼진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강세현이 오지 못해서 다행이다. 지금의 나는 컨디션도, 기분도 너무 엉망이라서 보지 못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보고 싶다.”
따뜻한 물에 피로를 씻어 버리고 나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어차피 지금은 공부를 하려 해도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을 게 분명해서 맥주를 마시고 일찍 잠을 청할 예정이었다. 잔에 따른 맥주 거품이 꺼지기 전에 마셨다. 일한 후 마시는 맥주는 여태껏 실패한 적이 없는데 오늘따라 유독 맛이 없었다.
사실, 무얼 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봐 먼저 연락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먼저 문자를 보냈다.
나: [어디야?]
답장은 끝끝내 도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