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12. 징조
날이 유난히 추웠다.
강세현과 맞이하는 네 번째 겨울이 왔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친구였고, 세 번째 겨울에 연인이 되었으니 네 번째 겨울은 연인이 되고 나서 두 번째로 함께 하는 겨울이었다.
잠옷 차림에 패딩을 껴입고 발코니에서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강세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몇 시에 올 거냐는 내용이었다.
벌써 일어난 건가?
굳이 지금 묻지 않아도 되는 걸 이렇게 이른 시각에 보내온 게 신경 쓰였다.
나: [미팅 끝나면 좀 늦어]
나: [8시쯤?]
강세현: [알았어]
나: [일찍 일어났네]
강세현: [눈올지도 모른다길래]
고작 그런 이유로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다니.
눈이 오면 30분 일찍 출발해야 하는 나를 위해 강세현은 매일 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혹여 아침에 눈이 오면 그걸 알려 주려 일부러 알람을 맞춰 놓고 일찍 일어난다. 대부분 누굴 좋아한다 해도 그렇게까지 귀찮은 일을 하진 않을 것 같은데, 강세현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다행히 눈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뻐하며 메시지를 보내자 바로 답장이 왔다.
강세현: [눈은 안와도 오늘 추워]
강세현: [따뜻하게 입어]
요번 달만 지나면 다음 달이 벌써 1년이었다. 강세현과 내가 연인이 된 지 1년.
친구일 때의 기억을 덮을 만큼 즐거운 추억만 있어서일까, 벌써 그렇게 됐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이제는 서로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제법 익숙해졌다.
친구일 때와는 달리 연인이 되고 나면 서로에게 익숙해져 마음의 크기와는 별개로 노력의 크기가 줄어들 줄 알았다. 익숙함은 지루함으로 이어지고 지루함은 나태함을 부르는 게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더는 다정할 수 없을 것 같던 강세현은 하루하루 더 열심이었다. 이 정도면 어디서 배워 오는 건가, 진짜 공부하는 건 아닐까 의심할 만큼 강세현은 전보다 더 다정했다.
‘넌 매번 귀찮지도 않냐.’
‘뭐가.’
‘그냥 이런저런…… 나한테 하는 거?’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왜 귀찮아. 전에 네가 그랬잖아. 나만큼 성실한 놈 없다고. 이렇게 해야 네가 아까워서라도 나랑 안 헤어지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너랑 헤어질 생각 없는데.
강세현은 늘 평범한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준비를 끝내고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하늘에서 하얀 얼음 알갱이가 떨어졌다. 이른 새벽부터 내린다던 눈이 지금에서야 내리기 시작했다.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평소보다 더 막힐 도로를 상상하자 한숨이 나왔다.
나: [결국 오네]
나: [이제 내리기 시작했어]
드르륵-.
답장은 금세 도착했다.
강세현: [쌓이기전에 얼른 출발해]
나: [지금 출발하려고]
강세현: [가다가 졸리면 전화하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세현: [안졸려도 전화해]
이게 무슨 말이야.
생각하는 찰나, 또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세현: [목소리 듣고싶어]
잊고 있었는데 단지 다정한 것만 업그레이드된 게 아니었다. 솔직함 역시 전보다 더 심해졌다.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처럼 기분이 왔다 갔다 했다.
***
항상 가는 카페에 들러 커피와 스콘 한 조각을 샀다. 2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묵직한 책을 꺼내 펼쳐 놓고 조촐한 점심을 먹었다.
한둘씩 줄어들던 런치메이트가 전부 사라지고 이제는 정말 혼자였다. 형들은 모두 졸업했고, 나는 4학년이었다.
확실히 4학년이 되면서 할 게 더 많아졌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강의를 듣고 시험을 치거나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형태였는데, 이제는 실무를 기반으로 하는 프로젝트 수행이나 논문과제가 많아졌다. 남은 과목도 전부 다 성적이 중요한 전공과목뿐이어서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강세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처럼 일찍 강의가 끝나지도 않을뿐더러 일찍 끝나는 날에도 리서치 등으로 시간을 보내느라 내 스케줄에 맞춰 우리 캠퍼스에 오는 건 완전히 불가능했다.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닌 강세현이 우리 캠퍼스에 오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어쩐지 허전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카페엔 나처럼 혼자 앉아 책을 보는 학생이 많았다. 오래 앉아 있는 게 눈치가 보여 반쪽 남은 스콘을 허겁지겁 입에 넣고 있는데 테이블 위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는 반가운 이름이 떠 있었다.
“수업 중 아냐?”
- 오늘 좀 일찍 끝났어. 통화 괜찮아?
“어. 말해.”
이틀 만에 연락해 온 소라는 며칠 전보다 훨씬 차분한 목소리였다. 얼마 전 연애를 시작했다길래 일부러 먼저 연락하지 않았더니 이틀 전에 연락 왔을 땐 서운하다는 말을 열 번쯤 들었다.
- 있지, 너 그 형 새끼랑 연락해?
“아니. 왜?”
- 흠……. 그냥 내가 재수 없는 소릴 들어서.
“뭔데. 괜찮으니까 말해 봐.”
험한 말로 짜증을 내던 소라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조금 전에 태환 오빠라고 우리 학교 졸업한 오빠 왔다 갔거든. 그 오빠 누나가 되게 아는 사람이 많아서 그 오빠도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알고 지내는데 그 새끼랑도 아는 사이야. 이전에도 몇 번 이야기한 적 있는데 계속 듣기 싫어서 무시했었고.
사실 따지고 보면 소라도 아는 사람이 많은 편인데 내 의붓형과는 건너 건너 아는 사이가 되는 것도 싫다며 관계된 사람은 칼같이 잘라 냈다.
- 근데 이 오빠 두 달 전에 한국 갔다가 지난주에 왔는데 오늘 또 말을 꺼내길래.
“무슨 말?”
- 한국에서 그 새끼 만났는데 자기 아버지 회사 자랑하면서 조만간 미국으로 출장 올 거라고 했나 봐. 뭐, 큰 건 하나 성공시킬 것 같다면서 완전 신났다던데? 그 오빠더러 한국에 나오기만 하면 본인이 취업시켜 준다고 큰소리 떵떵 쳤대.
형과는 당연하게도 전혀 교류가 없으므로 출장에 관해서는 모르지만, 몇 달 전부터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엄마를 통해 들었었다. 그 일이 꽤 잘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 그 새끼가 멀쩡히 회사 다니는 상상만 하면 열 받아 미쳐 버릴 것 같아. 그 양아치가 출장까지 다니는 게 말이 되냐?
“그래도 생각보다 회사는 잘 다니는 모양이던데.”
그도 그럴 게 새아버지가 가진 것에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다. 지금 회사도 나중 되면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할 테니 당연히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 시발, 그 회사는 왜 안 망하냐.
피식 웃음이 났다.
“망하면 누가 내 학비 내줘.”
- ……아씨, 몰라. 그래도 그 부자는 제발 망했으면 좋겠어. 신은 뭐하냐, 대체.
이럴 때도 나는 맨 먼저 학비 걱정을 해야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란 생각이 먼저 들어, 나 대신 화를 내 주는 소라에게 호응해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었다.
- 그나저나 성하야. 넌 어쩔 건데?
“뭘?”
- 졸업하고 나서 말야. 너도 그 회사 들어가나 싶어서.
“글쎄.”
- 가기 싫어도……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지?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회사에 가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엄마가 분명 서운해할 것 같았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졸업 후 새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게 되는 걸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완전 다른 전공이나 전문직을 택했어야 했다는 걸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차라리 새아버지가 반대해 준다면 좋을 텐데, 그 사람이라면 내가 탐탁지 않아도 엄마를 실망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이럴 때 의붓형이라도 나서서 반대해 주면 좋을 텐데.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졸업하려면 이제 반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졸업 후의 일정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운 바가 없다.
- 당장은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내가 늘 말하지, 넌 어딜 가나 잘할 거라고.
소라는 내 맘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성공하면 꼭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농담을 던졌다. 강세현이 알면 분명 질투하겠지만, 역시 나의 최고의 인복은 소라였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일부러 새 남자친구 이야기를 몇 마디 하고 난 소라는 오늘 밤 괘씸한 부자를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졸업 후라…….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린 시간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반년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앞으로의 일을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였다.
강세현은 어떻게 할까. 지금도 이미 방학 때마다 집안 사업을 돕고 있으니 졸업 후에도 한국으로 가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만나게 되면 보는 눈이 더 많아지고,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지면서 지금처럼 자유롭게 만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자 마음이 더 복잡하고 어수선해졌다.
일어서기 전, 남아 있는 스콘을 마저 입에 넣었다. 입 안이 마치 내 마음처럼 버석거렸다. 삼키지 말아야 하는 걸 삼킨 것처럼 가슴 한쪽이 꽉 막혀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약속한 시각보다 한 시간 일찍 강세현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주차를 맡기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저 멀리 엘리베이터 앞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모자를 눌러쓴 채 품이 큰 후드티를 입고 있었지만, 누군지 단번에 알았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뒷모습만 보고도 갑자기 막혀 있던 숨통이 트여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강세현이 뒤를 돌았다. 꽤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네 생각 중이었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놈의 심장은 저 혼자만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MINT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