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47화 (47/96)

#47

“안는 건 습관이야?”

“아니. 기뻐서 그래.”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입바른 소리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강세현은 간혹 당혹스러울 만큼 순수하게 본인 진심을 뱉어냈다. ‘놀랐어.’ 그런 중얼거림이 들렸다.

“너야말로 예상했던 거 아니었어?”

“뭘.”

“이런 상황.”

“어. 그래도 그게 지금일 줄 몰라서.”

“이제 내 맘 알겠냐? 내가 그때 어땠는지.”

어깨 너머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것인지 강세현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생각, 바꾸지 마.”

목소리에 여유가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내가 여태껏 알던 강세현이 아닌, 새로운 사람인 것만 같았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을까.

그동안 알고 있던 강세현 말고, 친구가 아닐 때의 강세현. 그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알잖아. 꼼꼼하게 고르는 거.”

“그럼 제발 오래 써 줘.”

또 녀석답지 않은 말.

강세현은 그러고 한참 동안 팔을 풀지 않았다. 단순히 친구일 땐 몰랐던 또 다른 건 녀석의 품이 정말 따듯하다는 것과 늘 멀리서만 맡았던 향이 가까이 있을 때 몇 배나 더 좋다는 점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연애가 전혀 평범하지 않은데, 앞으로도 걱정투성이일 이 연애가 고르고 고른 것 중 최고라는 생각이 들어서.

미루고 미뤘던 일을 마침내 해낸 느낌이었다.

***

연애를 한다.

태어난 지 23년 만에 연인이 생겼다. 그리고 없던 고민도 생겼다.

대체 연애란 뭘까.

“헤어졌어.”

“또?!”

불과 이틀 전에 여자친구 생일이라고 식당을 알아보던 기재 형은 그사이 이별했다. 너무 여러 번 일어났던 일이라 별로 놀랍지 않은데 늘 함께 다니는 준성 형이 아직도 놀란다는 게 더 놀라웠다.

“너 어제까지 통화하고 그러지 않았냐? 대체 언제?”

“오늘 아침에.”

“이번엔 또 왜? 꽤 오래 가는 것 같더니만.”

그래봤자 넉 달이었다. 여태껏 대부분 석 달을 채우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오래 간 게 맞지만, 그래도 그 기간이 길었다고 보긴 힘들었다.

남의 일, 특히 타인의 연애에 별 관심 없는 나도 이번에는 귀를 기울였다. 항상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일로 헤어지는 기재 형이 이번엔 또 무슨 까닭으로 헤어졌나 궁금했다. 절대, 내가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싸웠어.”

“그러니까 뭐 때문에 싸웠는데.”

“갑자기 오겠다고 해서.”

기재 형은 오늘 헤어진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응? 오겠다고? 어딜?”

“여기. 갑자기 우리 학교에 오고 싶다더라고.”

“……근데 그게 왜 헤어지는 이유가 되는데?”

“밖에서 만나면 되지, 남의 학교에 왜 와.”

“뭐, 더 좋지 않냐? 난 오히려 좋던데. 같은 대학 다니는 것 같고.”

“와서 같이 강의 들을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따라다니는 거 귀찮아. 갑자기 만나자 그러는 것도 별로고.”

“와씨, 성격 존나 안 좋아.”

“뭐 이 새끼야?”

같이 강의를 들을 것도 아닌데 일주일에 꼭 두 번씩은 학교에 찾아오는 놈이 생각났다. 한 번도 귀찮다고 생각한 적 없으니 나는 성격이 꽤 좋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번에는 연락 많이 한다고 헤어지고, 이번에는 갑자기 학교 놀러 오겠다 그랬다고 헤어지고.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냐?”

“전혀. 사귀는 데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개인적인 시간이야. 친구를 만날 때는 친구를 만나고, 또 여자친구를 만날 때는 그쪽에 집중하고 그래야 오래 만날 수 있지, 그 사람한테만 매달리면 쉽게 질린다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넌 사람을 너무 가볍게 만나. 나처럼 좀 진지할 줄 알아야지.”

“야, 너무 진지한 것도 부담이야. 네가 그러니까 맨날 차이는 거 아냐.”

“넌 진짜 오늘 좀 맞자.”

사람마다 다른 연애 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뚜렷한 정답이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세현과 나의 연애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원인은 바로, 우리가 너무 친한 친구이자 연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재 형의 말대로 친구를 만날 때와 연인을 만나는 시간이 뚜렷이 구별된다면 좋을 텐데 애초에 우리에겐 그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연인. 그 두 가지 역할을 한꺼번에 해야 하는 건 생각보다 복잡했다.

처음엔, 서로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다 보니 딱히 신경 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를 더 알아갈 필요도 없고, 상대에게 맞출 필요도 없이 이미 서로에 대해 완벽히 적응하고 있었으니까.

기재 형처럼 연락이 너무 많아 헤어질 일도, 학교에 갑자기 찾아온다 해서 헤어질 일도 없었다. 강세현은 여태껏 그래왔고, 처음부터 그걸 허락한 사람이 나였다.

그런데 그것과는 다른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랄까.

예를 들어 전과 똑같이 우리 집에서 영화를 본다면, 늘 그랬듯이 같은 소파 앉아도 어느 위치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이전까지는 모른 척했던 상황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반응을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상대가 나를 빤히 바라볼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1번. 왜 보냐고 물어본다.

2번. 그만 보라고 한다.

3번. 같이 바라본다.

누가 봐도 1번과 2번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저히 3번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스럽게 서로를 바라본다고?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장면을 강세현과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하면 할 수 없었다. 절대, 절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론은, 예전과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도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고, 알게 된다 해도 실천으로 옮기기가 어렵다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큰 문제였다.

당장 오늘만 해도 강세현의 오피스텔로 가기로 했는데 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게스트룸에서 자는 것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생겨버렸으니 머리가 아팠다.

온통, 물음표투성이였다.

풀리지 않는 숙제를 끌어안고 강세현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넓은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테이블. 익숙한 소파. 익숙한 창밖 풍경. 그런데 단 한 명이 없는 것만으로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내가 빨리 끝나는 월요일과 수요일은 강세현도 항상 빨리 끝났다. 예전에 기현 형이 장난처럼 했던 말이 사실이었다. 강세현은 늘 내 스케줄에 맞춰서 강의표를 짰다. 나보다 한 시간쯤 더 빨리 끝나도록.

그런데 오늘은 두 번째 수업에 들어가기 전, 팀 과제 미팅이 있어서 늦을 테니 먼저 오피스텔로 가 있으라는 문자가 왔다.

매번 맞아주는 이가 없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곧바로 게스트룸으로 가 외투를 벗어 걸었다. 휑한 옷장 안에는 내 티셔츠 서너 벌과 바지 두 벌이 걸려있었다. 그뿐 아니라 욕실에는 내가 사용하는 로션과 애프터셰이브 등이 놓여있었다.

간혹 형들이 와서 자고 갈 때도 강세현은 이 방만은 꼭 내가 사용하게 했다. 그래서 형들 여럿이서 한 방을 쓸 때, 나는 이 방을 혼자 썼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특별 대우였다. 이 정도면 게스트룸이라기보다는 내 전용 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쟤야? 네 잘난 친구가?’

강세현의 전 여자친구가 그렇게 말했던 게 생각났다. 그녀라면 분명 이 방에도 들어와 봤을 텐데 그랬다면 나라도 궁금해했을 것이다. 남자친구의 유일한 친구가 누군지.

그전에는 강세현이 왜 여자친구를 한 번도 소개해 주지 않는지 궁금했는데, 그 정도 반응이면 해주지 않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본인 이외에 이렇게 특별 대우하는 사람이 있는 게 싫었겠지.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았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얼마 후 강세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강세현: [도착했어?]

나: [어]

보내 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정하기도 힘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답장이 오기 전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

나: [미팅중아냐? 이렇게 메시지 보내도 돼?]

강세현: [지금은 별로 중요한 얘기 안해]

팀 과제. 괜찮을까.

강세현은 친구는 만들지 않아도 그것과 별개로 학교생활에 문제는 없었다. 매너가 좋아 학생들과도 별 트러블 없이 지냈고, 특히나 교수들에게는 누구보다 예의 바른 학생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형들이 걱정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팀 과제 같은 것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은 팀이 된 이 중 한국 사람이 있어서 걱정이었다. 개강 첫날, 팀이 정해지고 나서 계속 말을 붙여왔다고 짜증이 나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강세현: [얼마 안걸릴줄 알았는데 좀 더 있어야 할것같아]

강세현: [배고프면 냉장고에서 뭐 좀 꺼내먹어]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 괜찮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몇 분 후, 이번에는 좀 더 늦게 답이 왔다.

강세현: [그럼 기다리고 있어]

액정에 뜬 글씨를 읽고 잠깐 멈칫했다. 별로 대단한 말도 아닌데 충격을 받았다.

와.

심장, 왜 멋대로 두근거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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