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58화 (58/96)

#58

금요일이었다.

마지막 강의가 무척 일찍 끝나 버렸다. 원래 한 시간 반짜리 강의인데 3주 후에 있을 팀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라며 교수가 5분 만에 설명을 끝내고 나가 버렸다. 대부분 강의실에 남아 의논을 하거나 카페 같은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는 듯했으나 나까지 포함해 셋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오늘은 그냥 집에 가고 다른 날 모이자는 걸로 뜻을 모았다.

[그럼 우린 언제 모여?]

[다음 주 화요일 어때? 다들 일찍 끝나는 날이잖아.]

[그날은 내가 안 돼. 끝나고 할 일이 있어서.]

[흠, 그러면 점심시간은? 열두 시나 한 시쯤?]

[난 그 시간에 강의 없어서 괜찮아. 이안만 괜찮으면 좋아.]

[나도 괜찮아. 그때 보자.]

강의 건물에서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끊어야지, 끊어야지 했던 걸 벌써 몇 년째 습관처럼 피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끊지 못한 흡연자뿐이고, 유일하게 금연에 성공했던 정우 형도 얼마 전부터 1년 만에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건물 벽에 붙어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낯익은 얼굴 한 명이 지나갔다. 1학년 때, 처음으로 들었던 강의 교수였다. 그 문제의 교수.

그러고 보니 이 건물이었구나.

바로 이 자리에서 기현 형을 만났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그 만남이 설마 이렇게까지 내 삶에 영향을 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단지 대학 생활이 아니라 내 삶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만남으로 알게 된 강세현 때문이었다.

내가 남자를 만나다니.

강세현을 만나기 전에는 고민했던 문제가 막상 강세현과 만나기 시작한 이후로는 특별히 문제 되지 않아 잊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를 만난다는 그 사실이 이제 와서 너무나 큰 문제가 됐다.

‘할 거라고, 섹스.’

그날 이후, 예상과 달리 강세현은 며칠이 지나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처음엔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불안해하다가 하루 이틀 지나고 나서는 거의 포기 수준에 이르렀다. 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건가. 아니, 이번엔 안 기다려 준다고 그랬는데.

“후우…….”

그게 언제가 되든, 그래도 역시 더 준비해야 할 쪽은 나인 것 같았다.

[어? 이안.]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같은 팀 멤버 중 하나였다.

[아직 안 갔어?]

[아, 가야지. 이것만 피우고 가려고 했어.]

[그럼 화요일에 보자. 좋은 주말 보내고.]

[너도.]

거의 휴강이나 마찬가지로 시간이 비었으니 그대로 집으로 가면 한 시간은 쉬었다가 일을 갈 수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 지금쯤 끝났을 이가 생각났다.

지금 봐 봤자 겨우 30분 정도밖에 볼 수 없는데 한번 떠올린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나: [끝났어?]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강세현: [어]

바로 집으로 갈 거냐는 메시지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다시 지웠다.

강세현: [끝나서 팀미팅가는중]

아. 그게 오늘이었나.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이라 다행이었다.

짧게 남은 담배를 비벼 껐다.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을 겨우 떨쳐 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매일같이 드나드는 캠퍼스를 지나며 늘 무심하게 지나치던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건물들.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주변 환경. 어느새 모든 게 익숙한 배경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익숙함 속에 가장 큰 존재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감정.

아쉬움이었다.

***

하트가 가득한 가판대 앞에서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이걸…… 사는 건 좀 그렇겠지?

집으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른 대형 마트는 입구에서부터 붉은색 천지였다. 곳곳에 놓인 커다란 풍선들과 곰 인형. 진열대 한 줄이 전부 초콜릿으로 가득 차 있었다.

「Happy Valentine’s Day」

당장 내일이 발렌타인이었다.

미국에서는 꼭 연인만이 아니라 친구끼리도 챙기긴 하지만, 소라와는 주고받은 적 있어도 지금껏 강세현과 이런 걸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연인이 된 지금은 이런 사소한 이벤트를 챙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아무래도 남자끼리는 좀…….

화려하게 포장된 초콜릿 사이에서 가장 평범하게 생긴 걸 집어 들고서 한참 고민하다 다시 내려놓았다.

역시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곤 과감하게 걸음을 돌렸다.

그 후엔 평범하게 장을 봤다. 벽걸이 시계에 넣을 건전지 두 개와 욕실 청소용 세정제를 사고 식품 코너에서 몇 가지 간식과 음료를 골랐다.

강세현이 즐겨 먹는 아이스크림. 강세현과 함께 마실 맥주. 강세현이 좋아할 만한 스낵. 나중에 확인한 카트 안은 전부 강세현에 관한 것뿐이었다.

둘이 함께 왔을 때야 그렇다 쳐도 혼자인데 왜.

생각해 보니 최근 들어 여러 번 장을 볼 때, 내가 무언가를 직접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걸 담았던 사람은 강세현이었다.

이렇게까지 나한테 맞춰 주고 있었던 거구나.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항상 기분이 이상했다.

기쁘면서도 화가 나고,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울고 싶었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단 하나도 살 수 없었다.

강세현에게서 뒤늦게 연락이 왔다.

- 메시지 답이 없어서.

“언제 보냈는데?”

- 보낸 지 한참 됐어.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메시지를 확인하자 30분 전이었다.

“아. 마트에 있을 때 보냈었네. 못 봤나 봐.”

- 마트는 갑자기 왜. 수업 중 아니었어?

“오늘 일찍 끝나서 장보고 지금 막 아파트 도착했어.”

- 벌써? 언제 끝났는데.

목소리가 퍽 놀란 것 같았다. 상황을 설명하자 이번엔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그럼 아까 나한테 메시지 보냈을 때쯤 끝난 거잖아.”

“어.”

- 말하지.

“말하면 어쩌게.”

- 만나게.

“미팅 있다며.”

- 한번 정돈 안 가도 돼.

거짓말.

당연히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안 가도 된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강세현이라면 꼭 가야 하는데도 나를 보러 올 거라는 걸 아니까.

“근데 너 지금 미팅 중 아니야? 벌써 끝났을 리는 없고.”

- 전화한다고 잠깐 나왔어.

“그럼 다시 가. 별일 없는 거 확인했잖아.”

- 싫어.

강세현은 나와 사귀고 나서부터 부쩍 싫다는 말이 늘었다. 아프니까 집에 오지 말라고 해도 싫어. 신세 진다는 말도 싫어. 그냥 좋게 넘어가는 것도 싫어. 그리고,

‘그냥 알고 지내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싫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귀는 것도 싫어.

‘그런 사람은 성하밖에 없어. 그 외엔 다 싫어.’

생각해 보면 내가 강세현과 사귀면서 불안함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싫다는 말에 담긴 강세현의 진심 때문이었다.

나는, 강세현의 싫다는 말이 좋다.

-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딱히 할 말도 없는데.”

-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해 봐.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

강세현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어떻게 매번 그렇게 솔직할 수 있냐고.

어색하다거나 낯설다는 이유로 난 녀석에게 진심을 전한 적이 몇 번 없었다.

“강세현.”

- 어.

“…….”

-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어.

마침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머릿속을 꽉 채운 그 말은 안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용기를 냈다. 진심을 전하는 일은 하기 전엔 망설여져도 하고 나면 늘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냥, 보고 싶다고.”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그 말은 아주 평범하고, 아주 단순하고, 아주 흔한 말이었다.

그리고 강세현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새벽 12시 반. 평소보다 늦게 강세현의 오피스텔로 출발했다. 도착했을 땐 당연히 1시가 넘어있었다.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 2층, 3층…… 화면에 보이는 숫자가 올라갈수록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다. 24층에 도착하자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신기했다. 매번 이렇게 만날 때마다 마음이 달라지는 게.

강세현을 만나러 가는 길은 적당한 기대와 긴장으로 시작해 횟수가 더해질 때마다 그 정도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설레며 걸었던 이 복도도 오늘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울렁거릴 정도였다.

더는 커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감정이 나도 모르는 새 눈덩이처럼 부풀어 있었다.

수십 번 왔던 곳에 멈춰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익숙한 문을 열었다.

“늦었네.”

소파에 앉아 있던 강세현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걸음에 반가움이 실려 있었다.

“씻고 왔어? 와서 씻지.”

나를 보는 눈빛은 오늘도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내 앞에 우뚝 선 강세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흠칫, 놀란 상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 내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갈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항상 똑바로 내게 와 준 건 강세현이었으니까.

당황한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늘 맡았던 강세현의 냄새가 났다. 짧은 입맞춤 후엔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하자,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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