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46화 (46/96)

#46

10. 연애

권성하

개강을 했다.

처음에 여섯이었던 런치 멤버는 이제 셋이 됐다. 맨 처음 정우 형이 빠지고 다섯일 때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빈자리가 기현 형과 제이슨 형이 졸업하고 나니 확 느껴졌다.

“다음 주부터는 우리도 의과 대학 쪽에서 먹어야 하는데 어쩌냐. 밥 혼자 먹는 게 제일 짜증 나는데.”

“야, 어차피 성하는 우리 말고도 밥 먹을 사람 많아. 지금까지 쟤가 친구가 없어서 우리랑 먹은 줄 아냐?”

“하긴. 생각해 보니 그러네.”

내가 괜찮다고 하기도 전에 기재 형이 선수를 쳤다. 기재 형의 말을 들은 준성 형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저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친구…… 없는데.

발 넓은 형들 덕에 어느새 한 명뿐이었던 핸드폰에는 학교 사람들의 이름이 여럿 저장되어 있었다. 대부분 기숙사에서 만나 번호를 주고받았지만, 같은 강의를 듣게 되거나 자주 캠퍼스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친해진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가까워진 사람의 지인을 또 소개받고, 그 사람의 지인까지 알게 되고, 그러다 보니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만나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아는 사람’은 많았으나 그중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캠퍼스 안에 아는 사람이 수십 명 있어도 정작 가장 연락을 많이 주고받는 상대는 여기에 없는 강세현이었다.

결국, 친구 없는 강세현과 놀다 보니 어느새 나도 친구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직 이번 주말에 모인다는 소리 없지? 왠지 보자고 시끄럽게 할 것 같은데.”

주어가 빠져있었지만 누가 보자고 할지는 단박에 알아챘다. 우리 중 시끄럽게 할 사람은 기현 형밖에 없었다.

“어차피 보자 해도 난 안 돼.”

“왜?”

“여자친구 생일.”

기재 형은 처음 봤을 때 여자친구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만나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성격은 안 그런데 연애할 때는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곧바로 헤어지고 또 쉽게 다른 사람을 만나곤 했다. 연애 방식도 워낙 칼 같아서 여자친구와 만날 때는 연락이 되질 않았고, 반대로 우리와 있을 때는 여자친구와 일체 연락하지 않았다.

“근데 너도 안 되잖아, 이번 주.”

“나? 나는 왜?”

“……이번 주인 거 잊었냐?”

“……어? 아! 맞다. 그러네.”

여자친구 생일이라는 기재 형 말고도 준성 형도 다른 약속이 있는 듯했으나 일부러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나만 모르는 이야길 하는 게 미안했는지 준성 형이 날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 소개팅하거든.”

그럴 줄 알았다. 사실 그다지 비밀로 할 만한 내용도 아닌 게, 벌써 내가 아는 것만 여섯 번째였다. 한 번도 잘 된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른 형들이 있었다면 이 타이밍에 소개팅 상대에 대한 걸 물었을 것 같아서 궁금하지 않지만 궁금한 척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준성 형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덕분에 사람은 줄었지만 심심하지 않은 점심시간을 보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불쑥 내게 질문이 돌아왔다.

“근데 성하 너는 진짜 누구 만날 생각 없어?”

잊을만하면 나오는 질문이었다. 항상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아직은요.’였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답하려다 멈칫했다.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야, 박준성. 성하 몰라? 백퍼 만날 생각 없다 그러겠지. 있었으면 네 차례는 돌아가지도 않았어, 인마.”

“하긴. 그건 인정. 우리 착한 성하니까 인정한다.”

“언제든 말만 해. 너는 진짜 괜찮은 애로 소개시켜 줄게.”

“뭐야, 그럼 나는? 나는 진짜 괜찮은 애 아니고 누굴 소개해 준 건데.”

형들이 투덕대는 동안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테리아 뒤쪽 흡연 구역에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많았다.

조금 전 누군가 만날 생각이 없냐는 물음에도, 그리고 방금 괜찮은 애를 소개해 준다는 말에도 머릿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리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더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 그 질문에 그 사람이 떠오른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떠올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강세현.

요즘 내 머릿속은 강세현으로 가득하다.

***

개강 첫날인 만큼 대부분의 강의가 일찍 끝났다.

마지막 강의 역시 1시간 15분짜리 수업이 40분 만에 끝나고, 원래 계획대로 강세현의 오피스텔로 갈 예정이었다.

드르륵-.

차에 타서 막 운전대를 잡았을 때, 거치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를 보냈다는 건 그다지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주차를 하는 대신 도착 후 확인하기로 했다. 어차피 끝날 시간에 맞춰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한사람밖에 없었다. 지금쯤 출발하냐고 보냈겠지.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건 20분 후에 차에서 내렸을 때 알았다.

정소현: [성하야 아직 학교야?]

좀처럼 메시지를 보낼 일이 없는 가게 누나였다.

끝났다고 답장을 보내자 몇 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그 길로 곧바로 가게로 향했다. 오늘 오기로 한 새 직원이 말없이 오지 않아 오전부터 부족한 인원으로 하다가 설상가상으로 일하던 직원 하나가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가는 길에 강세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직 수업 중인지 받지 않았다. 갑자기 일하게 돼서 가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놓고 서둘러 홀로 나갔다. 당연하게도 일하는 도중에는 핸드폰을 꺼낼 새도 없이 바빴다.

“성하야. 오늘 정말 고맙다.”

“아니에요. 매니저님도 고생하셨어요.”

“먼저 가 봐, 내일도 학교 가잖아.”

밤 11시 10분, 홀 정리를 맡겨두고 일찍 밖으로 나오자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벌써 몇 년째 같은 거리를 운전해 강의를 듣고, 끝난 후엔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개강 첫날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에너지를 쓴 탓인지 유독 피곤했다. 차에 타기 전 습관처럼 피우는 담배도 힘들고 귀찮았다. 몸이 고되니 기분까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곧장 차에 타 핸드폰을 꺼냈다. 강세현으로부터 당연히 도착해 있을 줄 알았던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괜한 짜증이 났다.

잠잠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손안이 진동했다. 액정에는 82로 시작하는 숫자가 떠 있었다. 이미 수십 번이나 연락을 주고도,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 김은혁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듣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들어야 하는 목소리. 새아버지의 비서였다.

- 송금 완료하여 연락드렸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매번 이렇게 연락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 돈을 보내고 나서는 꼭 전화가 왔다. 처음 한두 번은 그냥 메시지로 달라고 했으나 항상 알겠다고 대답한 후에도 전화로 연락이 왔다. 그리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오직 새아버지가 시키는 일만 한다는 것을.

- 그리고 전해드릴 말이 있는데, 괜찮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 이번 방학 때 한국에 들어오시질 않아서 사모님께서 매우 속상해하신 모양입니다. 연락 자주 드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들을 말이 결코 좋은 말이 아닐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겨울 방학에도 꼭 들어오라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때부터 이런 말을 들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런 말조차 비서를 통해 전한다는 게 어이없었다. 아무리 나와 직접 통화하는 게 싫어도 그렇지 얼굴도 보지 못한 비서에게 이런 말을 하게 한다는 건 전해 듣는 이도, 전달하는 이도,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알겠다고 전해 주세요. 제가 잘 알아서 하겠다고요.”

- 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인데 오늘따라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차 안에 앉아 있다가 결국 다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억지로 핀 담배는 정말 별로였다.

피곤함에, 기분까지 엉망이었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거의 열두 시였다. 그제야 내가 조금 전 꽤 오랫동안 차 안에 있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빨리 가서 쉬자. 그 생각만으로 계단을 올랐다. 가자마자 쓰러질 것 같이 몸이 무거웠다.

달칵-.

조심스레 문을 열자 신기하게도 불빛이 새어 나왔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 꺼져있는 걸 확인했는데 거실 스탠드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늦었네.”

강세현이었다.

왜 남의 메시지는 씹어놓고 여길 와있냐고 따지려다 얼굴에 드러난 반가움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 먼 곳으로 와서 이 시간까지 날 기다린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표정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안 들어와?”

중요한 걸 깨닫자 현관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

“왜 그렇게 봐.”

불과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나의 감정은 ‘아마도’였다. 쉽게 결정 내릴 수 없는 일이라서 수십 번, 수백 번은 고민해 봐야 한다고 믿었기에 점점 내 머릿속에서 강세현의 자리가 커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강세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간 했던 고민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유독 잘 풀리지 않는 하루 끝에 한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모든 걸 잊을 수 있으니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내가 좋아지기라도 했어?”

“어.”

내 대답을 들은 상대는 순간 멈칫했다. 획 고갤 돌린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뭐라고?”

대답하는 데 늘 1초밖에 걸리지 않는 놈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너, 좋아졌다고.”

“…….”

“너만 이상한 줄 알았는데. 나도 마찬가지네.”

늘 태연하던 강세현이 놀랐다. 그런 그를 보고 내가 그만큼 강세현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이야.

“하자, 안 평범한 그거.”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단단한 팔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프도록 꽉,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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